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 김종직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중국 초나라왕 의제(?~BC 296)의 죽음에 비유하는 글을 남겼다. 의제는 진나라 군사에 체포돼 3년 동안 유폐생활을 하다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이 글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슬그머니 사초에 끼워넣었고 이를 발견해 연산군에게 고자질을 한 인물이 유자광이다. 이는 하나의 구실로 무오사화의 비극은 그 이전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현실적이고 위민적인 정치를 하려고 했으나 중앙정계에 막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왕도정치를 지향했다. 이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말한다. 두 권력이 부딪히기 시작한 곳은 왕과 신하가 경서를 함께 공부하거나 정치적인 토론을 하던 경연이라는 공간이었다. '우의정 한치형은 말하기를, "청컨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도모하되, 공구스럽게 생각하여 몸을 닦고 성찰하시며,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어 날마다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시어 재변을 해소시킬 도리를 다하소서" 하고…'- 면전에서 대놓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라"고 노골적인 힐문을 하고 있다. 또 경연에 자주 결석을 했는지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상소도 올린다. '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이자 월산, 자산군(후에 성종)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1455년 세자로 책봉됐으나 스무살 나이인 재위 2년만에 요절했다. 일부 야사는 이에 대해 문종비 현덕왕후(단종 어머니)의 원한을 사 의경세자가 요절했고, 그러자 세조가 현덕왕후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쓰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의경세자 사망일은 1457년 9월 2일, 단종은 10월 21일로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다. 의경세자가 죽자 대쪽에 문장을 적은 책문이 올려졌다. '아아! 약관의 나이에 슬하의 은애를 버리니, 소양(少陽)은 궁중의 문이 잠겨졌구나. 그 이름만 얻고 수명을 얻지 못하였으니, 정령(精靈)이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슬퍼하노라'.- 본문 중 '소양'은 의경세자의 어릴적 이름이다. 그는 후에 덕종으로 추존된다. 의경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주상자(主喪者)에 임명된 인물이 정수충(鄭守忠·1401∼1460)이다. 주상자는 말 그대로 상사(喪事)를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인물을 말한다. 그는 묘를 관리하는 수묘관으로도 임명됐다. '명하여 염(斂)에는 왕자의 면복을 쓰고, 무덤 속의 모든 일은 일체 임금의 산릉을 본뜨게 하였다. 하원군
태조 이성계는 6명의 부인을 뒀고, 이들로부터 8남5녀를 얻었다. 원비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6남2녀,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2남1녀를 얻었다. 언뜻봐서는 8명 아들 모두가 아버지의 창업(조선 건국)을 적극 지원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맏아들 방우(1354~1393, 후에 진안대군)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5남 방원(태종)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조선 건국을 명분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39살 짧은 생를 살았다. 실록은 이런 진안군의 일생을 폄하내지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진안군 이방우(李芳雨)는 임금의 맏아들인데,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 상여가 나가는 장면도 딱 1줄만 써놓고 있다. '진안군을 장사하는데 백관들이 문 밖에서 전송하였다'.- 아마도 당시 사관은 조선 창업의 비협조자였던 그를 매우 마뜩찮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안군이 새롭게 재조명된 것은 그의 사후 4백년 가량이 지난 정조대였다. 정조 임금이 재위 13년째 되던 해(1789) 우리고장 충
조선시대는 거리측정 단위로 '리'(里)를 사용했고, 그 측정이 비교적 정확했다. 당시 1리는 지금의 4백m 정도로, 10리는 4㎞가 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이 거리측정을 비교적 정확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리고'(記里鼓)라는 측정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리고는 수레바퀴와 그것에 연결된 3개 톱니를 이용해 거리를 측정했다. 수레바퀴의 둘레 길이는 10자(尺)로, 이것이 12번 구르면 맨 밑의 톱니바퀴(하륜)는 한번 회전을 한다. 즉 120자마다 한번 회전하는 셈이 된다. 기리고는 이같은 원리를 응용해 0.5리는 북소리 1번, 1리는 북소리 2번이 자동으로 울리도록 했다. 일부 사료는 종소리도 울렸다고 쓰고 있다. 기리고를 실은 마차에는 항상 2명이 승차했다. 1명은 채찍으로 말을 끌었고, 또 다른 1명은 기리고가 울리는 북소리를 적었다. 이를 합친 것이 거리 측정값이 됐다. 그러나 기리고를 처음으로 만든 나라는 중국 동진이었다. 우리나라는 세종 때 처음 선보였다. '왕과 왕비가 온수현(溫水縣)으로 행행하니, 왕세자가 호종하고, 종친과 문무 군신 50여 인이 호가(扈駕)하였다.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한남군(漢南君) 이어로서 수궁(守宮)하게 하고, 이 뒤
조카(단종)의 보위를 유혈 쿠데타로 빼앗은 세조는 역대 왕과는 다소 다른 용인술(用人術)을 지녔다. 그는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반발하는 인물은 단호하면서 매우 가혹하게 다뤘다. 양정(楊汀·?~1466)이라는 인물이 술에 취해 세조에게 "용퇴할 의사가 없는지"를 물었다가 도성문 밖에서 효수 당했다. 반면 계유정난 공신이나 순종하는 신하에 대해서는 왠만큼 큰 잘못이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눈감아줬다. 대표적인 사례를 봉석주(奉石柱·?~1465)라는 인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수양대군과 한명회 일파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는 계유정난 때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시(弓矢)를 띠고 남문 내정(內庭)에 늘어서서 간적(姦賊)을 방비하여 엿보게 하는'(단종실록) 역할을 맡았다. 봉석주는 그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면서 송석동(宋石同)의 아내 소사(召史), 유응부(兪應孚)의 첩의 딸, 노비 15구 등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전라도 차치사(處置使)로 임명돼 임지로 떠났다. '처치사'는 후에 '절제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심하다 할 정도로 탐욕을 부린 것으로 돼 있다. 사헌부가 상소를 올린다. "봉석주가 전라도 처치사가 되어 첩(妾) 2
조선시대 기녀들은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불렀다. 이런 기녀들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됐다. 이때의 천자는 노비, 수모법은 '어머니 신분을 따른다'는 뜻을 지닌다. 기녀들에게도 병이 찾아왔고, 또 나이가 들면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기녀직을 조금이라도 일찍 퇴직하고 싶으면 자신의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입적시켜야 했다. 이를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고 불렀다. 충주목사 전목(全穆)이라는 인물이 금란(金蘭)이라는 기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이 길지는 않았다. 전목은 인사로 인해 충주를 떠야야 했다. 다음의 시로 추정컨데 이때 두 사람 사이에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월악산이 무너져도 변치 않겠다"와 같은 언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떠난 후 금란이 단월역 역승과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가 전목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전목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보냈다. 용재총화 등 여러 고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 꾸며낸 얘기는 아닌
'흔한 산 어디엔들 오두막 못 지으랴(有山何處不爲廬) / 청산과 마주앉아 한 숨 길게 뿜어보네(坐對靑山試一噓) / 벼슬살이 10년에 다 늙었으니(簪笏十年成老大) / 백발로 귀거래를 짓게 하지 말라'.(莫敎霜·賦歸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실려 있는 한시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례적으로 달려 있다. '영천군(永川君) 정(定)이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몹시 핍진(逼眞)하니, 서(徐)가 아니면 이(李)의 솜씨일 것이다"라고 써두었다.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는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기 때문에 정(定)이 탄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강희안의 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이나 이승소를 거론한 것은 두 사람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음을 의미한다. 문병(文柄)이라는 표현이 있다. 달리 표현하면 '문학적인 권세' 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이승소는 문명은 떨쳤는지 몰라도 문병은 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장이 서거정(徐居正)과 더불어 이름이 맞먹었는데 서거정은 홀로 문병(文柄)을 마음대로 하고 이승소는 매양 미루어 사양하며 감히 항거하지 아니하였다'.- 이승소는 한시에만 능한 것이
조선시대는 말(馬)을 귀하게 여겨, 전국 53곳에 국영 목장을 설치하고 말의 수에 따라서 마부를 뒀다. 이처럼 조선시대 때 말이 중요시 된 것은 유사시의 전마, 통신용의 역마, 운반용의 교역마 외에 수공예품 재료인 가죽, 털, 갈기 등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병조에 소속된 '사복시'(司僕寺)라는 관청이 전국 말관리를 전담했다. 이밖에 말고기는 식용으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연산군은 '백마가 양기를 돋운다'는 속설을 믿고 백마육과 백마음경을 즐겨 먹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교하기를,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 하였으니, 흰 말의 고기는 양기(陽氣)를 돕기 때문이었다'.- 내수사는 궁궐 살림을 총괄하던 곳을 말한다. 조선전기 때 마정(馬政)을 잘 이끌어 임금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 있었다. 조순생(趙順生,?~1454)이라는 인물로, 말과 관련해 세종실록에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좌의정으로 이내 치사(致仕)하게 한 맹사성과, 사복시 제조 정연·병조참판 황보인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처음 사복시에서 계달하기를, '제주(濟州)에 우마적(牛馬賊)이 성행하여 목장의 말
조선왕조실록은 사관(史官)들에 의해 작성됐다. 예문관 소속의 봉교, 대교 검열 등이 실록을 쓰는 춘추관직을 겸했다. 이들은 관품이 높았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각각 7~9품을 받았다. 조선시대 사관은 조정에서 열리는 모든 회의에 참석,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이렇게 쓰여진 것이 사초(史草)다. 이 사초는 바로 실록청에 제출되지 않았다. 필화사건을 우려, 집에 보관해 뒀다가 왕이 죽은 후 실록청에 제출돼 왕조실록으로 편찬됐다. 조선 초기를 논할 때 항상 논쟁의 중심에 위치하는 인물이 한명회(韓明澮·1415~1487)다. 그는 계유정난 때 궁궐문 뒤에서 살생부를 휘둘렀고, 단종 폐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시간이 흐르자 사관들은 이런 한명회를 안 좋게 봤다. '사관은 논한다~'로 시작되는 사론(史論)을 통해 한명회를 직공했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財物)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寶貨)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이 일시(一時)에 떨쳤다'.- 본문중 전민은 토지와 노비, 희첩은 첩과 같은 말이다. 한명회는 사료상 1남2녀를
'전왕이 강화에서 독살되어 훙하였다. 일찍이 왕이 왕위를 빼앗기고 강화에 갈 때, 전교령 신덕린(申德隣), 전교승 안길상(安吉祥) 등 4~5명이 시종하였는데 쫓아가 체포하여 순군옥에 가두고 박사신(朴思愼)만이 따라갔다. 공선은 충분하지 못하였고 왕래도 또한 끊기어 근심에 싸여 울부짖을 뿐이었다'.- 본문 중 전왕은 고려 제 30대 임금인 충정왕(재위 1349~1351)을 말한다. 그는 선왕 충목왕(忠穆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서자된 몸으로 1349년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돼 즉위했다. 그러나 이승로(李承老) 등이 나이가 어린 것을 이유로 다시 원나라에 페위를 요청했고, 그 결과 함께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江陵大君·후에 공민왕)에게 보위가 넘어갔다. 그후 그는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다음해 독살당했다. 내용중 신덕린(?~?)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의협심이 매우 강한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그는 고려말 때도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의협심을 발휘했다. '두문동 72현'은 새 왕조 조선을 섬기는데 부끄러움을 느껴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고려 신하들을 말한다. '두문동'의 '두문(杜門)'은 '
중국 송나라는 文과 武중 문을 더 높이 샀다. 그러다 보니 국방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려도 송나라를 본받아 숭문언무(崇文堰武)의 문치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참찬은 실은 문관 출신이다. 고려 문신들은 평소에는 붓을 잡고 있다가 유사시가 되면 전장을 지휘했다. 군료들의 반발이 없을리 없었다. 이것이 곪아 터진 것이 무신들의 난이다.이와 달리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안되 무과를 실시했다. 태조2년(1393)의 일로, 이때 장원 급제를 한 인물이 성달생(成達生·1376∼1444)이다. 무과 장원 1호인 셈이다. 실록이 이 부분의 활약상을 자세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임오년에 나라에서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달생이 제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고, 나가서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무자년에 왜구들이 갑자기 근경(近境)에 침범하자 달생이 급히 이를 추격하매 왜구가 곧 달아났다. 태종이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였다'.- 본문 중에 어구마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임금을 위해 궁궐 안에서 기르던 말을 일컫는다. 그러나 성달생은 이후부터는 굴곡진 삶을 살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귀양을 가고 파직도 당하게 된다. 그 첫번째가
공신녹권은 말 그대로 공이 있는 신하에게 주어진 증서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공신녹권이 총 28차례에 걸쳐 700여명의 신하에게 수여됐다. 그러나 정권을 잃으면 공신 자제가 취소된 사례도 더러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가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연산군이 실각하자 수여사실 자체가 취소됐다. 이를 폐적(廢籍)이라고 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는 과정은 곡절이 많았다. 선왕 예종이 재위 1년2개월인 열아홉 나이로 급서했다. 이때 차기 국왕을 결정할 열쇠는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쥐고 있었다. 법도대로라는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당시 3살)이나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당시 15살)이 후사가 돼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는 제외되고 자을산군이 지명됐다. 그가 바로 성종이다. 이같은 흐름에는 이른바 신·구공신의 갈등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월산군의 장인인 박중선은 적개공신 출신으로 신공신에 속했다. 그러나 한명회가 주축이 된 구공신은 신공신 사위를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한명회가 있었다. 그는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친정 아버지였다. 성종은 만들어지다시피 보위에 오른 후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녹권을 내렸다. 이들이 좌리공신(佐理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