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결편지'는 곧 죽을 사람이 산 사람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말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국문을 받기 위해 귀양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숙종의 사약을 받고 전북 정읍에서 죽었다. 이때 수제자 권상하에게 남긴 영결편지에는 '괴산 화양동에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제사 공간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워라'라는 유언이 들어 있었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도운 인물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표현된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준 은인이라는 뜻이다. 의종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 북경으로 처들어오자 처첩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징산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제천 한수에서 달려온 권상하는 유언에 따라 숙종 29년(1703)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라는 큰 사당을 건립하게 된다. 이때의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이름으로,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충절의 표현이다. 우암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으로 화양동 석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엄청나게 큰 글씨를 새겼다. 애각(崖刻)이라고 한다. 민정중이라는 인물이
역사 이래로 청주·청원은 같은 생활권역에 속했다. 생물학적인 비유를 하면 자웅동체가 된다. 그런 청주가 미군정하인 지난 1946년 6월 1일부터 '청주부'와 '청원군'으로 분리됐다. 행정적으로 이산가족이 됐다. 이때의 '부'(府)는 행정상 '시'(市)와 거의 비슷한 지위를 지닌다. 미군정이 왜 이같은 행정적 조치를 취했는가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인구가 갑자기 늘었거나 도시적 변동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일단 지방자치 확대 일환, 당시 최고 수장인 충북도지사의 사전요청, 도청 소재지가 위치한 청주에 대한 배려 등 3가지를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는 청주·청원이 분리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서울특별시헌장을 채택한다. 이 경우 행정 위계나 흐름상 청주·청원 분리는 서울특별시헌장 다음에 와야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청주·청원은 그보다 두 달 이른 그해 6월에 분리됐다. 충북도지사의 사전요청 건도 분리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윤하영(1889~1956)으로, 그는 미군정의 입맛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1
조선시대 김만균이라는 인물은 현종이 청나라 사신 접대 장소인 모화관에 갈 때 임금을 모시는 것을 거부했다. 병자호란 때 할머니가 청나라 군사에게 안 좋은 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승지 서필원이 할머니에 대한 의리는 사적인 것이고, 임금을 모시는 것은 관리된 자의 공적인 도리라며 그를 비난했다. 승지는 지금의 청와대 고위직에 해당한다. 현종도 화가 나 "임금을 우습게 알고 모욕한다"며 그를 하옥시켰다. 그러자 옥천출신 우암 송시열이 임금의 처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임금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공적 임무일 뿐이며, 조-손 간의 의리는 사적인 것 같으나 실은 인륜을 밝혀 인심과 천리를 유지하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므로 오히려 장려할 일이지 죄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김만균은 곧 풀려날 수 있었다. 조선 임금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사림이 등장하고, 이들이 도학(道學) 정치를 추구하면서 왕권의 위상과 행사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사림은 이른바 세도권(世道權)을 내세워 번번히 왕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세도권은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 외척의 세도(勢道)와는 다르다. 사림의 지지를 등에
국보 제 198호인 단양 적성비는 그 발견 경위가 다소 극적이다.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 박물관팀은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지난 1978년 1월 6일 단양 적성 일대를 방문한다. 간밤에 눈이 내렸기 때문에 단원들은 등산화에 묻은 진흙을 자주 털어내야 했다. 이때 한 단원이 한 뼘 정도 노출된 돌부리에 진흙을 터는 순간 암석 표면에 '큰 大', '방패 干' 등의 한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1천5백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적성비가 잠을 깨는 순간이었다.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쳐 위치하던 신라는 늘 영토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백두대간은 신라의 방어선도 됐지만 서진, 북진을 하는데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따라서 신라는 아달라왕때 계립령(156년)과 죽령(158년)을 개척한 후 상당 기간동안 백두대간을 넘지 못했다. 신라가 그런 웅크림 끝에 백두대간을 넘어와 세운 비가 단양 적성비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와 고구려를 공격, 죽령 바깥쪽~고현 안쪽의 10개 군을 공취했다'고 적고 있다. 적성비는 당시 활약한 인물로 우산국을 점령했던 이사부,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김유신 할아버지 김무력 등을 적어놓고 있다. 단양 적성비가 정확히 언제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을 '서얼'(庶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와 '얼'에는 구별이 있다. 서자는 양반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얼자는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난 자식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서얼을 차별하지 않았으나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은 달랐다. 서얼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여겨졌고 관직에 등용되기도 어려웠다. 조선시대 때 팔도 감사(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인물이 단 2명 존재한다. 바로 함부림(1360~1410), 반석평(1472~1540)이다. 이중 반석평은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도 역임하는 등 조선전기 단연 행정의 달인이었다.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반석평의 묘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반석평은 분명히 서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팔도감사와 육조판서를 모두 거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얘기가 전해진다.반석평은 그의 나이 13살 때 아버지 반서린을 잃는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회미장씨는 반석평 등 3형제를 데리고 서울로 이주를 한다. 이때 회미장씨는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삯바느질 등 온갖 고생을 한 것으로 문중사는 전하고 있다. 이후부터는 다소 혼선이 일어난다.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
신라장적(新羅帳籍)은 1933년 일본 황실 유물 창고인 정창원에서 고려불경 화엄경론을 수리하던중 우연히 발견됐다. 특히 신라장적은 통일신라시대의 서원경, 즉 지금의 청주 일대를 조사 대상으로 한 촌락 문서여서 더욱 애착이 가고 있다. 신라장적에는 서원경 일대 4개 촌락이 등장한다. 이중 지명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은 유관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1개는 '서원경 직속의 OOO촌' 정도만 쓰여 있고, 또 다른 지명은 그 부분이 멸실됐기 때문에 촌락명을 전혀 알 수 없다. 이중 '서원경 직속 OOO'촌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촌락 위치는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는 지금의 청주시 외곽인 연기군이나 내수읍 초정 정도로 보고 있다. 반면 또 다른 학자는 당시 1개 촌이 지금의 1개 면 정도가 된다고 가정, 지금의 청주시내 어느 곳 쯤으로 비정하고 있다.신라장적은 인문지리적인 요소 외에 통계학적으로도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4개 촌의 통계를 합산한 결과, 당시 4개 촌락에는 총 462명이 생존했다. 이중 양인 즉 평민이 437명, 노비가 25명 가량이었다. 보다 면밀히 분석한 결과, 당시 노비는 인간적인 권리와 의무를
조선시대 때 제천 청풍을 관향(본관)으로 가진 왕비로는 명성왕후, 효의왕후 등 2명이 존재했다. 명성왕후(1642∼1683)는 현종의 비이면서 숙종의 어머니가 된다. 10살 때 세자빈이 되어 가례를 올리고 8년 후 정비가 됐다. 이때 청풍의 행정적 지위가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됐다고 얼마전에 밝힌 바 있다. 효의왕후(1753∼1821)는 영조에 의해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10살 때 정조와 가례를 올렸다. 두 여인은 혈육적으로도 매우 가까워 명성왕후가 효의왕후의 고모가 된다. 그러나 같은 청풍김씨 출신의 왕비이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명성왕후를 평할 때 '지능이 비상했지만 성격이 과격했다'는 표현이 뒤따라 다닌다.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이른바 '홍수의 변'이다. 이때의 홍수(紅袖)는 붉은 옷소매, 즉 나인(궁녀)를 의미한다.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는 후사를 이을 아들(후에 숙종)이 한 명밖에 없었다. 반면 현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등 3명의 아들을 뒀다. 당시 이들을 '삼복'이라고 불렀다. 이때문에 명성왕후는 자칫 인평대군 쪽이 힘을 합해 외아들을 해치고, 그후 삼복 가운데 한 명을 임금으로 추대할지 모른다는 강박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풍명월'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대화를 나누던 중 조선팔도 사람의 기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경상도 사람은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하다는 뜻에서 '태산준령'(泰山峻嶺), 강원도는 큰 바위 아래에 있는 부처님처럼 어질고 인자하다 뜻에서 '암하노불'(巖下老佛), 전라도는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풍전세류'(風前細柳)로 표현했다.또 충청도는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고매하다는 뜻에서 '청풍명월', 경기도는 거울속의 미인처럼 우아하고 단정하다는 뜻에서 '경중미인'(鏡中美人), 황해도는 거친 돌 밭을 가는 소처럼 묵묵하고 억세다는 뜻에서 '석전경우'(石田耕牛)로 표현했다.이밖에 평안도는 숲 속에서 나온 범처럼 매섭고 사납다는 뜻에서 맹호출림(猛虎出林), 함경도는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맹렬하고 억척스럽다는 뜻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표현했다.많은 사람들이 '청풍명월'과 제천 '청풍'의 관련성을 사실로 여기고 있다. 청풍명월 할 때의 '청풍'과 지명 '청풍'은 한자표기가 다르지 않다. 때문에 제천시는 제천을 '청풍명월의 본향(
누각과 정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 루'(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워둔 채 비우고 2층에 마루를 깐 고건축물을 말한다. 관아 부속건물로 많이 지어졌다. 이에 비해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졌다.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그러나 누각과 정자는 공통점도 있다. 벽과 문이 없다는 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누허즉 능납만경'(樓虛則能納萬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의역하면 '누각이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취경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고장 제천에 한벽루( 寒碧樓)라는 멋진 누각이 존재하고 있다. 보통의 누각은 조망성이 좋은 곳에 독립적으로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한벽루는 누각 본채 외에 작은 누각을 함께 거느리고 있다. 전문용어로 '날개 익'(翼) 자를 써서 '익랑'이라고 한다. 남원 광한루, 밀양
태종은 재위 3년(1403) 조운선 대침몰 사고가 발생하자 그 대책으로 세곡을 육지로 운반하는 방안, 배를 임대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게 된다. 이중 하륜이 건의 한 육지로 운반하는 방안이 채택되면서 경상도 세곡도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로 집하됐다. 그러나 목계나루 가흥창이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 때였다. 그 이전에 인근 금천창이 짧은 기간 가동됐다. 세조가 가흥창은 본격 가동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그는 세종 때 일시 실시되던 사설조운이 신권(臣權)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이를 혁파했다. 그러나 이때의 가흥창은 창고를 지니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까지 가흥창은 주위를 울타리 등을 이용해 둘러치는 정도였다. 그러자 창고 건립 여부를 둘러싸고 대신들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성종 21년(1490)의 실록을 보면 통례원 봉례 한증이 이런 말을 한다. 통례원은 조선시대 때 국가의식을 총괄하던 기구를 일컫는다. "가흥창(可興倉)에 전세(田稅)를 수납할 때에 주위를 둘러 치거나 위를 덮을 물건을, 세를 내는 인민(人民)에게 바치게 하기 때문에 인민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창
조선후기까지 충주 목계나루 건너편에는 가흥창이라는 국가 조창이 위치했다. 조창은 조세로 받은 세곡을 운송전 일시 보관하던 창고를 말한다. 이 영향으로 목계나루는 내륙 최대의 항구 역할을 하면서, 여기에 딸린 장터는 항상 장똘뱅이들로 북적였다. 목계나루의 번창은 아무래도 수계 입지와 관련이 있다. 일대는 수량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기 때문에 배가 접안하고 또 물류 창고가 들어서기에 매우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덕흥창이라는 국가 조창이 운영됐다. 조선도 덕흥창을 가흥창으로 이름을 바꾼 후, 그 조운 기능을 계승했다. 가흥창의 위상은 조선 태종때 조운선 침몰 사고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체 9개의 국가 조창이 운영됐다. 이중 6개는 바닷길이고, 충주 가흥창, 원주 흥원창 등 3개는 내륙 강길을 이용했다. 그러던 중 태종 3년(1403)에 경상도에서 거둔 세곡을 싣고 남해안을 따라 운항하던 34척의 배가 거친 파도에 모두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부분이 태종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임금이 듣고 탄식하기를, "책임은 내게 있다. 만인을 몰아서 사지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
어제 진천 농다리(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 얘기를 잠깐했다. 농다리는 통돌이 석축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위에 놓인 널돌이 상판 기능을 하고 있다. 굳이 교각 대신 '석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기둥 역할을 하는 '통돌'이 현대적 의미의 교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농다리는 이름이 독특하다. 특히 '농'자가 바로 와닿지 않는다. 농다리 할 때의 '농'은 '대바구니 籠' 자를 쓰고 있다. 운동경기 농구도 '대바구니 籠' 자이다. 이 경우 농다리는 '대바구니 모양을 한 다리'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농다리는 대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이 부분은 籠의 또 다른 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전에서 이 한자를 찾으면 가구를 뜻하는 '롱'의 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농다리 할 때의 '농'은 '장롱'(欌籠)을 의미한다. 농다리에 사용된 돌은 사각형 모양으로, 마치 장롱을 여러 개 쌓아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농다리가 지네 모습을 닮은 데서 '농' 자가 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지네의 한자는 '농'이 아닌, '지네 오'(蜈) 자이다. 농다리의 재료적인 면도 조금은 독특하다. 우리나라 다리는 징검다리→통나무다리→형교→돌다리→콘크리트교-철교 순으로 발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