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사진)에는 일지홍(一枝紅), 봉황지(鳳凰池), 이름없는 기녀 등 청주의 기생도 다수 등장한다. 수양대군 세조가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킬 때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한 인물이 한명회와 권람이다. 한명회는 당시 청주목 땅(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권람은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잠들어 있는 등 우리고장과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만나기 전 청주를 찾았고, 이때 권람은 일지홍이라는 기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몇년 뒤 권람이 다시 청주를 찾았을 때 일지홍은 저승으로 간 뒤였다. 권람은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이렇게 읊었다. '지난 무오년에 놀던 일 생각하면(憶昔來遊戊午年) / 일지홍의 요염한 자태 선비의 간장 녹였지(一枝紅艶惱儒仙). / 오늘 다시 찾아오니 감개가 무량하나(今日重遊還有感) / 가련하다 외로운 무덤 인간을 등졌구료(可憐孤塚隔寒烟).'- 권람은 그후 동시대 문신 강중(剛中·김수온의 자)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고, 이때 청주기생 일지홍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김수온은 "나도 청주 율봉역의 봉황지라는 기녀를 좋아했는데 몇년 뒤 다시 찾으니 이승에 없었다"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김수온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27)에는 충북과 연고가 있는 기녀들이 10여명 등장한다. '한지와 봉매', '전목과 충주기생 금란', '보은현감 성원제와 춘절', '윤현과 청주기생', '송상현과 김섬' 등은 본란에 소개됐거나 비교적 널리 알려진 편이다. 이에 비해 '배극렴과 설매', '신광수와 영춘기생 계화', '충주 교리석(校理石) 전설', '서원기생 일지홍', '송인과 서원기생' 등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진천 인물 배극렴(裵克廉·1325~1392)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공양왕을 폐한 공으로 조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됐다. 『조선해어화사』에 의하면 당시 정승 배극렴이 연회석상에서 기생 설매(雪梅)에게 "들으니 너는 동쪽에서 먹고 서쪽에서 잔다더구나. 오늘은 노부(老夫)를 위해 천침(薦枕)하는 것이 어떨까"(제 31장)라고 유혹의 말을 던졌다. 노부는 배극렴 자신, 천침은 첩이나 시녀 등이 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자 설매는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는 천한 기생의 몸을 가지고 王씨를 섬겼다가 李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사리에 꼭 맞습니다"(〃)라고 독설했다. 모시기는 모
도내에서 구한말~일제 강점기를 산 역사적 인물로는 단재 신채호의 지명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인물로 괴산출신 이능화(李能和·1869∼1943)가 있다. 이능화는 당시 괴산군 이도면 수진리(현 괴산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원긍(李源兢·1849-1919)은 문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관찰사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1990년대 후반에야 시작됐다. 권평 씨는「이능화와 조선기독교及외교사」(1999, 연세학술논집)에서 이능화의 생애 마디를 ①어린시절(1869-1889), ②외국어 공부 시기(1889-1897, ③외국어 교수 시기(1897-1910), ④한국종교사 연구 시기(1912-1920), ⑤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관 또는 편수위원 역임(1921-1937) 등으로 분류했다. 그는 ①에 대해 '이 시기의 이능화는 한문을 공부하며 과거를 준비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가학으로 공부를 한 셈으로 훗날 수많은 한문전적의 분석과 방대한 한문저술의 초석이 이때 이뤄졌다'고 밝혔다. ②에 대해서는 '상경하여 영어, 중국어, 불어 등 3개 국어를 배워 능통하게 된다. 그가 양반의 자제로서 외국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한지(韓祉·167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월악서소』(月嶽書疏)라는 저서를 남긴 문장가이자, 청렴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이른바 '팔포'(八包)의 법을 엄히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팔포는 조선시대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여비(旅費) 등으로 쓰기 위해 가져가는 8개의 포대를 말한다. 각 포대에는 인삼 10근씩이 담겨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신들은 이 팔포를 당나라 사행길에 가지고 가 여비 또는 물품구입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여비를 풍족히 쓰는 것 외에 당나라 물품을 구입, 국내에 들여와 되팔면 적지 않은 차익이 발생했다. 대신 인삼자원은 고갈됐다. 이를 과감히 금지시킨 인물이 바로 한지였다. 그는 1727년(영조 3)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팔포의 법을 엄히 지켜 역관(譯官)이나 비록 대관(大官)이라도 이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의 청렴강직한 성품은 관료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윤리적인 것에도 같이 적용됐다. 조선시대 관찰사(감사)는 임기 2년이 기본으로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대개 홀몸으로 부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관찰사 등 당시 외관들이 합법적으로
몇해전 청주 상당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충북 도민헌장탑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난 적이 있다. 관리가 어렵고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상당공원 도민헌장탑은 '시멘트+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적어도 3년에 한 번씩 흰색 페인트칠을 해야 한다. 탑을 설계·시공한 청주출신 김경화(전 공주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조각가는 이에 대해 "도민헌장탑을 만들 당시인 1970년대에는 국내 조각가들 사이에 석재를 다루는 기술력이 현재처럼 발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탑에 새겨진 글과 조각 형상에서 비롯되고 있다. 도민헌장탑의 글은 탑 전면과 뒷 공간의 부속 조각 등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탑 전면에 새겨진 글 내용은 전회에 밝힌 바 있다. 탑 부속 조각의 글은 전면의 슬로건을 풀어쓴 것으로, 주장은 비슷하다. '이러한 전통은 가즈런히 오늘에 전승되어 우리 품성의 바탕이 되고 행실의 기조가 되어 교육과 문화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거니와 온후 순박한 인심 속에서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며 보수에 흐르기 쉬운 도민기질을 하면 된다는 신념아래 부지런히 일하고 협동단결하여 남보다 앞서가려는 적극적인 기질로 일신시켜 가고
중앙공원에 이어 청주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은 상당구 수동 283-3번지 위치한 상당공원이다. 상당공원은 1만9백여㎡의 그리 크지 않은 면적으로, 공원내 주요 시설로는 충북도민 헌장탑, 한병수(韓鳳洙, 1883~1972) 동상, 충북 4.10학생혁명 기념탑 등이 있다. 그러나 상당공원은 지난 1930년대에 조성된 중앙공원과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4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됐다. 청주 향토문화대전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 금수장 여관과 동아극장 등이 있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암산(牛岩山·338m)을 가린다고 하여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9년 충북도민헌장탑이 건립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도민헌장탑은 공원의 많은 면적으로 차지하고 또 도심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단번에 시민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러나 도민헌장탑에는 언제, 누가 이 탑을 세웠고 또 조형물이 의미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한 줄의 설명문도 만날 수 없다. 현 충북도민헌장탑은 1979년 전국소년제천 청주대회를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물로 세워졌고, 당시 충북지사는 정종택 씨였다. 당시 충북체육은 소년체전 7연패를 하는 등 전국의 부러움을
청주 중앙공원은 조선시대는 청주목 관아,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충북도청이 위치하던 자리였다. 중앙공원은 충북도청이 지금의 문화동 자리로 이전하면서 조성됐지만, 공원 건립을 위한 공간 확보는 1911년부터 시작됐다. 일제는 1911년 4월 이른바 시구(市區)의 개정, 즉 도시계획에 착수했다. 『청주연혁지』를 보면 일제는 사방의 성벽을 허물도록 하고 그 돌을 이용하여 새롭게 하수도를 건설하고 일직선으로 석교에서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개수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본정통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종횡에 가로를 계획하여 가로 세로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함으로써 바둑판의 모양과 유사한 시가지를 만들게 되었고, 1915년(대정 4)에 이르러서는 그 대부분의 공사를 준공하였다.(55쪽) 그 이전에 충북도청이 1908년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해 오면서 청주읍성 관아의 각 건물에는 과(果)들이 분산 배치됐다. 본건물인 근정전(勤政殿)에는 지방, 통군루에는 회계과, 공손수(압락수) 아래의 건물에는 학무과, 근정전의 동쪽에 있는 건물에는 재무과가 배치됐다. 1922년에 편찬된 『대청주』라는 자료를 보면 일제는 이때부터 서공원과 동공원 외에 별도의 공원을 청주 도심이 조
공원은 공공녹지로서 자연지(自然地)나 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후생적 조경지로 정의된다. 전자를 자연공원, 후자를 도시공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원이 역사적으로 언제 출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근대공원은 중세 이후 영국의 왕후·귀족이 소유·독점 사용하던 수렵장이나 대규모 정원을 19세기 중반에 일반에게 공개한 것에서 비롯됐다.청주의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일제 강점기 때 등장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쓴『청주연혁지』에는 '서공원'(현 사직동 충혼탑 자리·사직산)과 '동공원'(현 당산 일대·명장사 뒷산))에 대한 설명이 동시에 등장한다. 따라서 최소한 1920년대 초반부터청주에도 공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공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먼저 『청주연혁지』는 서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무렵에는 청주에 공원이 없었기 때문에 鈴木 장관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땅을 깍아 도로를 개척하고, 여러 종류의 수목을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돌을 운반하여 벤치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오처옥(吳妻屋)을 설계하여 휴식장소로 삼도록 하였는데, 동공원과 함께 성대하게 설비되어 있었다. 櫻井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재향군인들
단양은 산이 많고 들이 적기 때문에 쌀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이런 환경에서 전세(田稅)를 쌀 등 현물로 내는 것은 고욕이 아닐 수 없다. 쌀 생산량이 적다보니 타지에서 쌀을 사다가 전세를 내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를 해결한 인물이 당시 관찰사 이석규(李錫奎)다. '단양군의 전세(田稅)·대동미와 군포(軍布) 등을 영원히 전량 돈으로 대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도백 이석규가, 산간 고을에서는 쌀과 베가 매우 귀하여 멀리 타도에서 사와야 하고 수송의 길도 험하여 매양 전복된 배가 많다는 이유로 돈으로 대납하기를 청하니, 묘당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그의 충청도 관찰사 재임시절에 연풍현에서 이희윤(李喜允)이라는 인물에 의해 전패(殿牌)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전패사건이 빈발한 탓인지 순조실록은 이 사건을 소략으로 기록했다. '공청감사 이석규가 연풍현의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킨 죄인 이희윤을 처형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순조실록은 20여일 뒤 또 하나의 관련 기사를 기록해 놓았다. 이희윤의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풍현에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켰던 죄인 이희윤의 아들
조선시대 우리고장의 전패훼손 사건은 충주, 황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빈번히 발생했다. 조선후기가 되면 전정, 군정, 환정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서민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전패 훼손사건은 음성, 단양, 연풍, 괴산 등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훼손 사건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정치적,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이는 사건이 나름대로 독특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먼저 음성현 객사의 전패훼손 사건이다. 현종실록 3년(1662) 2월 4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음성현에서 전패를 도난당했다고 감사가 계문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그 읍만 혁파하고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서 간악한 백성이 계획적으로 수령을 몰아내는 일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 이에 상이 따랐다." '수령을 골탕 먹이려는 전패훼손 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나니 고을만 강등시키고 수령을 파직하지 말아달라'는 건의 내용이다. 현종은 이를 수용, 당시 수령은 파직하지 않았으나 음성현은 10년 동안 그 이름이 사라졌다. '호서의 음성현(陰城縣)을 혁파하였는데, 전패(殿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성현 전패훼손 사건을 기점으로 전패에 대
국왕을 상징하던 전패(殿牌)는 조선후기 들어 각종 사건에 휘말렸다. 그 사연은 정치적인 동기, 개인 비리에 의한 훼손 등 매우 다양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전패 훼손사건은 효종 6년(1655)에 전라도 나주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주에는 경현서원이 존재했고, 그 운영권이 전패 훼손사건의 발단이 됐다. 비(非) 서인계가 서원(書院)의 원장이 되자 당시 나무목사 정기풍(鄭基豊·1594~?)은 이를 옹호했다. 그는 본관이 초계로 1642년 신계(新溪·지금의 황해도 신계군) 현령으로 재직하던 중, 암행어사 정치화를 통해 그의 선정이 보고되어 임금으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을 정도로 유능한 관료였다. 또 우리 고장과도 인연이 있어 1650년(효종 1)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직하던 중 문학(文學·정5품)에 임명되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나주의 서인 집단은 이를 빌미로 목사 정기풍을 축출하려 했다. 전패가 훼손되면 그 책임의 일부가 목사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미리 계산한 사건이었다. 전패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지능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일성록 헌종 11년(1845)에 관련 기록이 적혀 있다. 이 때는 우리 고장 청주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한다. 청주사람 박용수는 유한원이
조선 조정은 국가차원에서 두 개의 위패를 관리했다. 하나는 궐패(闕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패(殿牌)이다.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 조정은 황제국인 명나라를 향해 정초, 황제생일, 동짓날 등에 절올리는 의식은 망궐례를 행했다. 이때의 위패는 '궐패'(闕牌)라고 불렀다. 궐패가 국외용이라면, 전패는 국내용이었다. 조선 조정은 또 전국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殿(전)'자를 새긴 나무 패를 봉안했다. 바로 전패이다. 고려 시기까지의 객사는 말 그대로 공무로 출장온 관료들의 숙박 장소로 사용됐다. 조선 조정은 지방에서도 국왕 권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이 객사 내부에 전패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사극을 보면 '전하'(殿下)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원래 이 전하는 신하가 임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이른바 '인기척 표현'이다. 감히 신하가 임금을 부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전패나 전하의 '전'은 일국의 최고 통치권자를 상징했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