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초정약수를 발견한 '어떤 사람'에게 목면(무명) 10필을 하사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라 하는데(…)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 어떻게 초정약수를 발견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초정약수의 발견과 관련된 전설이 이육(李陸·1438-1498)이 지은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실려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떤 늙은 농사꾼이 언덕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귓가에 은은히 군마의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보니 평지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달려가 사또에게 고했으며 이리하여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이었다.' 그는 앞 문장을 '서원에 초수라는 물이 있다. 내가 안찰사가 되어 이를 살펴보니, 물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데 아주 차고 맛이 쓰다. 뱀이나 개구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곧 죽는다'라고 적었다. 1444년 봄. 내섬시윤 김흔지에 의해 초정약수 행궁이 세워졌으나 당시 모습을 확인해 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온양 행궁과 관련 그림이 현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온천행궁의 규모·배치를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반차도'(斑次圖)에는 적어도 수천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중 상당수는 호위 군사들이지만, 남녀노소의 일반 백성 모습도 많이 그려져 있다. '국왕의 행차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궁금증 때문에 나온 백성들이다. 1444년 봄. 세종대왕이 한양도성을 나서 우리고장 초정약수로 향할 때도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격쟁하는 노인도 있었다. 격쟁은 임금이 행차할 때 징을 치며 그 앞으로 나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동을 말한다. '연세가 85세쯤 되는 늙은이가 임금이 탄 수레 앞에서 원통함을 아뢰니, 병조에 내려 이유를 가리게 하고, 인하여 술과 음식을 먹이고 면포 1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그해 봄 1차 초수리 거둥을 마치고 한양도성으로 되돌아갈 때는 그런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충청감사 이선(李宣)이 "종량(種糧)이 부족한 인민들이 거가 앞에서 하소연할까 염려되니 현재에 있는 잡곡으로 고루 주게 하고 그 떠들썩하게 하소연하는 자를 금하게 하라"(5월 5일자)고 명령했다. 그 때문이었다. 이에 세종은 이선의 행동을 핵실(조사)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했다. 세종은 초정약수에 머물 때도 위민(爲民)의 모습을 자주 보였다.
전국 여론조사에서 과반이 넘는 찬성 의견을 획득, 명분을 확보한 세종대왕은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는 등 토지세법 개정에 박차를 가했다. 세종은 진양대군을 도제조, 하연, 박종우, 정인지 등을 제조로 임명했다. 이중 정인지가 공법 실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공법을 시행하려면 새로운 양전(토지조사)과 등급을 매겨야 했으므로 많은 실험이 필요했다. 그 실험지가 된 것이 바로 초정약수 고개 너머의 청안현이었다. "지난번에 초수에서 김종서와 이숙치 및 정인지로 하여금 함께 청안의 밭을 심사하여, 깊이 밭의 등수를 나누는 예를 안 연후에, 다섯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등수를 정하니, 밭의 품등이 거의 바르게 되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그해 가을에 초정을 다시 찾기 위해 한양도성을 나선 것은 윤7월 15일이었으나 언제 초수리에 도착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1차 거둥의 예로 봤을 때 한양서 초수리까지는 매번 닷새가 소요됐다. 따라서 세종은 윤7월 20일에 초수리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의 작성 시점은 '1444년 7월 13일'이다. 그렇다면 인용문의 '지난번에 초수'는 1444년 봄으로, 이때 이미 청안현이 공법의 실험지로
세종대왕은 공법(貢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지 10년만에 결단을 내렸다. 세종은 관료는 물론 '여염의 세민(細民)', 즉 평민에까지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국민을 상대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는 이런 배경하에 실시됐다. 조선 전기는 당연히 모든 권력이 국왕 1인에게 집중돼 있고 또 신분의 차별이 뚜렷한 봉건시대였다. 그럼에도 세종이 '세민'의 여론까지 들어보려 한 것은 이미 그때 민주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인 만큼 여론수렴 결과는 다섯 달 후인 그해 8월 초순에 나왔다. 결과는 공법시행 찬성 의견이 대략 57%, 반대가 42%로 찬성자가 많았다. '호조에서 중외의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49명입니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수는 총 1
전통시대 동양의 조세개념은 조용조(租庸調)였다. 중국의 수나라 때부터 등장한 제도로 조(租)는 토지에 부과하여 곡물, 용(庸)은 사람에게 부과하여 노동력, 조(調)는 호(戶)에 부과하여 특산품을 각각 징수·징발했다. 조선도 이같은 원칙을 준용, 농지를 가진 농민들에게는 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듯이 조선의 토지제도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공법(貢法)-영정법(永定法)-비총법(比總法) 순으로 변했다. 답험손실법은 글자 그대로 '담헙'과 '손실'이 합쳐진 표현이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조정은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집적 조사하는 것을 '답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등급을 메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불합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령 어느 지역의 농토는 가뭄 때문에 작황에 안 좋아 C정도의 수확을 했다. 그러나 현지에 조사를 나간 관리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A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였다. 세종은 즉위한지 얼마 안 된 때부터 토지세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토질의 전분6등법, 풍흉의 연분9등법으로 잘 알려진 '공법'(貢法)이다. 세종 즉위 3년(142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세종대왕이 청주목 초수리(초정약 지칭)에까지 와서 훈민정음 창제 문제에 대한 고민을 했을까라고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미리 말하면 그런 의구심은 시간 낭비가 된다. 세종대왕은 1444년 초정약수에까지 와서도 훈민정음 문제를 매우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 증거는 아이러리컬하게도 훈민정음 창제의 열렬한 반대자였던, 당시 집현전 부제학(정3품)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 안에 들어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양이 매우 많아 단독이 아닌, 집현전 학자들의 집단상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최만리는 자신이름의 상소문에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어떻게 하겠느냐 △상말(훈민정음 지칭)만 알면 한자로 써있는 공문서는 어떻게 읽을 것이냐 등 세세한 내용까지 상소했다. 그리고 그런 최만리는 이 상소문에는 "어찌 이것만은 행재에서 급급(汲汲)하게 하시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언문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인용문 중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작업, '행재'는 초정약수 행궁, '성
세종대왕 대의 과학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는 장영실과 이천이 주로 거론된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 김조(金金+兆·?∼1455)라는 인물도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물시계인 자격루 발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김조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 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수리(초장약수)에 거둥할 때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바로 김조이다. 그의 보고를 통해 당시 충청도 가뭄과 그에 따른 기근현상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혹은 기근으로 나물만 먹는 자도 있고, 혹은 먹지 못해서 부황이 난 자도 있으며, 쌓아 둔 곡식도 많아야 1, 2두(斗)에 불과하고, 적은 자는 1, 2되 밖에 없는데, 혹 떨어진 자 중에는 경작하던 토지에 파종도 하지 못한 자가 3분의 1분은 된다 하니….'- 식량이 남아 있다는 사람도 기껏해야 1~2말, 적은 사람은 1~2되라고 세종께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초수리에 거둥하던 때의 가뭄은 전년도부터 계속 된 것이라는데 더 심각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
가뭄과 기근은 혼용되는 면이 있으나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가뭄은 기상적인 현상이고, 기근은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굶주리는 현상을 말한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은 1444년 가뭄으로 인해 충청도 일대에 대규모 기근(飢饉) 현상이 나타났다. 세종실록은 그 실상을 '사람들이 나물만 먹은 빛을 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병조 판서 정연이 아뢰기를, "신이 청안(淸安) 지방에 가니, 남녀 30여 인이 모두 나물을 캐고 있으므로, 신이 종자(從者)를 시켜서 살펴보니 모두 나물만 먹은 빛이 있었습니다."'- 기근현상이 좀더 심한 지역에서는 아사자도 속출, 장례를 치르지 못해 시신을 길가에 방치하기도 했다. 당시 예조는 세종에게 이런 보고를 한다. "이제 파종한 것이 싹이 섰고 밀·보리가 팰 때를 당하였는데, 여러 날 비가 오지 않으니 (…) 원통한 옥사를 살펴보고 빈곤한 자를 진휼하며, 시체와 해골들을 묻어 주게 하소서" 하니…'- 세종은 자신이 초수리에 머물고 있는 기간에 심한 기근이 찾아온 것에 대해 이른바 "내탓이오" 의식을 보였다. 또 배곪는 충청도 백성을 신속히 구제하기 위해 이른바 '보고 라인'을 先시행- 後보고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지난 26일 64회를 맞은 '충북일보 클린마운틴'의 산행길은 경남 통영 '사량도'였다.바다 건너 기암괴석에 올라 한려수도를 바라보기까지는 여간 배짱이 두둑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출발은 마냥 신났다.청주에서 차로 세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경남 고성군 상족암군립공원 내 유람선 선착장.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하늘 끝자락에 보이는 작은 섬을 향해 다시 배 위에 올랐다.남는 건 사진이라고 했던가. 회원들은 저마다 잔잔한 바다를 배경으로 한껏 폼을 잡으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20여 분의 짧은 항해 끝에 도착한 사량도 내지마을은 등산코스로 유명한 상도에 있다.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 길을 따라 본격적인 4.1km 산행이 시작됐다.도심 속 산과 달리 여기저기에 넝쿨들이 눈에 띄었다.김웅식 대장은 "넝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토끼, 꿩 등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가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내지마을에서 연무사거리까지 1.3km는 비교적 무난한 등산길이었다.능선을 따라 약 1km를 걸어가면 불모산 달바위가 나오는데 여기서 부터가 죽음의 코스다.가파른 기암괴석을 오르기란 앞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기 때문이다.그러나 아기자
1444년, 세종대왕의 거둥에 발맞춰 초수리 뒷산에서 옥(玉)이 발견되자 나라 전체가 경사스런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영의정 황희는 이를 "태평성대의 징표"라는 식으로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은 옥 발견지 일대를 특별 경비하도록 했다. "초수리(椒水里)에서 산출되는 옥(玉)은 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보배이니 사사로 채굴하지 못하게 하고 그 낭비와 금지를 엄하게 해야 하겠다"- 이어지는 문장은 "금지와 방비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간사한 무리들이 반드시 틈을 타서 몰래 채굴할 것이니, 마땅히 그 주위를 가시나무들로 둘러서 울타리를 만들고, 문에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친히 글짜를 써서 봉해 놓고는…"(〃)라고 쓰여 있다. 지금 사람들은 옥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일부 애호가들이 악세서리용으로 사용하나 그 값은 금·은에 훨씬 못미친다. 그럼에도 당시 세종대왕과 대신들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의외로 음악과 관련이 있다. 세종대왕은 중국 것이 아닌, 조선 고유의 악기로 종묘의례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준음을 지닌 악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때 경기도 남양에서 옥의 일종인 경석(磬石)이 발견됐다. 경석은 가공이 쉽기 때
완벽(完璧)은 보통명사처럼 보이나 실은 중국 고사성어에서 유래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명신이자 책략가인 인상여(藺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이에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으나 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그러자 인상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의 심리전은 먹혀들었고 구슬은 무사히 조나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까지 데리고 온 막내아들 이염(李琰·영흥대군) 왕자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영흥대군(후에 영응대군)은 초수리 약수에 왔던 그해에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했지만 5년 뒤 그녀와 이혼했다. 그러나 실록의 행간을 살펴보면 그 이혼은 합의가 아닌, 송씨가 궁궐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실록은 이 부분을 간단하지만 뭔가를 알 수 있게 적었다. '이때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병으로 인하여 내쫓기고, 다시 배우자를 고르기 때문에 말한 것이었다.'- 원문은 '時永膺大君夫人宋氏以疾見黜, 更爲擇配故云'이라고 돼 있다. 한문에서 '見'은 피동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見黜'(견출)은 쫓겨남을 당한 것이 된다. 사가들은 이 부분에 대해 시아버지 세종이 며느리의 행동거지에 불만이 많았고, 그래서 병을 핑계로 막내아들과 강제로 이혼시키고 궁궐 밖으로 쫓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송씨가 쫓겨날 당시에 병을 앓았다는 핑계는 얼마안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세종대왕은 곧바로 해주정씨 규수를 간택, 영흥대군과 그녀를 재혼시켰다. 여기부터 이른바 '조선시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송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