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日 침략전쟁 미화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 일제 침략은 군사와 정치 침략만이 아니었다. 종교와 학문도 침략의 도구가 되었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도 그런 도구의 일부였다. 지금도 「언덕 위의 구름」의 주제가는 역사의 진실을 오도하는 무기로 기능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노래는 전쟁의 참상과 비인도적인 식민지 지배 사실에 눈을 멀게 만든다. ■ 아사다 마오를 응원하는 음악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부문에서 아사다 마오는 뛰어난 선수이다. 어린 나이에 주니어대회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연기가 생생한데 국제대회에서도 거침없는 연기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얼음판 위를 지쳐나가는 아사다 마오의 자태는 매력적이다. 더구나 트리플 악셀 점프를 성공하고 유연하게 회전하는 모습은 최고의 곡예가 갖는 미를 전해준다. 아사다 마오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회수를 보면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일본 챔피언대회와 각종 국제대회의 우승 기록만 30회나 된다.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징표이다. 아사다 마오는 피겨 스케이팅 세계에서 안타까움을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했던 벤쿠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지 못했다. 그 이후 여러 대회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더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종전이 되자 고향 안동으로 낙향, 임진왜란 동안 보고 들은 사실을 책으로 기록했다.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을 가장 사실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전적류임에도 불구하고 국보 제 132호로 지정돼 있다. 책제목 '징비'는 중국고전 시경 소비편에서 따온 말로, 징(懲)은 '지나간 일을 경계한다', 비(毖)는 '뒷날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징비록은 훗날 필사본 형태로 일본에도 전해져 열도 서사문학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객관적이면서 폭넓게 기록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병조판서(오늘날 국방장관)였다. 이후 선조가 평양에 이를 때는 영의정겸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됐다. 조선시대 도체찰사는 전시에 임명되는 총사령관으로, 군정을 물론 민정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런 환경에서 쓰여진 징비록에는 유성룡 자신과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대화 내용까지 수록돼 있다. 유성룡은 왜군의 조총(鳥銃) 위력을 꽤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그 이후의 진행과 관련해서 충북의 인물과 지명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세종대왕과 청원 초정약수, 복천암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협찬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한글 저술과 관련이 있는 최세진, 최석정, 박세무 등은 모두 충북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이다. ◇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조선 전기 초정약수를 찾은 임금은 세종과 세조다. 이중 세종은 행궁을 짓고 눈병 치료를 위해 초정에 100일 넘게 머물렀다. 실록은 재위 26년(1444년) 초수에 행궁을 짓고 같은 해 3월 2일부터 4월 30일까지 58일간, 그리고 같은 7월 15일부터 9월 14일까지 59일 등 총 117일간 머물렀다고 적고 있다. 세종대왕이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몰두했는가를 둘러싸고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실록으로만 보면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당시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이다.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시는 데도(…) 계달하는 공무에 이르서도 또한 의정부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치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중국 명나라 원병들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데 분명히 공헌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주둔지 한반도에 적지 않은 폐해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백성들은 그들의 말발굽 아래 놓이면서 약탈의 대상이 됐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쇄미록 1593년 음력 5월 8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또 들으니 중국군사가 호남으로 내려간 곳은 길가 민가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끝이 없어 마치 적의 변을 당한 것과 같고...' 쇄미록의 또 다른 일기에는 '노비 덕노가 닭을 면포와 바꾸기 위해 서울로 갔다가 중국 군사들이 말을 빼앗아기고 이를 되찾기 위해 항변하다 심하게 얻어맞았다'라는 내용도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인 '하물며 이미 철수한 중국 병사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자 수천 리의 지방에 어느 곳이고 그 해독을 받지 않는 곳이 없어서 백성들이 가슴을 치며…'라는 표현이 보인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중에 팽신고(彭信古)라는 인물이 있다. 특히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약탈행위가 심했다. 당시 사관이 그에 대해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악평했다. '원래 적을 토벌할 뜻은 없이 공리(功利)만을 위해서 온 자이
전쟁은 참혹한 것으로, 인간심리의 여러 단면들이 노출된다. 임진왜란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른바 가왜(假倭), 부왜(附倭), 항왜(降倭) 현상을 낳았다. 가왜는 내국인 즉 조선인이 왜군을 가장해 노략질했던 사건을 말한다. 우리고장 영동이 외가인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쇄미록'의 1593년 음력 7월 14일자 일기를 이렇게 썼다. '구례를 분탕질한 적은 왜적이 아니고 곧 우리나라 사람이 왜적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왜인의 목소리를 냄으로 목책을 지키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고 거기 사는 백성들도 이 까닭에 놀라 움직여서 역시 모두 도망해 달아나니….' 비슷한 현상으로 숨진 우리나라 사람을 왜군의 시체로 변장시켜 정부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기록정신이 유별났던 오희문은 쇄미록의 1592년 음력 9월 13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진 밖의 망대에서 숙직하는 왜병을 쏘아 죽이고 머리를 베어다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다시 들으니 사실은 왜병이 아니고 무주 백성이 목화를 따고 있다가 적에게 죽어서 버려두고 거두어 가지 않았던 시체를 그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베어가지고 왔는데 의병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진짜 왜병이라고 하여 순찰사에게 바쳤다고
◇ 양복의 등장 문헌상 '양복'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76년(고종 13)이다. 척화파의 거두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양복'(洋服)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지금 기어든 왜인들은 양복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今倭之來者 服洋服 用洋砲 乘洋舶 此倭洋一體之明證也. 柰之何爲其所瞞哉)- 그러나 양복을 실제 착용한 인물은 보은출신 어윤중 등이 포함된 신사유람단이었다. 당시 조정은 1881년 일본에서 신식문화를 배우기 위해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으로 신사 유람단을 조직, 일본에 파견했다. 당시 양복은 문명 개화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착용한 것이라 해서 '개화복'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개혁을 시도했던 김옥균(金玉均·1851~1894)은 갑신정변(1884)이 3일 천하로 돌아가자 힘을 빌리고자 했던 일본으로 망명했다.(사진참조) 이때 양복을 입고 인천항에서 배를 탄 것으로 고종실록이 기록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및 생도 10여 인은 모두 일본 공사관에 몸을 숨
진천군 초평면 양촌마을에 완위각(宛委閣)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여러 용도의 7동 한옥으로 구성된 조선후기 전통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상당부분 망실, 사랑채 1동만 존재하고 있다. 완위각의 최초 건립자는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다. 그는 속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기사환국으로 정국이 어지러워자 더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기사환국은 장희빈 아들의 원자 책봉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남인이 숙종의 환심을 사 서인을 대거 몰아낸 사건을 말한다. 그는 선대 고향인 초평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이때 건립한 건물이 완위각으로, 당시에는 만권루라고도 불리었다. 조선 후기에는 장서각을 겸한 사립 도서관이 존재했다. 이정구의 월사고택, 유명천의 청문당, 유명현의 장성당 등이 그것으로, 조선 4대 사립 장서각으로 불렸다. '두타초'(頭陀草)라는 이하곤의 저서를 보면 당시 완위각에는 의학, 천문, 지리, 서예, 그림 등과 관련된 책이 1만권 가량 보관돼 있었다. 책이 워낙 많다보니 당대 문인과 각계 지식인들이 이하곤의 진천 초평의 완위각을 찾아 토론을 즐겼다. 화가였던 정선·윤두서(尹斗緖)와도 교유했다. 따라서 그의 문집에는 윤두서의 자화상과 공재화
1. 일본 우경화를 확산시킨 역사소설가 시바료타로 일본인의 한국관을 지배하는 것이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이다. NHK는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 2009년 11월부터 3년에 걸쳐 열광 속에 방영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표현한 이 드라마로 일본사회엔 극우파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 소설 제목에서 따온 박물관 이름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중심가에 잘 설계된 박물관이 하나 있다. 설계자는 '빛의 교회' '물의 교회' '히메지문학관' 등을 설계한 뛰어난 건축가 안도 다다오. 제주도 섭지코지에도 그가 설계한 글라스하우스와 지니어스하우스가 있다. 박물관의 이름은 시바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 이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설계자는 미래의 인류 문화유산이 될 여러 건축물을 남겨준 세계적인 건축가이고, 박물관에 전시된 인물은 일제 침략을 미화해서 아시아인이 경멸하게 된 인물이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짝이 될 수 있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시바료타로(1923~1996, 본명 후쿠다 테이이치)는 소설가로만 보면 대단한 사람이다. 문예춘추사에서 나온 전집이 68권, 단편전집
조선시대 노비의 종류는 의외로 많았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양반가에서는 이런 노비를 경제적인 시각으로도 분류했다. 별득노비, 구활노비, 환퇴노비, 전당노비 등의 명칭이 이에 해당한다. 별급노비는 과거급제, 생일, 병간호 등 특별한 사유로 인해 받는 일종의 '선물형 노비'를 말한다. 넓은 의미의 상속 노비로 볼 수 있다. 구활노비는 기근, 질병, 이산가족 등의 이유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을 거두어 먹여살리는 대신 노비로 삼은 경우을 일컫는다. 환퇴노비는 매도를 했지만 '어떤 이유'로 본래의 집으로 환원된 노비를 말한다. 이때의 어떤 이유로는 문중 동의없이 몰래 팔았다가 들통난 경우, 보이지 않던 질병이 발견된 경우, 새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경우(일명 완노비) 등이 있다. 이밖에 전당노비는 쌀, 곡식, 돈 등을 빌리기 위해 담보로 제공한 노비를 말한다. 식사를 전담하는 여종은 취비(炊婢) 또는 주비(廚婢)라고 불렀다. 취비는 문자 그대로 '불을 때는 여종', 주비는 '부엌노비'를 의미하고 있다. 이들은 밥에 돌이 섞여 있거나 밥찬이 정갈하지 않을 경우 양반에게서 손찌검을 당하곤 했다. 괴산 이문건의 누에치기 기술은 전문가 경지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뎅이만 아구같이 찢어진 중 알었등마, 아새끼 말버릇두 오지게 싸가지 없네." 장두식은 앉은 자리에서 여유있는 자세로 상대방의 위세를 잡도리하였다.- 충북대 국어문화원이 청주대와 공동으로 주최한 '충청북도 언어문화축제'가 얼마전 지역 학생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학내에서 열렸다. 특히 이날 언어문화축제에는 흔치 않은 주제인 '문학 속의 충북 방언' 코너가 소개돼, 참석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서두에 인용된 문장 중 명사의 대부분은 사투리 표현을 하고 있다. '주뎅이', '아구', '아새끼', '오지게', '싸가지' 등은 모두 표준어가 아니다. '주뎅이'는 '주둥이', '아구'는 '아귀', '아새끼'는 '어이새끼', '싸가지'는 '싹수'가 표준어이다. 흔하게 접하는 '아구찜'은 표준어 규정상 '아귀찜'으로 적는 것이 맞다. 이밖에 '아새끼'의 표준어인 '어이새끼'는 '짐승의 어미와 새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잡도리'는 일본어와 합성된 것 같지만 순우리말로, 단단히 준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반면 비슷한 어감을 지닌 '단도리'(だんどり)는 순수 일본어이다. '오지게'는 형용사 '오지다'에서 파생한 부사로, '오달지다'가 기본형이다. 이와 관련해 충북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