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는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전통불교 여러 종파 중 법상종(法相宗)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법상종은 이른바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사상(彌勒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륵사상은 부처의 후신불이 미륵불이 어느 시점에서 도솔천에서 하생,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한다는 이론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로 치면 일종의 메시아 사상이다. 그러나 하생이라고 해서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물을 통해 온다고 불교는 말하고 있다. 법주사 경내에는 국보 제 64호인 석연지(石蓮池)가 위치하고 있다. 이 '석연지'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돌에 연꽃을 새진 연못' 정도가 된다. 바로 석연지는 '도솔천의 미륵불이 빨리 하생, 연못(池)을 통해 출현하라'는 상징적인 염원을 담은 조형물이다. 그렇다면 법주사 미륵불과 석연지는 같은 사상을 표현한, 미래의 구원을 염원하는 조형물이 된다. 이처럼 법주사는 창건 초기부터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법주사가 동제 대륵대불-청동미륵대불-금동미륵대불 등 미륵불을 줄곧 세우려 한 이유
속리산 법주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은 팔상전(국보 제 55호)과 미륵대불이다. 팔상전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목탑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의 요청으로 1624년(인조 2)에 재건됐다. 조선은 유교가 국시였기 때문에 불교를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기의 승려들은 호국사상으로 무장, 전국 곳곳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따라서 임진 직후의 조선 조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계의 요청을 일시적으로 수용,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불사(佛事)가 많이 일어났다. 법주사 팔상전도 그런 배경하에 건립됐다. 이에 비해 법주사의 또다른 상징물인 미륵대불은 시간적으로 전통과 현대에 걸쳐 있는 묘한 조형물이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동불(銅佛)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건립과는 과정에서 일주문 밖으로 반출, 당백전을 주조하는데 사용됐다. 법주사 미륵대불이 동불이자 실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17세기 선비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 지은 '산중일기'에 잘 드러난다. "말을 달려올라 가보니, 법주사가 수정봉 아래에 있었다. 지대가 평평하였다. 제3문으로 들어가니 높이가 7,8
법주사 사하촌은 분지 지형을 띄나 경작지는 넓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가난을 조금이라도 떨치기 위해 부업을 해야 했다. 대표적인 부업이 복조리였다. 사하촌 주민들은 9월이 되면 복조리의 주재료가 되는 산죽을 채취하기 위해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채취된 산죽은 △하루쯤 말리기 △껍질 벗기기 △네 가닥으로 쪼갠 후 물에 담그기 등의 과정을 거쳐 복조리 재료로 사용됐다. 이때 여자와 아이는 바닥조리, 성인 남자는 '우기'와 '매끼틀기'를 주로 맡았다. '우기'는 바닥조리를 오므려서 묶는 것을, 매끼틀기는 복조리의 허리 부분으로 단단히 묶는 작업을 일컫는다. 복조리의 세는 단위는 '지리'로, 50개를 하나로 묶은 것을 말한다. 사하촌 주민들은 이 복조리를 '지리' 단위로 묶어 보은은 물론 청주, 상주장까지 내다팔았다. 속리산 사하촌 주민들이 두 번째로 많이 한 부업은 도리깨의 '노리'(아들) 만들기였다. 도리깨는 크게 손잡이 막대, 노리, 꼭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노리'는 보은지방 사투리로 표준어는 '휘추리'다. 복조리 제작이 끝나면 영농철 전까지 사하촌 주민들에게 약간의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주민들은 이때 봄부업으로 도리깨를 많이 만들었
조선도 조용조(租庸調)의 원칙에 따라 농토를 가진 농민들에게는 세를 부과했다. 조선시대 이 제도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공법(貢法)-영정법(永定法)-비총법(比總法) 순으로 변했다. 이중 답험손실법은 글자 그대로 '답험'과 '손실'이 합쳐진 표현이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조정은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집적 조사하는 것을 '답험', 그리고 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등급을 메기는 것을 의미했다. 이 제도는 불합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령 어느 지역의 농토는 가뭄 때문에 작황에 안 좋아 'C' 등급의 수확을 했다. 그러나 현지에 조사를 나간 관리는 'A' 등급이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였다. 세금을 더 걷기위함이었다. 세종은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할 정도로 즉위 초부터 토지세에 대해 고민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토질의 전분6등법, 풍흉의 연분9등법으로 잘 알려진 '공법'(貢法)이다. 세종 즉위 3년(1421) 대신 김점(金漸)이 상소를 했다. "한 도(道)의 일은 오로지 감사에게 위임되었는데, 유독 손실을 답험하는 일에도 별도로 경차관을 보내게 하였으나, 경차관이 된 사람은 겨우 복결(卜結)의 수효만 알 뿐이므로, 감고(監考)하는 서원(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는 충북 불교의 종가로 속리산의 상당한 면적을 소유하고 있다. 법주사로는 종교시설로, 경제적 영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주사가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데는 역사적인 계기가 있다. 1464년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는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복천암을 방문했고, 이때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의 대규모 토지를 복천암에 하사했다. '임금이 속리사와 복천암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에 쌀 3백석, 종 30명, 논밭 2백결을, 속리사에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 하사하고 신시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인용문 중에 '2백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결'(結)은 우리나라 전통시대 토지단위의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이 '결'(結)은 엄밀히 말하면 면적이 아닌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토지단위다. 세조의 아버지 세종은 토질의 비옥도에 따라서는 6등급, 그해 풍흉에 따라서는 9등급으로 분류하는 이른바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처음 도입·실시했다. 이때 전분6등법상의 1결 면적은 1등전과 6등전이 대략 3분의 2대 1 정도가 됐다. 즉 비옥도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등전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이 넒어지게 된다. 비
속리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舍乃里)다. 지명 사내리에 대해서는 △'절 안'의 뜻이 한자화됐다 △원래 '사내골' 뒤쪽에 '사내사'라는 절이 있었다 △집이 쭉 이어졌기 때문에 '집 舍'(사), '이에 乃'(내) 자를 써서 '사내리'라고 했다 등의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법주사 사하촌인 사내리 지명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는 사내리를 '사내동리'(舍乃洞里)로 표기했다. 그리고 '관아에서 동쪽으로 3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28호이다. 남자가 45이며, 여자는 49명이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충청도읍지(1840년대)는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30리, 호수는 31호, 남자는 69명, 여자는 52명이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18세기 중반부터 자연마을이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사내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는 '동래 정'(鄭) 씨로 현재 7~8대 정도가 내려오고 있다. 법주사 사하촌 6.25 때 급격한 인구 변화를 겪었다. 조선후기가 되자 빈부의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서 이땅의 민초들은 지팡이 하나 꽂을 땅을 갖지 못했다. 그
1920년대 충북도지사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법주사 여승 성폭행 사건과 관련, 당시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로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때가 1925년 3월 31일이다. 박주중양과 동아일보 사이에 당연히 악연이 싹트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국가의 공복이자 지방장관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는지 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칼럼난은 박중양의 법주사 여승 성폭행이 속리산 법주사에서 일어난 것을 빗대 아예 그를 속세의 아전이라는 뜻인 '속리(俗吏), 그리고 '군'이라고 불렀다. '충북지사 박중양은 도처에서 속리(俗吏)의 본색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 속리 박중양 군이여. 관찰사의 권위도 장하고 명승지 유람도 좋은 일이지만 다수한 농민을 실사아사(失時餓死)케 하고 또한 범형치사(犯刑 致死)케 하는 것이 군의 당행할 직무인가. 그리하고도 일선융화만 창도하고 총독부 당국의 환심만 사면 만사가 태평이란 말이지.'- 인용문 중 '명승지 유람'은 화양동 등 괴산지역을 1주일 유람하고 돌아온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농민을 실사아사하고 범형치사케'는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하기 위해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보
일본식 이름이 호추시게요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일제강점 기간인 1920년대 충북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산수유람 편의를 위해 속리산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을 지시한 것은 1923년 6월 중순이었다. 말티고개는 그로부터 1개월후 오솔길보다는 조금 더 넓어졌다. 박중양이 1년 후인 1924년 11월 초순 속리산 법주사를 다시 찾았다. 그는 그 이전에 화양동 등 괴산지역 명승지를 1주일간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올 정도로 유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이 장기 유람을 관행으로 여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박중양은 개인의 만족을 위해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박중양의 이날 법주사 방문에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일부 공무원, 그리고 신문기자 등이 동행했다. 사이토 마사토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1927년 동안 제 3대 조선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통치 스타일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꿨고, 이때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변절했다. 일행은 젊고 예쁜 비구니(여승)를 불러앉힌 후 밤늦도록 주연을 가졌다.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
말티고개는 보은에서 약7㎞ 지점에 있는 속리산 입구의 첫 고개로 높이는 430m다. 현존하는 흑백사진을 보면 말티고개는 일제 강점기까지 오솔길 정도의 모습으로 그 폭이 좁았다. 고개 굽이가 워낙 많고 험하다 보니 선형 개선은 물론 노폭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대형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인물은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이다. 이것에서 보듯 그는 친일행각이 뚜렷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념적 친일파라는 사학자들의 평가가 따라 다니고 있다.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직과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1923년 2월 24일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말티고개를 확장하는 토목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는 유람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부임 2달 후인 192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는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온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속리산 복천암에서 온양으로 가려면 말티고개 외에 차의현(車衣峴, 혹은 차의치), 묵현(墨峴), 누치(漏峙) 등을 경유해야 한다. 차의현의 지금 지명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수리티재'다. 해발 3백여m의 수리티재는 보은 수한면 차정리와 회인면 건천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 25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차의현은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회인현과의 경계이다"라는 적어놨다. 이밖에 해동지도는 '차의치(車衣峙)', 여지도서와 대동여지도는 '차의현', 일제 강점기 지리지인 '조선지지자료는 '차령(車嶺)'으로 기록했다. 이상에서 보듯 전통시대 지명에는 '차의'(車衣) 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왜 그런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수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차의(車衣)'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묵현'이 지금 어느 고개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지도는 '묵령'(墨嶺)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황상 문의 마장이에서 회인 중앙리 저자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먹티'가 확실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회인현 산천조에서 '목감산 고을 서쪽 5리에 있
세조는 1464년 속리사와 복천암을 둘러본 후 온양행궁을 가기 위해 다시 북향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보은에서 온양을 가는 코스는 2가지가 존재했다. 조선시대 공로는 현(縣)과 현을 연결시켜 주던 도로로, △국가 문서 전달 △조세수납 △관찰사 순력 때 주로 이용됐다. 이에 비해 사로(私路)는 장돌뱅이들이 지름길로 가기위해 주로 개척했다. 먼저 보은에서 온양에 이르는 방법은 보은-회인-청주-천안-온양의 루트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루트는 보은-회인-문의-연기-전의-온양 이다. 세조의 어가는 이중 후자를 택했다. 왔던 길을 피하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보은 속리산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가 하루 뒤 문의현에 도착했다. 세조실록은 이에 대해 '어가가 문의현(文義縣)에 머물렀다'(10년 2월 29일자)라고 짥막하게 적었다. 세조의 어가는 계속 북서진을 해 다음날 전의현에 도착했다. '어가가 전의현에 이르니, 예조판서 박원형(朴元亨)이 사신 원접사로서 와서 하직하였다.'- 인용문 중 다소 생소한 용어인 '원접사'는 중국의 사신을 멀리까지 나가 맞아들이던 임시 벼슬을 말한다. 세조가 순행 중에도 국사를 처리했음을
조선 전기의 우리고장 영동 출신의 김훈이라는 인물은 아내 여흥이씨와 사이에 김수성(金守省), 김수경(金守經), 김수온(金守溫), 김수화(金守和) 그리고 딸 1명 등 4남 1녀를 뒀다. 이중 맏아들 김수성이 출가해 속리산 복천암 주지를 지낸 신미(信眉) 대사이고, 김수온은 식우집(拭·集)을 남기는 등 조선전기의 대문장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신미대사의 첫째 동생인 수경도 벼슬이 낮지 않았다. 먼저 우리고장 보은현감을 역임했다. '신미가, 임금이 부처를 받들어 믿는 것을 의지하여 자주 짧은 편지로써 임금에게 통해 아뢰어, 아우·조카가 벼슬에 제수되어 뜻과 같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김수경이 보은현감으로서 벼슬에 초배(超拜)되니, 인망(人望)에 맞지 아니하여 물의가 자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충청도 수부읍의 하나인 청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가 영농철에 접어들었는지 성종은 김수경에게 민폐끼치는 행정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청주목사 김수경·영해 부사 김효급·예안현감 김귀지가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이제 바야흐로 농사가 시작되어 백성이 노고할 것이니, 폐해가 되는 일을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김수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