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답양리 채운산에 가산사(佳山寺)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창건자는 정확하지 않다. 가산사는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작은 암자 규모를 유지되다 정조 대에는 일시적으로 폐사됐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1765년)는 가산사에 대해 '옥천군 북쪽 25리에 위치한다'고 적었다. 신경준도 '가람고'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정조 때 발간된 범우고(梵宇攷)는 '북쪽 2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됐다(今廢)'라고 적었다. 사찰에 영정각이 존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가산사에는 영정각(도기념물 제 115호)이 존재하고 있다. 영정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의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와 조헌이다. 영정각이 건립된 직접적인 이유도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였고, 영규대사 또한 연합작전을 펴면서 가산사를 승병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실 관계가 약간 불명확한 면이 있다. 두 인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의·승병을 훈련시켰다면 청주에도 함께 입성했다고 보는
전회에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이 9년여 동안 피난생활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는 지금의 충남 홍성으로 피신한다. 여기서 8개월 정도 머물다가 전북 장수로 피난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들이 현감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강으로 도피하고, 나머지 4년은 지금의 충남 부여 임피면에서 생활한다. 그는 평강에서 50개월 가량 머물면서 역둔전 등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으며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아들 윤겸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강시절을 제외하면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가장 많이 했다. 임진년 음력 8월의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산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점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추석)으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오희문은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임진왜란의 전황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노비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노비를 수시로 관청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보고토록 했다. 임진년 음력 8월 10일자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장 조헌과 참장 이천준은 때에 맞는 인걸로서(…) 승리를 거두어 행동하는 것이 옛사람과 같으니…' 이때의 승리는 청주성 전투를 의미한다.
우리나라 3대 익랑(행랑의 일종) 누각의 하나인 제천 청풍의 한벽루(寒碧樓·보물 제 528호)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이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은 한벽루에 대해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올려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라고 홈페이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국내 백과사전 중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두산백과'도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건립되었으며 석축토단의 덤벙주초 위에 엔타시스를 사용한 층하주(層下柱)를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다'라고 비슷한 서술을 하고 있다. '엔타시스' 공법은 기둥 가운데 부분을 약간 배부르게 하는 것으로, 순우리말로는 배흘림 기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보가 확인한 결과, 1317년 이전의 '한벽루'라는 한시가 존재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주열, 이승소, 양숙, 최숙생, 유운 등 5명의 한시 제영(題詠)이 실려 있다. 제영은 제목을 붙여 시를 읊는 것을 일컫는다. 이들 5명 중 주열(朱悅)이라는 고려시대 인물은 청공왕사보다 사망연대가 30년 앞서고 있다. 주열의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서 쓰여진 개인일기로 '쇄미록'이 있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9년여 동안 썼다. 현재 해주오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쇄미록은 7책 분량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겪은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참상뿐만 아니라 조선중기의 생활상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때문에 개인이 쓴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물 제 1096로 지정돼 있다. 쇄미록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의 하나인 '시전'(詩傳)에서 발췌됐다. 시전에는 '쇄혜미혜 유리지자'(쇄兮尾兮 遊離之子)라는 표현이 있다. 첫 글자 '쇄'는 '銷'자에서 '金' 대신 '王'자이다. 쇄미록은 이 문장 중 '쇄'와 '미' 자를 따와서 만든 표현이다. 해석하면 '부서지고 자잘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로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에 전국을 피난하면서 쓴 일기'라는 뜻이다. 오희문은 조선 중기인 중종과 광해군 연간을 살았던 인물로, 아버지는 장성현감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이고 어머니는 고성남씨 남인(南寅)의 딸이다. 그의 아들 윤겸(允謙)은 임진왜란 종전 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포
백전백패하던 조선군에게 청주성 전투의 승리는 고무적인 것 이상이었다. 전란 중의 선조가 대신들과 영규에게 어떤 상을 내릴 것인가를 논의하나 곧바로 논쟁이 벌어졌다.조선은 무장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대부가 힘을 합쳐 세운 연합정권이고 그 고리는 유교였다. 이런 까닭에 정도전은 석가모니를 '佛氏'(불씨)라고 멸칭하기도 했다. 요즘말로 하면 '미스터 아무개' 정도가 된다. 그러나 영규는 조선의 대통을 실천하는 유학자가 아닌, 머리를 깎고 산중으로 들어간 수도승이었다. 대신 윤두수가 이런 말을 한다."승려를 당상관에 제수한 것은 개벽이래 아직 듣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의당 특이한 법전을 써야 합니다."-청주성 전투의 공을 봐서는 당상관 벼슬을 주는 것이 합당하나, 유교사회의 승려이기 때문에 일종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대신인 윤승훈은 "영규는 (…) 호령이 엄명하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이 없이 한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청주의 왜적은 이 군사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논란 끝에 영규대사에게 당상관(정3품)에 해당하는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
영규(靈圭·?∼1592) 대사는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청주성과 금산전투에 잇따라 참전했다. 속향이 공주인 영규대사와 옥천에 기거하고 있던 조헌은 '공주'라는 지역성을 매개로 만났다. 선조수정실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승려 영규는 당초 공주 산사에 있었는데, (공주)목사 허욱(許頊)이 불러 승장을 삼았으나, 하려 하지 않다가, 강권한 뒤에야 응하였다. 일단 무리를 모아 군대를 만들고 나서는 오직 조헌만을 따라 진퇴하였다." 영규대사는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 탈환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헌과 마찬가지로 승리 후에 관군이 공다툼 시비를 걸어온다. "충청병사 이옥(李沃)은 영규가 성을 함락시킨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적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하여 즉시 성을 헐고 곡식을 태우게 하고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므로 청주의 사람들이 그(곡식)의 살점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마침내는 적을 물리친 것을 자기의 공으로 삼아 거짓으로 보고하여, 상을 받았으니…"- 후에 충청병사 이옥은 이같은 사실이 발각돼 삭탈관직을 당했다. 영규대사와 조헌은 청주성 전투 후 선조를 보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려했으나 방향을 바꿔 금산으로 향했다. 이때도
일제는 강점기 기간 동안 충북의 산성도 매우 세밀하게 실측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일제는 사찰, 탑, 석불 등 불교와 고분 고적 등만을 조사했다고 알려져 왔다. 충북도 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지난 23일 한신대박물관 이기성 학예관을 초청, '일제강점기 충북지역의 고적조사' 제목의 특강을 가졌다. 일제가 세키노 타다기(關野貞),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등을 동원, 한반도 고적조사를 실시한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세키노 타다기는 1909~1915년 기간 동안 한국탁지부와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주로 건축물 조사를 담당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충주 중앙탑도 조사했다. 도리이 류조는1910년부터 1916년까지 전국의 고적을 조사, 수백매에 이르는 관련 자료를 '유리원판 목록집'으로 남겼다. 이밖에 大原利武라는 인물은 지석묘 등 한반도 선사시대 고적을 조사한 바 있다. 옥천 석탄리 지석묘도 당시 발간한 사진첩에 수록돼 있다. 그러나 이 학예관은 이날 도문화재연구원 특강에서 일제는 강점기 동안 충북을 포함한 전국의 산성을 정밀하게 실측, 이를 '朝鮮城址實測圖'(조선성지실측도)라는 자료로 남긴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1911~1924년에 제작
'옛날에 중원에 나그네로 왔더니 / 지금은 중원으로 유배되어 왔도다 / 그저 달천의 물을 마실 뿐이요 / 달천의 물고기는 먹지 않았는데'- 연산군~성종 연간의 인물인 이행(李荇·1478∼1534)이 우리고장 충주의 달천 주변에 유배를 와서 쓴 시로, 적거록이라는 고문헌에 실려 있다. 그 증손이 이안눌(李安訥·1571∼1637년)이다.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그리고는 동년배인 권필과 선배인 윤근수·이호민 등과 문장을 논했다. 후대에 이들의 시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불렀다. '동악'은 이안눌의 어릴적 호이다. 따라서 그가 이 모임의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07년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부임하면서 '四月十五日'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시제목은 평이하나 내용은 슬프기 그지없다. '술잔을 바치고 죽은 자를 곡한다오 / 아버지가 자식 위해 곡하기도 하고 / 자식이 아버지 위해 곡하기도 하고 /…/ 또 어미는 딸 때문에 곡을 하고 / 또 딸은 어미 때문에 곡을 하고 /…/ 눈물이 문득 턱을 타고 내리네 / 아전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 곡할 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
임진왜란과 관련, 당시 충청도 순찰사인 윤국형(尹國馨·1543~1611)이라는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일부 사료를 윤국형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도순찰사와 도관찰사는 같은 종2품으로 품계는 같다. 다만 도순찰사는 임시로 파견되는 직책으로 전시에는 군권(軍權)을 가지게 된다. 도순찰사는 성종 때부터 처음 등장한다. 적지 않은 사료들이 조헌 등 의병 지도자들이 모병 활동을 할 때 당시 충청도 순찰사였던 윤국형이 방해내지 훼방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와 청주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 이에 조헌이 순찰사 윤국형을 찾아가 거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말하자…'- 같은 선조수정실록에는 바로 '청양현감 임순(任純)이 백여 명의 군사로 조헌을 돕자 국형이 그가 절도(節度)를 어겼다고 하여 잡아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조헌이 또 편지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고 바로 우도(右道)로 가서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라
의병장 조헌은 생전에 이런 시를 남겼다. 宣尼(공자)께서 당시에 東周를 이루지 못하셨으나 / 남긴 가르침은 가득차고 넘쳐 만년을 비추네 / 남자가 경을 궁구함은 장차 주나라를 이루려 함이지 / 어찌 한 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한 지역만을 위할 것인가.'- 인용문 중 '동주'는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중국고대 주나라를 일컫는다. 이처럼 조헌이 추구한 세상은 예의와 염치(廉恥)가 충만한 도학적인 세상이었다. 관군의 방해가 적지 않았고 또 목숨을 담보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헌 휘하로 의병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상당수는 조헌의 직계 제자들 이었으나 일부는 조헌의 성격과 인품 그리고 사상에 이끌린 사람들이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경구는 무인뿐만 아니라 문인의 세계에도 통했다. 후대의 송시열은 이를 두고 '明道正誼 就義成仁'(명도정의 취의성인)이라고 표현했다. '도를 밝혀 정의를 바로 세웠고 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금산 칠백의사 중 이름과 신원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同日殉節錄'(동일순절록)이라는 문헌이 있다. 같은 날 순절한 사람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목록에 첫번째로 오른 인물이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이다. 그 다음은 이광륜(李
[충북일보]충북청주프로축구단이 부상 선수가 발생한 상황에서 경기를 중단하지 않은 심판진에게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자 청주FC 팬들이 한국프로축연맹을 규탄하는 등 발끈하고 나섰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최근 4차 상벌위원회를 열고 '심판 판정에 대한 과도한 항의'를 이유로 충북청주FC에 제재금 300만 원을 부과했다. 이번 징계는 지난 5월 31일 청주종합운동장에서 열린 K리그2 14라운드 충북청주FC와 경남FC 경기에서 있었던 청주 FC 선수의 부상이 단초가 됐다. 후반 68분 경남FC 헤난 선수가 태클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충북청주FC 여승원 선수가 몸쪽을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충북청주FC 측은 심판진에게 경기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후로도 수분간 인플레이 상황이 지속되다 경남FC 선수가 공을 라인 바깥으로 보내고 나서야 경기가 중단됐다. 이에 충북청주FC 구단 관계자가 대기심에게 여러 차례 항의했고, 결국 이같은 항의는 연맹의 징계로 이어졌다. K리그 상벌규정 유형별 징계 기준 2조 '심판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에 따르면 심판 판정에 대한 과도한 항의를 할 경우 제재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돼 있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민선 8기 충북도 출범 후 김영환 지사의 100대 공약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전담 조직 설치로 방향이 조정된 충북관광공사 설립이 검토된다. 국내외 관광객 유치, 관광 자원 관리 등의 효율적 운영과 관련 사업 확장, 충북 관광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다. 도는 타당성을 검토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충북관광공사 설립이 본격화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18일 도에 따르면 가칭 '충북관광공사 설립 타당성 검토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할 외부 전문기관 선정에 들어갔다. 다음 달 중 업체를 확정한 뒤 바로 용역을 의뢰할 예정이다. 용역 기간은 착수일로부터 6개월이다. 용역을 수행할 기관은 국내외 관광 여건과 충북 관광 자원 및 산업, 도내 관광 분야 행정조직과 기관 등의 현황을 분석한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관광 사업 추진 체계와 공사 설립·운영 성공 사례와 무산된 사례도 살펴본다. 조직과 인력 규모 등 공사 설립을 위한 기본 방향과 운영 체계를 설계하고, 공사 설립 시 충북도 역할과 기능, 공무원 정원 감축안 등을 검토한다. 충북문화재단 내 관광사업본부 기능을 흡수하고 통합 후 확대하는 방안도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