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서(掛書)는 남을 모함하거나 나라를 비방하는 내용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붙이거나 투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괘서 행위는 대부분 익명으로 행해지면서 선량한 사람을 무고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고 따라서 조선조정은 괘서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괘서사건이 전국적으로 42건이나 발생했다. 이런 괘서사건은 순조 이후 특히 많이 일났다. 순조가 11살 나이에 등극하자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이후 성장한 순조가 직접 정치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장인 김조순(金祖순·1765∼1832)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절대 부패해졌고,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갖지 못하면서 유랑민이 되는 등 국가 말기적 현상이 나타났다. 전회에 청주읍성 북문에 괘서를 붙인 김치규(金致奎)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본래 청주사람은 아니었다. 김치규는 평안도 중화 출신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충청도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고장 청안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청안 토호였던 이원기(李元基) 집에 기거하며 그의 아들 훈장 노릇을
정감록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했던 예견서를 말한다. 도참, 도교, 풍수지리설적인 사상이 혼합돼 있다. 그러나 정감록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존재하고 있다. 이중 원전 정감록으로 일컬어지는 '감결'은 조선의 선조인 한륭공의 두 아들 이심·이연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그 내용은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백 년을 논하고 있다.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정감록에 이씨 조선 이후의 왕도로 등장하는 계룡산은 풍수적인 입지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산태극 물태극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물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돌아겨 나가고 있고, 물길 또한 그 모습을 하고 있다. 계령산 암반 곳곳에는 정감록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각인돼 있다. 이중 가장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에는 '죽정내'라는 다소 독특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화산 삼거리에서 다소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여말선초 문신인 최유경(崔有慶)이 말년에 이곳에 내려와 대나무로 만든 정자를 짓고 만거한 데서 '죽정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정내'라는 지명은 한글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는 '竹亭川'(죽정천)으로 표기돼야 논리적으로 맞는다. 지금은 마을 앞에 초평저수지라는 거대한 담수호가 생겨났지만 과거에는 '川'이 흐른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1872년 진천현지도를 보면 죽정내는 '竹亭川'으로 표기돼 있고, 당시 존재했던 주막이름도 '竹亭店'이다. 고려말의 최유경은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보수파에 속하던 인물이다. 그는 역성혁명이 아닌 왕씨 고려의 존속을 원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일파가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 이르러 회군을 했다. 당시는 음력 6월로 정황상 막 우기가 시작됐다. 그런 탓인지 압록강을 건너려는 과정에서 익사자가 속출했다.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첫번째 여울에
고려시대에도 기녀문화가 존재했다. 이와 관련, 고려사 명종 12년 2월 을사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옥천서 일어난 사건으로 8백여년 전의 일이다. "관성(管城) 현령 홍언(洪彦)이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고, 음황하여 절도(節度)가 없으므로, 벼슬아치와 현민들(吏民)이 언(彦)의 사랑하는 기녀(妓)와 기녀의 어미 및 형제를 죽이고 드디어 언(彦)을 붙잡아 유폐하니…"- 인용문에 등장하는 관성은 지금의 옥천을 의미한다. 조선의 대문장가 정철의 묘가 우리고장 진천군 문백면에 있다. 정철은 기녀들과 염문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 만큼 관련 시조도 많이 남겼다. 정철은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자를 건의했다가 선조의 미음을 사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른바 '건저의 사건'으로, 이때 그곳에서 만난 기녀가 '진옥'이다. 먼저 정철이 매우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수작을 건다. '옥을 옥이라 하거늘 광옥만 여겨떠니 /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일시 적실하다 /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가 하노라.'- 이해를 위해 일부 고어는 현대문으로 바꿨다. 기녀 '진옥'도 답을 했다. 역시 성적 은유를 담고 있다. 이 시조 역시 '근화악부'에 실려 있다. '
기녀(妓女) 제도의 발생에 대해서는 전쟁 점령지에서의 여자 획득설, 부모 잃은 고아, 부모의 빈곤으로 인한 인신매매, 과부의 사생아, 역적의 처자, 음란함으로 타락한 여자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리나라 기녀의 기원을 '고려가 후백제를 쳐들어 갔을 때(…)사내들은 노를 삼고 여자들은 비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우리나라 기녀가 시작됐다"라고 적었다. 여러 설중 전쟁에서의 점령지 여자 획득설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옛그림을 보면 기녀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는 미인의 조건으로 이른바 3白, 3黑, 3紅을 얘기했다. 3白은 살결, 치아, 손이 흰 것, 3黑은 눈동자, 눈썹, 머리카락이 까만 것, 3紅은 입술, 볼, 손톱이 붉은 것을 말한다. 다만 얼굴은 지금의 계란형보다는, 신윤복(申潤福'1758 ~?)의 그림 '미인도' 같이, 살이 약간 통통하게 오른 모습을 좀더 미인으로 쳤다. 조선시대 기녀나 기생들에게는 '해어화'(解語花)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직역하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에게
우리나라 이미용의 역사에 있어 단발령은 주요한 변곡점이 된다. 1895년 12월 30일 고종은 칙령을 내려 전국민의 단발을 명령했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하였다.'- 인용문을 잘 살펴보면 칙령에 앞서 고종이 먼저 단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그 이듬해 중국 왕조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건양은 양력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종은 이때도 자신이 솔선수범해 단발을 했음을 강조한다. "짐이 이번에 정삭을 고치고 연호를 세운 것은 500년마다 크게 변하는 시운(時運)에 대응하여 짐이 국가를 중흥(中興)하는 큰 위업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복색을 바꾸고 머리를 깎는 것은 국인(國人)의 이목(耳目)을 일신시켜 옛 것을 버리고(…) 아! 나의 어린 자식들인 너희 백성들이여!"- 이와 관련,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리고,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현장에 나가 단발을 직접 지도감독하고 독려했
오송 뷰티 세계 박람회가 성공리에 막을 내렸으나 '미처 다하지 못한 메이컵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전회에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까지의 메이컵사를 설명한 바 있다. 1930년대는 물자라 귀했던 시절이라 가정을 방문해 '분매' 형식의 판매를 했다. 분매(分賣)는 한 부분씩 나눠파는 것을 말한다. 지금도 어떤 아이스크림은 나눠서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 화장품도 그렇게 덜어서 팔았던 적이 있다. 파는 측은 용기를 아껴서 좋고 소비자는 저렴한 값에 '구리무'를 사서 좋았다. 이때 유행한 것이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동동구리무'로, 이 역시 크림을 큰 통에 넣고 다니면서 덜어서 팔았다. 6.25 이후인 1950년대는 라디오시대로 TV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은 'AFKN'이라는 주한미군 tv를 통해 서구여성의 화장미를 엿볼 수 있었다. '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주한미군방송)의 약자인 'AFKN'은 공중파 방송만 있던 시절에는 '2번' 채널을 통해 볼 수 있었으나 화질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영어공부에 관심이 있던 학생들은 번쩍이는 화면을 보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1950년에는 '여원'이라는 여성잡지가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비누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석감'과 '조두'라는 세정제를 사용했다. '석감'(石齒+僉)은 명아주를 태운 재에서 추출한 잿물에 밀가루 등을 섞어 만들었다. 그러나 석감은 세안이 아닌 세탁용으로, 옷의 때를 뺄 때 끓는 물에 풀어서 사용했다. 이에 비해 조두는 인체에 사용했던 세정제의 하나로 팥을 미숫가루처럼 곱게 가루를 내 세수할 때 문질렀다. 조두를 만들 형편이 못되는 집에서는 콩깍지 삶은 물, 창포 우린 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연산군일기에는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복세암(福世菴) 중들이 세수하는 조두를 해사(該司)에서 진배(進排)하는데, (…) 중들이 세수하는 것이 국가에 무슨 관계가 있어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조선은 유교가 국시였던 국가였기 때문에 스님들이 세수하는 것까지 경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과 같은 비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18세기초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2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1630~1692)었다. 그러나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통된 것은 개화기 때였다. 특히 당시에는 비누가 매우 비싸 쌀 한말이 80전인데 비해 비누 1개 값은 1원이었다. 때문에 개화기 무렵의 비누는 부유
7.80년대만 해도 외판원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해 화장품을 판 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직업이 있었다. '매분구'(賣粉女+區'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외출이 오늘날처럼 자유스럽지 못했으므로 일상 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외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방문 판매원인 매분구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화장품을 판매했다. 이와 관련, 대부분의 사료들이 숙종대에 매분구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매분구 이야기는 성종대에 처음 등장한다, 다음은 사헌부 대사헌 이칙이 아뢰는 말이다. '그 이른바 망오지란 분(粉)을 팔며 다니는 계집으로서, 남의 재물을 받아서 조사에게 뇌물을 행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 자입니다.'- 인용문의 내용으로 봐 망오지는 분을 파는 여자 신분으로 당시 고위관료에게 뇌물로 어떤 청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상대는 권중린이라는 인물이다. '이제 망오지(亡吾之)의 뇌물을 행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또 들으니 그녀가 늘 권중린의 집에 드나든다 합니다. 권중린이 간원의 장(長)이 되어서 뇌물을 행하는 계집으로 하여금 그 집에 드나들게 하고, 또 그 말을 들어서 청탁을 하였으니, 권중린을 국문하기에 청합니다."- 조선시대에
전회에 마한시대 우리고장 사람들의 미의식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뒤를 이은 백제 사람들의 화장문화에 대한 얘기는 중국 사서인 '위서(魏書)'에 쓰여 있다. "분은 바르되 연지를 바르지 않았으며 머리는 변발을 하여 뒤로 늘여 뜨렸다." 이것으로 봐 백제의 여자들은 짙은 화장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연지를 찍은 여자가 그려져 있는 고구려 벽화와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물론 고려시대 여성들도 화장을 했다. 그 모습을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서긍(徐兢)'이라는 인물이 적었다. 그는 고려에 한 달 동안 머문 기억을 바탕으로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썼다. "고려 부인들은 향유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않고 눈썹은 긴데 검은 비단의 몽수를 쓰며 이 비단은 3폭에 길이 8척이나 되며,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을 땅에 끌리게 한다." 고려시대에는 면약(面藥)이라는 화장품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피부에 바르는 크림의 일종으로, 역시 고려도경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면약호는 오직 정사ㆍ부사ㆍ도할관ㆍ제할관의 자리에만 은제(銀製)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동으로 만들었다. 둥근 배에
얼굴 화장에 대한 사료는 영정 등 그림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고장에 전통시대의 여성얼굴이 초상화로 남아 있다. 모산본 하기는 하지만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문효영당에 하연(河演·1376~1453) 부부의 초상화가 현존하고 있다. 고려 우왕과 단종 연간을 산 하연은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과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는 등 조선 전기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또 세종임금 때 이조를 맡아 공세법(貢稅法), 즉 연분9등법과 전분6등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 간 문안에 개인 용무의 방문객인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는 등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다. 초상화에서 성산이씨 하연부인은 옅은 화장기가 있는 얼굴에 눈썹을 그렸고 입술에는 연지를 칠했다. 지체 높은 귀부인답게 표정은 근엄하고 옷감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화장문화가 급변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다. 이때는 이른바 신식문물이 많이 들어오는 시기이기 때문에 곡절있는 사연이 많다. 우리고장 충주
오송 뷰티 세계박람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뷰티'가 의미하는 '화장'은 이른바 수입된 표현으로, 개화기 때 들어온 일본식 한자다. 조선시대에는 '화장'이라는 단어보다 '丹粧(단장)'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분단장', '칠보단장' 등이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조선전기의 실록은 전국의 미색 처녀를 선발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百姓) 각호(各戶)에 만일 자색(姿色)이 있거든 일체 모두 채택(採擇)하여 정결(精潔)하게 빗질하고 단장(丹粧)시켜고, (…) 만일 여자를 숨기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거나…'- 조선시대에는 이 단장을 담장(淡粧), 농장(濃粧), 염장(艶粧), 응장(凝粧), 야용(冶容)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담장'은 피부를 깨긋하게 다듬는 정도를, 그리고 '농장'은 색체 화장이 조금 들어가는 경우를 말한다. 이밖에 '염장'은 요염함이 드러나도록 화장을 한 것, '응장'은 혼례식 때 신부의 화장을 말한다. 지금도 신부의 화려한 화장과 치장을 '응장성식(凝粧盛飾)'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밖에 '야용'은 억지로 아름답게 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야하다'는 표현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화장을 하려면 화장대가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이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