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전후로 해서 쓰여진 개인일기로 '쇄미록'이 있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9년여 동안 썼다. 현재 해주오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쇄미록은 7책 분량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겪은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참상뿐만 아니라 조선중기의 생활상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때문에 개인이 쓴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물 제 1096로 지정돼 있다. 쇄미록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의 하나인 '시전'(詩傳)에서 발췌됐다. 시전에는 '쇄혜미혜 유리지자'(쇄兮尾兮 遊離之子)라는 표현이 있다. 첫 글자 '쇄'는 '銷'자에서 '金' 대신 '王'자이다. 쇄미록은 이 문장 중 '쇄'와 '미' 자를 따와서 만든 표현이다. 해석하면 '부서지고 자잘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로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에 전국을 피난하면서 쓴 일기'라는 뜻이다. 오희문은 조선 중기인 중종과 광해군 연간을 살았던 인물로, 아버지는 장성현감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이고 어머니는 고성남씨 남인(南寅)의 딸이다. 그의 아들 윤겸(允謙)은 임진왜란 종전 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포
백전백패하던 조선군에게 청주성 전투의 승리는 고무적인 것 이상이었다. 전란 중의 선조가 대신들과 영규에게 어떤 상을 내릴 것인가를 논의하나 곧바로 논쟁이 벌어졌다.조선은 무장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대부가 힘을 합쳐 세운 연합정권이고 그 고리는 유교였다. 이런 까닭에 정도전은 석가모니를 '佛氏'(불씨)라고 멸칭하기도 했다. 요즘말로 하면 '미스터 아무개' 정도가 된다. 그러나 영규는 조선의 대통을 실천하는 유학자가 아닌, 머리를 깎고 산중으로 들어간 수도승이었다. 대신 윤두수가 이런 말을 한다."승려를 당상관에 제수한 것은 개벽이래 아직 듣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의당 특이한 법전을 써야 합니다."-청주성 전투의 공을 봐서는 당상관 벼슬을 주는 것이 합당하나, 유교사회의 승려이기 때문에 일종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대신인 윤승훈은 "영규는 (…) 호령이 엄명하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이 없이 한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청주의 왜적은 이 군사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논란 끝에 영규대사에게 당상관(정3품)에 해당하는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
영규(靈圭·?∼1592) 대사는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청주성과 금산전투에 잇따라 참전했다. 속향이 공주인 영규대사와 옥천에 기거하고 있던 조헌은 '공주'라는 지역성을 매개로 만났다. 선조수정실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승려 영규는 당초 공주 산사에 있었는데, (공주)목사 허욱(許頊)이 불러 승장을 삼았으나, 하려 하지 않다가, 강권한 뒤에야 응하였다. 일단 무리를 모아 군대를 만들고 나서는 오직 조헌만을 따라 진퇴하였다." 영규대사는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 탈환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헌과 마찬가지로 승리 후에 관군이 공다툼 시비를 걸어온다. "충청병사 이옥(李沃)은 영규가 성을 함락시킨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적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하여 즉시 성을 헐고 곡식을 태우게 하고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므로 청주의 사람들이 그(곡식)의 살점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마침내는 적을 물리친 것을 자기의 공으로 삼아 거짓으로 보고하여, 상을 받았으니…"- 후에 충청병사 이옥은 이같은 사실이 발각돼 삭탈관직을 당했다. 영규대사와 조헌은 청주성 전투 후 선조를 보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려했으나 방향을 바꿔 금산으로 향했다. 이때도
'옛날에 중원에 나그네로 왔더니 / 지금은 중원으로 유배되어 왔도다 / 그저 달천의 물을 마실 뿐이요 / 달천의 물고기는 먹지 않았는데'- 연산군~성종 연간의 인물인 이행(李荇·1478∼1534)이 우리고장 충주의 달천 주변에 유배를 와서 쓴 시로, 적거록이라는 고문헌에 실려 있다. 그 증손이 이안눌(李安訥·1571∼1637년)이다.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그리고는 동년배인 권필과 선배인 윤근수·이호민 등과 문장을 논했다. 후대에 이들의 시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불렀다. '동악'은 이안눌의 어릴적 호이다. 따라서 그가 이 모임의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07년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부임하면서 '四月十五日'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시제목은 평이하나 내용은 슬프기 그지없다. '술잔을 바치고 죽은 자를 곡한다오 / 아버지가 자식 위해 곡하기도 하고 / 자식이 아버지 위해 곡하기도 하고 /…/ 또 어미는 딸 때문에 곡을 하고 / 또 딸은 어미 때문에 곡을 하고 /…/ 눈물이 문득 턱을 타고 내리네 / 아전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 곡할 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
임진왜란과 관련, 당시 충청도 순찰사인 윤국형(尹國馨·1543~1611)이라는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일부 사료를 윤국형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도순찰사와 도관찰사는 같은 종2품으로 품계는 같다. 다만 도순찰사는 임시로 파견되는 직책으로 전시에는 군권(軍權)을 가지게 된다. 도순찰사는 성종 때부터 처음 등장한다. 적지 않은 사료들이 조헌 등 의병 지도자들이 모병 활동을 할 때 당시 충청도 순찰사였던 윤국형이 방해내지 훼방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와 청주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 이에 조헌이 순찰사 윤국형을 찾아가 거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말하자…'- 같은 선조수정실록에는 바로 '청양현감 임순(任純)이 백여 명의 군사로 조헌을 돕자 국형이 그가 절도(節度)를 어겼다고 하여 잡아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조헌이 또 편지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고 바로 우도(右道)로 가서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라
의병장 조헌은 생전에 이런 시를 남겼다. 宣尼(공자)께서 당시에 東周를 이루지 못하셨으나 / 남긴 가르침은 가득차고 넘쳐 만년을 비추네 / 남자가 경을 궁구함은 장차 주나라를 이루려 함이지 / 어찌 한 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한 지역만을 위할 것인가.'- 인용문 중 '동주'는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중국고대 주나라를 일컫는다. 이처럼 조헌이 추구한 세상은 예의와 염치(廉恥)가 충만한 도학적인 세상이었다. 관군의 방해가 적지 않았고 또 목숨을 담보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헌 휘하로 의병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상당수는 조헌의 직계 제자들 이었으나 일부는 조헌의 성격과 인품 그리고 사상에 이끌린 사람들이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경구는 무인뿐만 아니라 문인의 세계에도 통했다. 후대의 송시열은 이를 두고 '明道正誼 就義成仁'(명도정의 취의성인)이라고 표현했다. '도를 밝혀 정의를 바로 세웠고 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금산 칠백의사 중 이름과 신원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同日殉節錄'(동일순절록)이라는 문헌이 있다. 같은 날 순절한 사람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목록에 첫번째로 오른 인물이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이다. 그 다음은 이광륜(李
한자 '表'(표)는 그것이 명사로 사용되면 '겉', '바깥' 등의 뜻을 지닌다. 반면 동사로 사용되면 '밝히다', '드러내다'로 쓰인다. 따라서 사당 '表忠祠'(표충사)에는 '충성심을 밝힌다'라는 뜻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의병장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헌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도 위치하고 있다. 두 사당은 명칭은 같으나 다른 점이 있다. 옥천 안남의 표충사에는 조헌 뿐만 아니라 아들 완기(完基·1570∼1592)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조헌은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지금은 정실과 소실 관계가 거의 성립하지 않고 또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완기만이 정실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3남2녀는 측실이다. 적자 완기는 22살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나머지 3남2녀는 대부분 장성했다. '조완도는 강음현감이고, 조완제는 전옥서 봉사이며, 다음은 조완배이다. 맏딸은 김노에게, 다음은 김성룡에게 시집갔다. 조완기는 자식이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완기는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하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일, 금산전투는 이보다 18일 늦은 8월 18일에 있었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두 전투에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크게 달랐다. 청주성 전투에는 대략 1천7백명, 금산전투에는 7백명이 참가했다. 불과 18일만에 의병의 수가 1천명 가량 줄었다. 관군은 전공이 의병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척 꺼렸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활동을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다. 심지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월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조헌이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책망하였기 때문에 순찰사가 감정을 가지고 각 고을로 하여금 조헌의 휘하에 응모하여 간 의병의 부모ㆍ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관군으로 하여금 응원해 주지 못하게 하여서…' 인용문은 계속 해서 '이때에는 조헌의 군사는 모두 흩어지고 7백 명의 의사(義士)가 남아 있어서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순찰사는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을 말한다. 음력 8월 18일의 충남 금산전투에서 7백여명의 의병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들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약간의 이설도 있으나 대체로 조헌
조헌이 우리고장 옥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는 않다. 조헌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라는 곳에서 조응지(趙應祉)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 잃고 계모를 맞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주경야독을 한 끝에 그의 나이 23살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왔다. 조헌은 보은현감도 역임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헌은 계모에게도 친모못지 않은 효도를 했다. 그는 혼자된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자청해서 보은현감이 됐다. 바로 계모의 친정이 보은이었다. 계모는 의붓아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사망하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찌 이런 인물을 다시 보랴. 다만 다른 어미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이지. 이 애야 말로 진실한 내 아들이다.' 조헌은 효자이면서 동시에 시조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실려 있는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내용 중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조헌은 왜군이 임진년에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하고 1년전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인용문에 등장하는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물안개가 끼었는데 뱃사공은 간데 없고 물가에 빈 배만 떠 있다. 그런 석양에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공과 빈 배, 그리고 나와 갈매기가 짝을 이루면서 작가의 외로운 심정을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소개하는 또 한 편의 시조도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 창랑은 푸른 물결, 조대는 낚시터, 낙조청강은 석양의 푸른 강, 유지는 버드나무 가지, 옥린은 물고기 비늘, 행화촌은 살구꽃이 핀 마을을 말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 설정이다.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종장은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음력 8월 1일과 2일로 약간은 엇갈린다. 그러나 1일 시작됐다는 내용이 보다 많다. 이날의 의병 공격은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반면 청주 부모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박춘무 의병군은 남문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기 쪽으로 퇴각해 있었던 방어사 이옥의 관군은 미호천을 건너와 청주읍성 북문을 공격했다. 이날 전투가 치열했는지 여부는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엇갈린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반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날 밤에 적이 저희들의 시체를 불태웠는데, 3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적은 북문(北門)으로 빠져 도망쳐 달아났다"라고 서술했다. 임란 발발 직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문소만록에서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전과가
왜군이 1592년 5월 2일 보은, 회인을 거쳐 청주에 들이닥쳤다. 5월 2일이면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19일 밖에 안 되고, 또 우리고장 황간, 청산이 화염에 휩싸인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관련 사료를 보면 왜군은 보은, 회인, 청주를 단 하루만에 주파했다. 이는 당시 청주성에서는 관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군 북상로 주변의 관군은 모두가 달아났다. 왜군은 사실상 청주성에도 무혈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신익이라는 인물로, 청주읍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록에 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패전한 장수들 중에는 신익(申翌)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당초 한 도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머무르면서 왜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먼저 달아나서 허다한 군량과 병기를 모두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고 용인(龍仁)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앞서 달아나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으니..."- 청주성은 이후 3개월 가량 왜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이때 관군은 미호천 서쪽으로 퇴각해 왜군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윤국형이 쓴 '문소만록'에는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