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내제군(奈堤郡), 고려시대 제주군(堤州郡), 조선시대 제천현(堤川縣), 대한제국 이후 제천군(堤川郡), 현 제천시(堤川市). 이상에서 보듯 제천의 지명은 전통적으로 '둑'〔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의림지(義林池)의 유명성이 지명으로 옮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 지지리를 보면 제천은 삼국시대 때는 '내토군'(奈吐郡)으로 불리었다. 어문학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내'는 흐르는 '내'〔川〕, '토'는 '둑'〔堤〕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시 삼국시대 제천의 지명 '내토군'도 의림지에 포섭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제천은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川), 의원(義原), 의주(義州) 등의 별호(別號)를 갖고 있었다. "제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으로 신라 경덕왕이 내제군으로 했으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14년(1483)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 8년에 이를 없앴으며, 현종 9년(1668)에 내속하였고 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 별호를 의천(義川)이라 하며 또 의원(義原)이라고도 불렀다."- 별호는 글자 그대로 본래 명칭 외에 다르게 불려지는 호칭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의 경상도 지역의 지리적 경계는 마치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 서쪽으로는 소백산맥〔백두대간〕 줄기가 아구리가 좁은 U자 모양으로 감싸고 있고, 그 가운데를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같은 닫힌 구조의 지형에서는 배타적이고 폐쇄성이 강한 문화가 발달하기 쉽다.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서 보듯 팔도 가운데 경상도 사투리는 유독 발음이 강하다. 어문학자들은 이같은 원인을 경상도의 닫힌 지리구조에서 찾고 있다. 신라는 고대부터 이같은 환경탓에 백두대간을 늘 의식했다.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 충주~문경 사이에 위치한 계립령을 처음으로 열었다. 다른 지역 입장에서 보면 고갯길 하나 뚫은 것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역사적인 일인 양 《삼국사기》에 기록하였고, 이후부터 계립령에는 '우리나라 역사문헌에 등장하는 제 1호 고개'라는 서술어가 따라다니고 있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대부터 백두대간을 돌파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병아리가 달걀껍질을 쪼고 나오려는 모습과 같았다. 그 결과, 신라는 550년 백두대간 죽령(689m)을 넘어 단양에 적성비(赤城碑·국보 198호)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충북일보] 조선 왕실은 태(胎)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명당자리를 고른 후 해당 예법에 따라 정성스럽게 매장했다. 그 시설물이 태실(胎室)이다. 나아가 왕실은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했다. 우리고장에는 진천군 진천읍의 김유신 태실, 충주 엄정면 괴동리의 경종대왕 태실, 청주 낭성면 무성리의 영조대왕 태실, 보은 속리산면 사내리의 순조대왕 태실,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 등 5개 태실이 존재한다. 왕명과 인명이 부여된 것에서 보듯 이들 태실은 주인이 모두 확인된다. 이에 비해 충청북도기념물 제 96호인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은 지명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태실의 주인이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역 학계는 대체로 선조의 7번째 아들로,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仁城君)을 산덕리 태실의 주인으로 보고 있다. 태실비는 높이 98㎝, 너비 46㎝, 두께 14㎝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고, 그 뒷면에
[충북일보] 전어(錢魚)는 가을 이후가 제철로, 지금이 그런 시기에 해당한다. 전어의 어원이 재미있다. 백과사전은 전어에 대해 '등쪽에 갈색 반점의 세로줄이 여러 개 있고 아가미 부근에는 커다란 흑색 반점이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바로 전어는 흑색 반점이 '동전'〔錢〕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어와 관련된 속담으로 '봄 도다리, 가을 전어' 그리고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다' 등이 있다. 전어는 산란기인 봄에서 여름까지는 맛이 없지만, 가을이 되면 체내에 지방질이 축적된다. 따라서 생선으로 구울 때 지글거리며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 내음이 매우 고소하기 때문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라는 속담도 생겨났다. 최근 모 방송인이 고소를 많이 한다고 해서 '고소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시대에도 상소를 많이 하는 '상소남' 선비들이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조헌(趙憲·1544-1592)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조헌은 임진왜란 가능성을 예상하고 전쟁 발발 1년전 도끼를 메고 한양 궁궐로 올라가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했다. 지부상소는 나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도끼로 쳐달라는 의미를 지닌다
[충북일보]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젓가락 페스티발'이 청주 예술의 전당과 백제유물전시관 등에서 내달 1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이어령 조직위 명예위원장(전 문화부장관)은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젓가락의 종주국을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어느 나라가 더 젓가락 문화를 보존하고 젓가락 정신을 잘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현재 젓가락 문화는 한·중·일 삼국과 베트남·타이·미얀마 등 동아시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지만, 그 기원은 대략 3천년전 중국에서 제사와 관련해서 태동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갑골문의 '鄕' 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갑골문 존재하던 시기, 즉 중국 은나라(BC1600~BC 1046) 때는 젓가락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역사에 젓가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춘추전국시대(BC 770~BC 440년)였다. 당시 제관(祭冠)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을 옮길 때 감히 손으로 함부로 쥘 수 없어 젓가락을 사용했다. 이후 중국의 지배층들이 이 같은 모습을 모방해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면 정인(淨人·깨끗한 사람), 그렇지
[충북일보] 농업은 전근대 사회를 통틀어 국가재정의 밑바탕을 차지했고,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리 시설의 개설과 유지·보수는 국정의 우선순위를 차치하였다. 수리시설 가운데 제언(堤堰)은 벼 재배와 불가분의 관계인만큼 그 등장 시기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이 듣던 수산제·벽골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대국가 단계인 삼국시대 들어서면 제언에 대한 기록이 부쩍 증가한다. 이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미곡을 조세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인공 제언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논을 '오답(奧沓)'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수리시설이 발달하면서 고려시대에는 산전(山田)이 개간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저습지와 연해지 개발이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역시 제언은 축조와 관리에 많은 비용과 노동력, 그리고 기술이 투입되었고, 따라서 제언의 건설 및 유지 관리는 보통 국가가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헌과 지도에는 제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를 보면 당시 관내에는 남일면, 북강내일면, 산외일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 북강내이면, 수신면(현 천안시), 서강외이면, 서강외일면, 서강내이면, 남이면 등에 11개의
[충북일보] 조선시대 전국 각도에서는 식년시(式年試), 즉 3년마다 한번씩 문과 초시에 해당하는 향시(鄕試)를 치뤘다. 이때 과거 시험장의 감독관은 관찰사나 도병마사가 맡았다. 그러나 응시생이 많은 지역에는 서울에서 경시관(京試官)이 파견됐다. 조선 선조~인조 대의 인물로 김시양(金時讓·1581-1643)이 있다. 그의 호는 하담(荷潭)으로 비인현감을 지낸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그가 광해군 대에 충홍도 경시관이 돼 우리고장에 파견됐다. 당시 충청도는 어떤 역모사건이 있었는지 도명(道名 )이 '충홍도'로 개호돼 있었다. 그는 이때 향시의 제목으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를 냈다. 이 표현은 맹자 '군시신여초개 신시군여구수(君視臣如草芥 〃)의 뒤 부분이다. 해석하면 '임금이 신하를 초개와 같이 보면, 신하도 임금을 원수같이 본다'는 뜻이 된다. 초개는 풀과 티끌이라는 의미로, 임금은 절대 권력을 지녔지만 신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뒷부분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만을 취하면 국왕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응시생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등 시험장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충홍도의 경시
[충북일보]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의 이성산성(已城山城)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굴산성(屈山城)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졌다. 옥천군과 국강고고학연구소는 최근 발굴 성과를 발표, "이성산성의 서쪽 성벽 25m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성벽의 흙에서 섞여 나온 유물로 미뤄 5세기 신라 토성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성산성은 해발 115∼155m의 구릉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천1백40m이다. 이밖에 성벽의 너비는 하단부를 기준으로 최대 15.4m이고, 높이는 약 3.5m에 이르고 있다. 굴산성에 대한 역사시록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8년조에는 "정월에 이찬 실죽을 배하여 장군으로 삼고, 일선 땅의 정부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굴산의 두 성을 고쳐 쌓았다(春正月 拜伊·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ㆍ屈山二城)"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산현은 본시 굴현으로서, 경덕왕이 기산으로 개명했고 지금은 청산현이다"(耆山縣 本屈縣 景德王改名 今靑山縣)라고 기록했다. 두 문헌기록은 △신라가 소지마립간 때 굴산성을 개축하였고 △그 굴산성은 청산현에 위치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굴산성은 문헌
조선시대 색(色)의 물질은 얻는 것은 국가대사의 하나였다. 건축물의 외관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재위 16년(1740)에 종묘의 신탑(神榻)을 모두 당주홍(唐朱紅)으로 고쳐 칠하라고 명하였다. 신탑은 위패를 올려놓는 상, 당주홍은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한 붉은색 안료를 의미한다. 그러자 예조참판 이익정(李益炡)이 "각실의 신탑을 처음에는 번주홍(燔朱紅)으로 칠하였는데 수개(修改)할 때마다 당주홍으로 고쳤으므로 각실의 신탑은 그 색이 같지 않습니다"(영조실록 16년 4월 19일자)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달라서는 안 되니, 모두 당주홍으로 고쳐 칠하고 이 뒤로는 정식(定式)으로 삼으라"(〃)라고 하명하였다. 위패를 모신 공간은 가장 신성한 제례의식 공간이고, 따라서 변색이 잦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지방정부도 색물질을 얻는 것을 무척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 청주목 월경지의 하나로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에 주안향(周岸鄕)이 위치했다. 마치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와 같은 모습으로 주안향은 문의현을 뛰어넘은 곳에 위치하였다. 대전시 동구의 대청호 일대가 대체로 그 지역이다. 주안향은 구한말까지 그대로 존속됐고,
[충북일보] 지난 1998년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이 보물 제 1889호로 지정되었다. 이 먹은 당시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를 하던 과정 중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되었다. '단산오옥'은 '단산'과 '오옥'의 합성어다. 단산(丹山)은 단양의 옛 이름으로,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단양군(丹陽郡)으로 승격되는 1318년(고려 충숙왕 5)까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옥(烏玉)은 먹의 별칭인 오옥결(烏玉O)의 약칭이다. 따라서 단산오옥은 '단양 먹(丹陽 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 이 먹은 무덤 주인의 머리맡 부근 철제가위 위에 반으로 조각난 채 놓여 있었고, 단산오(丹山烏) 아래 일(一)자만 보였다. 그럼에도 '一'을 '玉'자로 추정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 단양군 조는 단양의 토산을 설명하면서 '墨 最良 號爲丹山烏玉'라고 기술하였다. 의역하면 '단양의 먹, 최고 품질로 단산오옥으로 불려진다'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도 《세종실록》 지리지와 똑같은 문장으로 기술돼 있다. 고려시대 단양에서 최고 품질의
[충북일보] 괴산은 고려시대에는 괴주(槐州)로 불리었다. 지금의 지명 괴산(槐山)은 조선 태종대에 등장하였다. 본래 '州'(주) 자 지명은 '牧'(목) 이상에만 붙이는 행정 위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 후기들어 '주'자 인플레이션 현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고려의 국사(국사)나 왕사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 '주' 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시들도 중국을 갔다온 후 그 기념으로 자신의 출생지에 '주'자 지명을 끌어다 붙였다. "혹은 환시(宦寺)가 중국에 들어가 입시하였다가 사명을 받들고 환향하거나, 혹은 중이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내가 난 땅이라.' 하여, 권세를 타서 요구하고 청하여, (…) 혹은 군과 현을 승격하여 주를 만드니, 이 때문에 군과 현의 이름이 날로 뛰어오르게 되었으나…."- 선초의 태종은 이같은 주자 지명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메스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괴주는 지금의 괴산으로 개명됐다.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곳은 천(川) 자가 붙었으나 괴산처럼 산이 많은 곳에는 山자가 붙여졌다. 전자의 예로는 우리고장 제천·옥천·진천 등이 해당된다. 현재 괴산군은 감물면·문광면·불정면·사리면
[충북일보]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는 1864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때 국내 입국해 있던 천주교 선교사 가운데 일부가 "천주교도의 힘을 빌어 한 · 불 · 영 3국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이 조언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장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왕권유지 차원에서 천주교 탄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는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을 내렸고,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자 8천여 명이 학살을 당하는 대참극이 발생하였다. 바로 병인박해다. 병인년의 박해로 신자들은 산속이나 오지로 피신해 다니다가 수많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같은 사실이 중국 천진에 주둔해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알려지면서 그 보복으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다.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국내 숨어지내던 인물로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erron·1827-1903) 신부가 있었다. 그는 리
[충북일보] 통합 청주시의 숙원이던 '청주시청 신청사 건립'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하면서 새로운 통합 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현 청사 부지에 신축'이라는 전제로 사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공론화와 갈등 조정을 겪으며 사업추진이 지연됐지만,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사업 방향을 정립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시는 타당성조사, 투자심사, 교통영향평가, 매장유산 발굴조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마무리했고, 6월 중 시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오는 7월 착공할 계획이다. 준공은 2028년 하반기가 목표다. 새로운 청사는 청주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은 도시의 중심이자, 시민 삶의 변화를 이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세우다 신청사 건립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지 안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청주병원이 있었고 기존 청사 본관동을 철거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사회 갈등이 팽팽했다. 시는 원칙 있는 행정과 유연한 협의를 통해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갔다. 청주병원의 경우, 시는 공익사업을 위한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해 부지 소유권을 확보했으며 병원 측과의 소송에서도 최종 승소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도가 정부가 추진하는 '1호 분산에너지 특화지역(분산특구)' 최종 후보지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분산특구 3개 유형 중 도가 신청한 '공급자원 유치형'은 한 곳도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는 앞으로 정부의 분산특구 추가 지정 등을 예의주시하면서 유형과 계획 변경 등을 통해 유치 재도전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1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실무위원회를 열어 11개 지자체가 신청한 분산특구 중 7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선정 지역과 유형을 보면 제주, 부산, 경기, 경북은 '신산업 활성화형', 울산, 충남, 전남은 '전력수요 유치형'이다. 이 중 신산업형은 신기술과 연계한 신사업 실증이 핵심이다. 분산 자원과 연계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방식이다. 수요 유치형은 전력 수급 여유 지역에 다소비 산업을 유치해 지역 내 소비를 늘리는 모델이다. 하지만 산자부는 공급 유치형의 경우 단 한 곳도 후보지를 선정하지 않았다. 산자부는 발전소 등의 구축이 필요해 단기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공급 유치형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않은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