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대가 끊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손자 '숙길'(淑吉)을 봤고, 이후 점쟁이의 말에 따라 친모가 아닌 유모(乳母)에게 젖을 물리게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양아록은 시간 흐름에 따라 발육과 유년기 학습 과정도 시형식을 빌려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始立', 즉 '일어서기를 시작하며'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두 손으로 다른 물건 잡고 / 양다리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는다 / 한 달을 이와 같이 하더니 / 점점 제 스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선다 / 동지가 되어 양의 기운이 다시 생기려 하니 / 이날에 맞추어 네가 일어서는구나.'- 앞서 언급한대로 숙길이에 대한 할아버지 이문건의 기대는 일반의 상상을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이문건은 숙길이가 유교적 소양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조선의 문신답게 공자를 이상형으로 삼았다. '너의 조급하고 경망한 마을을 제거하고 / 성현의 발자취를 쫓아야지 / 마음에 잘 간진해주고 상실하지 않는다면 / 이것은 孔子를 잘 배우는 것이다 / 네 자신에게 잘 머무르게 하면 어찌 조상의 복을 받을른지 알겠는가 / 亨達은 정말 운명에 달려있고 / 富貴는 얻기가 어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묵재일기 외에 양아록(養兒錄)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양아록은 글자 그대로 '아이 양육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이상주 박사가 발굴·소개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내용은 할아버지 이문건이 손자 '숙길'(淑吉)의 출생~16살 기간의 성장과정, 질병내용, 공부시키는 과정 등을 한시 형태로 적었다. 전체 분량은 60여쪽으로 이중 성장과정과 질병·사고와 관련된 것이 각 16건, 교육에 관한 것이 8건 등이다. 보통의 경우 육아일기는 부모가 아이를 대상으로 쓴다. 그러나 양아록은 특이하게도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상으로 썼다. 가정사의 굴곡이 많았다. 이문건은 충북 괴산 태생 안동김씨 부인(돈이)과 사이에 6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온'이라는 아들과 '순정'이라는 딸만 성인으로 성장하고 나머지는 일찍 병으로 잃었다. 뿐만 아니라 아들 '온'도 이문건 나이 64살 때 '숙길'을 포함해 1남3녀를 남긴 채 병사했다. 이문건은 가문의 대가 끊길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고, 때문에 하나 남은 친손자 '숙길'에게 집착하게 된다. 참고로 숙길의 셋째 누이는 동래부사 순절도로 유명한 송상현의 부인이 된다. 이문건은 손자 '숙길'이 태어나
전회에 이문건이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괴산에 집을 신축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괴산 새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상주목사와 경상도관찰사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문건은 전직 승정원 도승지 직함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관향 성주지역에서 나름의 예우를 받고 있었다. 묵재일기에는 성주 사족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음은 1562년 9월 27일자 일기 내용이다. '내가 손자를 데리고 유향소에 가자, 참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이유가 통문을 돌려 물품을 거두어서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은 것이다. 나를 대접하는 것을 명분삼아 모였다.'- 이문건 부의 원천은 노비와 전답이었다. 그는 많을 때는 남자종 83명, 여자종 50명 등 총 130여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물론 이들의 상당수는 이른바 '신공노비'였고 때문에 괴산서 멀리 떨어진 충주, 보은 등에도 거주했다. '신공노비'는 주인집과 떨어져 사는 대신 매년 추수한 곡식의 절반 정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말한다. 이문건은 신공노비가 약속한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기르던 소를 끌어오기도 했다. 그렇다해도 노비 130여명은 매우 많은 규모다. 이문건도 당시 여느 양
전회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유배지 경상도 성주에서 노비들을 원격조종, 처가가 있는 우리고장 괴산에 집을 신축했다고 밝힌 바 있다. '1551년 7월 15일자: 서동이 괴산에서 돌아왔다. 목재를 계곡 근처로 끌어다 놓았으나 계곡의 물이 없어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듬해 4월 25일자: 오늘 괴산에서 기둥을 세운다고 하는데, 비가 오니 일이 좋지 않겠다.8월 12일: 집을 덮는 철장물을 가져갔다.'- 일기를 보면 26칸 기와집으로, 규모가 꽤나 큰 편이었다. 새로 지은 괴산집이 지금의 어느곳에 위치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지금의 문광면 일대에 위치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문건이 귀양을 가자 부인 안동김씨(김돈이)가 한양에서 친정집이 있는 괴산 문광면으로 내려와 이문건가의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또 조카 이휘를 포함한 성주이씨 묘역이 문광면 유평터널 부근 야산에 존재하고 있다. 이문건은 성주 유배생활 중에 3번이나 괴산을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첫번째가 바로 새 집이 완공된 후였다. 그는 1552년 5월 22일부터 7일 동안 괴산에 머물다 성주로 돌아간다. 이밖에 그는 집수리를 할 때(1561)와 아들 장례를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조선 성종과 명종 사이를 산 인물로 호는 묵재, 본관은 경상도 성주다. 그는 그의 호를 딴 '묵재일기'를 32년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양반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3종류의 개인일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유희춘의 미암일기, 오희문의 쇄미록 등이 그것이다. 이들 일기의 행간을 하나하나 살피면 당시 양반들의 사유체계와 부축척 방식, 그리고 가정사의 시시콜콜한 사연을 손금보 듯 알 수 있다. 그는 73살 생애에 두 번의 유배생활을 경험한다. 그는 영남사림의 거두인 조광조 제자였다. 1519년 그 유명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때 다른 제자들의 외면과 달리 이문건 형제는 조광조를 문상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2년 후 훈구파에 의해 형 충건은 유배당한 후 사사됐고, 이문건은 전라도 낙안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이문건에게는 조카 이휘라는 인물이 있었다. 장래가 촉명했던 그는 택현설, 즉 "어진 임금을 선택해서 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문건도 택현설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지금의 성주로 '본향안치'를 당해야 했다. 본향안치는 유배형 중 가장 약한 형으로, 고향에서
주민 생활권에도 이른바 물방울 이론이 작용한다. 조치원은 행정구역상 충남에 속하나 청주와 가깝기 때문에 청주를 생활권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옥천은 그 반대 경우다. 행정구역상 충북에 속하나 대전과 가깝기 때문에 대전을 생활권으로 하는 군민들이 많다. 이와 관련, 몇해전에는 대전광역시로 편입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옥천은 행정명이나 편제에 있어서 도내 다른 어떤 시군보다 역사적으로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옥천군의 신라 때 지명은 고시산군(古尸山郡), 경덕왕 때부터는 관성군(管城郡)으로 불렸다. 고려의 지방행정은 이른바 5도양계 체제였다. 5도는 행정, 양계는 국방 기능이 중요시됐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꽤나 불합리하나 당시는 북쪽(북계)와 동쪽(동계)을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이런 배경하에 옥천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는 옥주(玉州)로 불렸다. 그러나 조선 건국기만 해도 옥천은 충청도에 속하지 않았다. 옥천이 지금의 모습처럼 충청도에 속하게 된 것은 조선 전기인 태종 때였다. 이때 보은, 영동, 황간, 청산 등도 함께 충청도로 편입됐다. '경상도 옥천(沃川)·보령(報令)·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을 충청도에 옮겨 예속시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權敏手)가 도내(道內)에 장문(場門)을 설치하겠다고 청하므로 호조(戶曹)에 의계(議啓)하도록 했더니, 또 각도에도 아울러 설치하자고 청했다."-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권민수(權敏手·1466∼1517)라는 인물이 건의, 우리고장에도 장시(場市·5일장)가 처음 들어서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갑자사화 때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다가 영외(嶺外)로 유배됐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또 홍문관부제학이 되어서는 군정을 엄히 할 것,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기강을 바로 세울 것 등을 주청하기도 하는 등 강단있는 관료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는 사관으로부터 악평을 받은 인물로 유명했다. 심지어 당시 사관은 '술주정하다 죽었다'라고 졸기를 쓰기까지 했다.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가 졸하였다. 권민수는 심술이 심벽하고 불측하여 겉으로는 화평하나 속으로는 시기를 부려, 선류(善類)에 대해서도 속으로 시기하고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젊어서부터 글한다는 명성을 도둑질하여 명류에 끼었었고 또한 성격이 사나와 기세를 잘 부렸으며, 벼슬과 세력이 점점 높아지매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술주정하다가 죽었다.'- 사관(史官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 시장에 가 계신가요 /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악학궤범 권5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백제 가요인 '정읍사'(井邑詞)이다. 정읍사는 아내가 행상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높은 곳에 올라 남편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망부가(望夫歌)다. 그러나 정읍사는 경제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적인 시(詩)가 된다. 남편의 직업이 '행상'(行商)이기 때문이다. 행상은 보통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으로 구분된다. 정읍사의 행상 남편이 보상인지, 부상인지는 내용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은 대형마트 등에 밀려 장시(場市)의 일종인 5일장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장시는 양민들의 유일한 교역장소이자 정보 너트워크의 공간이었다. 장시에 나가 막걸리를 곁들인 대화를 나눠야 이웃 동네를 비롯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혹자는 장시를 '조선시대 인터넷'이라
상서(上書)는 일종의 민원서로, 백성들이 수령이나 관찰사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뤘다. 인원이 많을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했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 내용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았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불렀다. 수령은 처분한 내용을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관례였다. 상서는 수령에게 1차로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하면 2차, 3차 계속 올렸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까지 올렸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사례는 많지 않으나 시골 지식인이 직접 임금에게 상서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상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임금의 집무공간에까지 전달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황상 신문고 제도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임금에게 좋은 내용의 상서를 올려, "역마로 모셔오라"는 소리를 들은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고장 옥천의 곽유(郭瑜)라는 인물이다. 그는 실록에 딱 한번 이름이 보일 뿐 사마방목(과거 합격자 명
조선시대 죄인을 심문하는 방식의 하나로 추국(推鞫)이 있다. 추(推)는 죄를 심문한다는 뜻이고, 국(鞫)은 죄인에게 물리력을 쓰면서 죄를 추궁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고문을 동반한 심문이다. 이와 달리 물리력을 쓰지 않고 심문하는 것은 평문(平問)이라고 불렀다. 추국 중에서도 강상(綱常)을 어긴 죄인에 대해서는 이른바 '삼성' 추국을 했다. 이는 임금의 특명에 따라 의정부·사헌부·의금부 등 세 관원이 합석하여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을 어긴 사람은 강상죄인(綱常罪人)이라고 해서 중죄로 다뤘다. 조선 세조 때를 산 인물로 최청강(崔淸江·?~?)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강상윤리라는 시대의 불운을 만나 관직생활을 망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영의정 권람의 말이다. "최청강(崔淸江)은 천안군사에 제수되었는데 실상이 없습니다.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노모를 따른다고 하여 서울에 살면서 사직하였고, 어미가 죽어서는 분상(奔喪)하지 않고 길복 차림으로 연산에 돌아갔으니, 천총(天聰)을 기망한 것이 매우 심합니다."- 인용문중 '분상'은 먼 곳에서 부모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밖에 '군사'
조선은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응대했다. 반면 명나라는 환관을 조선국의 사신으로 보냈다. 이같은 현상은 양국 관계가 사대(事大)와 조공무역을 바탕으로 맺어졌 때문에 발생했다. 명나라는 사대를 약속한 조선을 국가 실체로 인정해 주는 대신 은(銀), 말(馬), 처녀 등의 조공을 요구했다. 15세기 무렵 조선에 자주 온 명나라 사신으로 황엄(黃儼·?-?)이 있다.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명나라 국경을 넘어가 잡일을 하면서 학식을 쌓았다. 그는 본래 평민 출신이라 예의범절을 잘 몰랐고, 따라서 조선에 오면 자주 거만하게 굴었다. '임금이 태평관에 나아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환관(宦官) 황엄 등의 행동거지가 무례하므로, 임금이 뜻에 맞지 아니하여 잔치를 재촉해 파하였다.'- 사대를 약속한 조선은 환관출신 사신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면 임금이 몸소 궁궐 밖까지 나가서 이들을 전송해야 했다. 말 그대로 굴욕으로, 이날은 황엄이 제주도에 있던 구리 불상을 건네받은 후 귀로에 올랐다. '황엄 등이 동불(銅佛) 3좌를 받들고 경사로 돌아가니, 임금이 반송정(盤松亭)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우군총제 조면(趙勉)을 보내어
전회에 김익수(金益壽·?~?)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일반에 알려진 어사는 암행으로 비리를 적발하는 등 사정의 상징처럼 돼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전기는 그렇지 않았다. 푸대접을 당하는 장면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그 주인공의 한 명이 김익수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의 일화다. '신은 말을 타고 다니느라 피곤한데다가 밥먹을 겨를도 없어서 기갈이 심했으나 전혀 음식을 공궤(供饋)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또 밥을 먹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 이처럼 대우할 수는 없는 것인데, 사체가 지극히 매몰스럽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형조참판에 이어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 그리고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관상감제조에 오르는 등 관료의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관상감은 천문·지리·달력, 측후 등에 관한 일을 전담했던 관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 그의 아내는 질투심이 병적으로 심했다. "내가 헌부의 죄수들을 보니 김익수의 처가 그의 계집종 봉황(鳳凰)의 남편을 시켜 야간에 몰래 자식이 있는 익수의 첩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하여 간사(姦事)를 저지르게 한 것 같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