[충북일보] 조선시대 10여명의 희생자를 낸 옥천 권대전 역모사건(일명 정한 역모사건)은 조흥빈(趙興賓)이라는 인물의 고변(밀고)으로 시작됐다. 권대진에게는 '낙'(絡)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는 조흥빈의 아들 '완'(浣)에게 권대진의 역모를 흘리며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이 기회를 놓히지 말라"는 식으로 동참을 꼬드겼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조흥빈의 아들 '완'은 무시무시한 대화가 잘 믿기지 않았는지 며칠 뒤 발설자인 권대진을 직접 찾아가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했다. 권은 성공을 확신했는지 역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권대진의 역모 의도를 재차 확인한 조완은 이를 아버지(조흥빈)에게 알렸고, 그가
[충북일보] 조선 인조 때의 옥천지역 역모사건과 관련해 권대진, 정한, 양천식 위로로 서술을 했다. 그러나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종합하면 당시 역모사건에는 총 32명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옥천 10명, 합천 6명, 나머지는 전라도, 경상도, 청주 등이다. 청주에서는 조철이라는 인물이 당시 역모사건에 가담했다. 옥천 가담자가 가장 많은 것은 권대진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가장 컸음을 의미한다. 옥천 가담자 가운데 권대진, 권락, 권계, 권순, 영이, 박선검, 박준검 등 7명은 처형됐다. 권락, 권계는 권대진의 아들이고 권순은 조카이다. 이밖에 영이는 권대진가의 노비이고 박선검, 박준검 권대진가의 보인이었다. 보인은 대신 병역의무를 지는 것을 말한다. 권락, 권계 형제는 아버지(권대진)의 역모 도모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인용문의 '그
[충북일보] 우리고장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을 현혹한 인조조의 떠돌이 요승 양천식(楊天植)은 출가와 환속을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생활 자체가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역시 3번씩이나 개명하는 등 뭔가를 감추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인용문의 양정식은 양천식과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으로 출가와 환속을 함께 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나, 양천식은 외견상 관상(觀相)과 풍수(風水)를 보는데 능했다. 권대진이 첫 만남부터 양천식에게 설득당한 것은 이 때문으로 파악된다. 양천식은 권대진을 보자 "백마장군이 될 관상"이라고 유인하는 말을 던졌다. 민속에서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인물을 '백마장군'으로 호칭하고 있다. 의 공손찬(公孫瓚)이나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을 백마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충북일보] 인조 9년(1631) 2월에 정한(鄭澣·?-1631)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지금의 충북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 등이 합천인 정한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같은 옥천인 조흥빈(趙興賓)이 고변[밀고]하면서 일어났다. '옥천인(沃川人) 조흥빈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도사를 보내 권대진·권계·권락·권순·정담·양천식·양정식·이찬희·정후엄, 박선검·박후검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이 사건의 성격은 잔존하던 대북파들이 자파 인물을 국왕으로 옹립, 세력을 복원하려는데 있었다. 당시 당색이 대북(大北)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천인 권대진은 '출신'(出身) 신분으로, 스스로를 중병영장 혹은 권천총(權千摠)으로 칭했다.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유생을 일컫는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1575-1641)은 대북의 지지를 얻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에 의해 실각, 강화도로 유배된 끝에 제주도로 이배됐다. 당연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이끌던 대북
[충북일보] 나말여초에 극성을 부렸던 왜구는 정규 군인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공민왕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 백두대간에 원관(院館)을 세운 후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초점'(草岾)을 통해 운송토록 했다. '초점'이 새재와 조령의 지명어원이 됐다. 순우리말 '새'는 풀을 의미하고, 그 사례로는 '이엉새'와 '억새'가 있다. 지붕 위에 얻는 풀이 '이엉새'이고, 억센 풀이 '억새'이다. '조령'은 순우리말 '새'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지금도 조령 문경 사면의 지명은 '초곡'(草谷) 또는 '푸실'로 부른다. '초곡'은 '푸실'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는 '풀실'이었으나 ㄹ음 탈락현상으로 '푸실'이 됐다. '풀'은 '草,' '실'은 골짜기(谷)라는 의미다. 《고려사》에는 2인자 신돈(辛旽·?-1371)이 수도를 개경에서 우리고장 충주로 몰래 옮기려다 공민왕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안전하고, 또 남한강 물길을 통해 경상도 세곡을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했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강경책보다는 온건책을 구사하여 부산포·내이포(지금의 진해)·
[충북일보]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와 1755년(영조 31)의 유수원 역모사건은 3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나고 있으나 그 뿌리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론대 비노론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이때의 비노론은 소론과 남인들의 정치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지난 회를 끝으로 영조 연간을 휩쓸었던 두 정치적인 사건을 성깃성깃 하게 살펴봤다. 그 와중에 엄벙둠벙 하면서 빼먹은 인물이 있다. 황진기(黃鎭紀)라는 인물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선전관(宣傳官)이라는 중앙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그해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 선전관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무반직으로 종9~정3품의 품계를 지녔으나, 그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김일경(金一鏡·1662∼1724)의 문인(제자)으로 추정되는 만큼 골수 소론계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명언(李明彦) 부자와 함께 밀서(密書)를 꿰맨 호복(胡服)을 입고 역모를 도모하였는데,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청나라로 망명했다. 흔치 아닌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당시 조정은 망명한 황진기(黃鎭紀)가 처벌된 무리와 연락, 후에 다시 2차 역
[충북일보] 조선 영조-순조 연간을 산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있다. 그는 서얼 출신이었으나 영조 탕평책의 일종인 서얼통청운동에 의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박제가·박지원 등 당대 실학자들과 교유했다. 서얼청통(庶孼通淸)은 서얼이 청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청요직(淸要職)은 홍문관·예문관·춘추관 등 지위는 그리 높지 않지만 학식과 덕망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이었다. 성대중의 저서 가운데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있다. '청성'은 그의 호이다. 청성잡기에는 조서후기 심약이라는 인물과 기생 첨섬(翠蟾)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한다. 취섬은 함양 출신 기생으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서울로 뽑혀갔다. 그녀가 서울에서 지낸 지 몇 년 만에 협객과 한량들 간에는 취섬이 사는 골목을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취섬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함양에 돌아올 때 심약이 이웃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녀를 소실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뒤 심약이 그의 형 심악의 역모에 연루되어 먼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됐고, 그러자 취섬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곳까지 따라가 정성을 다해 심약을 섬겼다. 심약이 남해로
[충북일보] 한때 국가 개혁을 위해 귀머거리가 된 자신과 필담(筆談)을 나누던 일국의 지존. 유수원(柳壽垣)은 그 지존(영조) 앞에서 처음에는 춘천 교영계 역모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답변을 기록한 실록 기사는 '마침내 형신하니, 유수원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영조실록 31년 5월 25일자)로 시작된다. 형신은 죄인을 형구(刑具)로 고문하면서 신문(訊問)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을 일컫는다. 이 단계는 심한 고문이 아닌 주로 정강이 부분을 때렸다. 과도한 고문으로 인한 살인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으로 국문도 하루 세 차례 이상 형신을 할 수 없었다. '무릇 형신은 하루에 한 차례를 넘지 못하며, 추국에서는 두 차례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심문의 첫 단계로,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의 강도는 급속히 강해졌다.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유수원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유수원의 입
[충북일보] 1755년(영조 31)에 발생한 춘천 교영계(敎英契) 역모사건의 명단에 어찌된 이유에서 인지 유수원(柳壽垣)의 이름이 등장했다. 당연히 유수원은 국문장으로 끌려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반란·모역 등의 중대 범죄가 발생할 경우 왕의 명령에 의해 임시 심문기구인 국청(鞠廳)을 설치하고 죄를 캤다. 이때의 '鞠' 자는 '국문할 국' 자이다. 국문은 대개 2종류로 분류됐다. 임금이 친히 심문을 하면 친국(親鞫), 임금이 빠진 채 의금부·사헌부가 심문을 하면 정국(庭鞫)이라고 불렀다. 모반 등 국왕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은 주로 친국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의금부 당상관 ·사헌부 및 사간원의 관원, 좌 ·우포도청의 대장 등이 배석했고, 이 가운데 대신 한 사람을 위관(委官)으로 명하여 시행하였다. 송강 정철도 정여립사건 때 위관을 맡았다가 두고 두고 영남사림(동인)의 원망을 산 바 있고, 실제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조는 내사복에서 유수원을 친국했다. 내사복은 본래 임금의 말과 수레를 전담 관리하던 관청이나 때때로 친국 장소로도 사용됐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유수원·조재민(趙載敏) 등에게 물었는데, 조재민은
[충북일보] 유수원은 그의 나이 50살이 되는 해인 1744년(영조 20) 벼슬길에서 물너났다. 이후 10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초야에 묻혀 야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가 노론이 득세하면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타의에 의해 야인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755년(영조 31) 5월 무렵이었다. 이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영조를 부정하는 글을 써내는 심정연(沈鼎衍·?-1755)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란)에 연루돼 처형된 심성연(沈成衍)과 심익연(沈益衍)이 그의 형들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심정연은 자라면서 형들의 얘기를 들었다. "익명서는 과연 신이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신의 원수입니다. 신은 심성연과 심익연의 아우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훈척(勳戚)인 사람과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는 사람은 모두 미워하여…."-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뒤에 교영계(敎英契)라는 춘천지역의 사당조직이 자리잡고 있음이 밝혀졌고, 당시 훈장은 유봉성(柳鳳星)이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훈장은 일정 수준의 학식과 교
숙종대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것은 젊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한 정치 보복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유교의 도리이 맞느냐, 안 맞느냐를 논쟁하는 사문(斯文) 시비가 일어났다. 그러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소론은 창당정신을 저버리고 노론에 대한 극심한 정치 보복을 자행했다. 이것은 노론도 마찬가지여서 승리한 자가 충(忠)이 되고, 패비한 자는 역(逆)이 되면서 공존의 정치는 사라지고 독존만이 횡행하였다. 숙종~경종 연간은 사화의 절정기였다. 1721년(경종1)에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조선시대에는 두번의 왕세제가 탄생했다. 태종 이방원이 정종 때, 그리고 영조가 경종 때 세제로 책봉됐다. 노론은 나아가 병약하며서 후사가 없는 경종을 대신해 연잉군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리청정은 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을 일컫는다. 경종은 이를 수용했지만 조태구(趙泰耉·1660-1723), 유
[충북일보] 충주목 출신 유수원(柳壽垣·1694-1755)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이다. 조선의 교육은 서원과 서당이 중심이었지만 구한말이 되면 그 명칭이 달라진다. 변천사를 살펴보면 1895년 '소학교', 1906년 '보통학교', 1941년 '국민학교' 등의 명칭이 등장했다. 일제는 '충량한 일본국의 신민(臣民), 곧 국민(國民)'을 만들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1941년 3월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 명칭은 반세기 넘게 사용되다가 1996년 3월 1일부터 지금의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까지 생존했던 그가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구사했을리는 없다. 그는 '나이 4-5세', '15세 이전' 등 학령(學齡)의 개념을 구사했다. 그의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은 중국과의 비교에서 출발한다. 유수원은 중국의 교육관습 가운데 공부를 하다가 그쪽에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농(農)ㆍ상(商)ㆍ공(工)으로 전환하는 것을 무척 높이 샀다. 한 마디로 모두가 선비가 되려는 것은 국가적으로 손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들의 나이 4~5세가 되면 곧 글방 선생에게 나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