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청주읍성을 마지막으로 수축(보수)한 내용이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사료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따라 청주읍성은 각 문루(門樓)의 칸 수, 여장 높이, 보초소 수 등 기존에 알져지지 않았던 여러 제원을 마치 '설계도'를 보듯 정확히 아는 것이 가능해졌다. 지난주 청주 성안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청주읍성 복원과 관련된 세미나에는 '일성록'이라는 1쪽도 안 되는 짧은 원문사료가 공개됐으나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 본보가 이를 분석한 결과, 사료 '일성록'에는 청주읍성 마지막 수축에 대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면서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동안 청주읍성에 대한 마지막 수축 내용은 '정조실록 10년 6월 3일 5번째 기사'에 등장하면서 지역 학계가 이 부분을 많이 인용해 왔다. 그러나 그 내용이 '청주성을 수축하였다. 전 병사 김영수가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사 구세적이 모두 수축하였다. 둘레가 1천 4백여 보(步)였다'가 전부여서 읍성 어느 부분을, 어떤 방법으로 수축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성록 상의 청주읍성 마지막 수축 사업은 당시 충청병사를 차례로 역임한 김영수와 구세적의 근무기간을 추적한
전회에 '대뢰'(大牢)를 언급했다. 대뢰는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소는 보통의 소(牛)가 아닌, 집에서 기르던 소(牢)를 의미했다. 그래서 '牢' 자는 집을 의미하는 '갓머리변'에 '牛' 자의 결합으로 돼 있다. 청주향교에서 대뢰를 둘러싸고 상소문 올리는, 어찌보면 해프닝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조가 대뢰를 잡아 제를 올린 이후, 청주향교는 이를 그곳만의 전통제사로 삼은 것 같다. 그러나 광해군대 이르러 농우(農牛)가 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잡는 제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러자 당시 '우방'이라는 청주향교 유생이 이런 상소문을 올린다. '우리 세조 충장대왕께서 본 고을에 어가를 머무시어 몸소 성인의 묘당에 제사를 하심에 대뢰를 쓰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로는 법제를 이루었으니 해마다 희생에 쓸 소를 사서 먹이어 봄 가을에 배향을 지냈는데 호조가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희생소를 줄였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옛예법이 바뀌어 버리니 우리세조께서 제수우를 사용하여 남기신 뜻도 오늘부터 없어질 것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찌 소를 양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세조대왕의
청주향교의 제기(祭器) 46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한 사실이 얼마전 본보를 통해 알려졌다. 전통시대 전국의 향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성현·선현에 대한 제사이고, 또 하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향교는 그 고을에서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청주향교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書院)도 비슷한 기능을 지녀 혼란을 주고 있으나 향교는 국립 교육기관,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에 위치한 청주향교는 이른바 5성, 송조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를,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이밖에 우리나라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고려사는 기록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충청도 지역 마형대구(馬形帶鉤)는 왜 4세기쯤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진 것일까. 지속적인 발굴사업와 함께 출토유물이 증가하면서 마형대구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도 누적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 마형대구 문화는 △초기철기 시대를 전후해 존재했고 △그 용도는 실용품이기보다는 위세(장식) 성격이 강하며 △밀랍 주조법으로 제작됐다는 견해가 강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는 제조법을 제외한 나머지에 성격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남대 박장호 씨가 논문 '원삼국시대의 동물대구의 전개와 의미'에서 청주 봉명동 유물을 지목, "착장할 때 고리를 묶었던 노끈이 함께 출토됐다"며 "이는 마형대구가 장식품이 아닌 실생활에 사용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세종시 용암리 가마골 유적에서 발견된 마형대구 고리부에는 철로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며 "장식품이었다면 굳이 다른 금속재료로 수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궁금증은 과연 무덤에 묻힌 피장자가 마형대구를 허리에 찬 채로 묻혔는가, 아니면 허리에 차지 않고 별도로 부장됐는가 여부이다. 종래에는 허리에 착장했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박 씨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상당수
청주읍성의 성돌 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 요소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과 청주읍성에 얽힌 내용이 최고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보는 성돌찾기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청주읍성에 대한 스토리텔링 요소를 찾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등 1차 문헌사료를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그 결과,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서 유배를 떠나는 1년 사이에 청주읍성에 대한 스토리텔링 요소가 가장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양녕의 스토리텔링 요소는 크게 △애첩 '어리'(於里)와의 사랑 △세자 폐위 △청주읍성에서의 1년 유배생활 △형을 보살피는 동생 세종대왕의 우애 △법치를 주장하는대신들의 상소 등 5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양녕의 여러 기행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이른바 기첩 '어리'의 사건으로, 그는 남자가 있던 기첩 어리를 빼앗아 궁궐로 몰래 데려오고 급기야 아기까지 갖게 했다. 이후 성밖에서 아기를 낳게 하고 다시 궁궐로 몰래 들여와 살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에게 발각돼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다른 집에 좋은 개(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몰래 가져오
본보는 청주읍성 성돌이 탑동 양관을 짓는데 사용됐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관리부재 상태의 청주옥의 석부재도 양관 건축에 사용됐다. '감방(조선시대 전통옥 지칭)은 절반이 거의 무너져가는 온돌로 되어 있어 (…) 이러한 이유로 유치인이나 수인이 집을 부수고 도망이 계속 일어나 도망치면 잡히고 잡혀서는 다시 도망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이와는 별개로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청주읍성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丙辰四月日畢役' 명문이 새겨진 성돌을 수습한 바 있다. 직역하면 '병진년 4월에 공사를 마쳤다'는 뜻이다. 기년상 조선후기 병진년에 해당하는 해는 1736년(영조 12)과 1796년(정조 20)이다. 이와 관련 지역 한 사학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청주읍성이 일부 허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개·보수가 이뤄져 1736년에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이인좌가 청주읍성을 접수할 때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는 적지 않았다. 무기를 숨겨 상여에 숨겨 몰래 들어왔고, 또 내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적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
청주향교(전교 이종한)가 얼마전 전통 유교식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祭器)를 46점이나 도난당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들 제기류는 비지정문화재이기는 하나 조형성이 우수하고 도지사와 청주시장 등이 초헌관으로 참여하는 석전대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때문에 청주향교측은 곤혹스러워 하는 가운데 조속히 돌려줄 것을 바라고 있다. 문화재청은 도난문화재가 발생할 경우 이를 즉각 공개·수배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목록에 청주향교 석전용 제기류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이 쫓고 있는 제기류는 8종 46점으로, 지난해 10월 20~25일 사이에 보관 중이던 대성전 좌측건물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난당한 8종의 제기는 '보', '궤', '희준', '상준', '작, '점', '산뢰', '용작', '촉' 등으로, 유기(鍮器)로 유명한 경기도 안성에서 특수 주문·제작했다. 특히 이들 제기류는 청주향교가 조선시대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내용대로 형태와 무게 등을 주문한 것이에서 일반집 제기와는 격과 조형성을 달리하고 있다. '보'는 벼(쌀)를 담은 제기로 궤와 합쳐 한 벌이 되며 네모 모양이다. '궤'는 수수·피를 담은 제기로 보와 합쳐 한 벌이되며 둥근모양
청주시와 민간단체 등이 합심이 돼 청주읍성 성돌을 찾는 노력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까지 재작년부터 발굴조사를 하면서 옛 남궁병원에서 40개, 서문자리에서 20개, 남주동 개인주택 디딤돌 60여개 등 총 120여여개를 확보내지 확인했다. 본보의 보도에 의해 청주 탑동의 6개 양관 중 4개 건물에서 주춧돌, 기단석 등으로 대량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으나 양관 자체가 도지정 문화재에서 회수는 사실상 어렵다. 청주성과 관련된 표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685년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5년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5년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다.' 역사상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인 셈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에는 '서원경에 성을 쌓았다'라는 표현이 문헌적으로 분명하게 등장한다. 이때가 서기 689년이다. '9년 가을 윤 9월에 왕이 장산성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에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서원경 성벽을 쌓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도 자세히 등장한다. 삼국사기 권47 '열기'라는 인물의 열전은 이렇게 쓰여 있다. '구근(仇
"신라금관은 시베리아 북방 이주민이 가져온 것도 아니고, 또 그들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신라금관은 신라인이 만들었을 뿐이다." 상명대학 박선희 박사가 지난주 충북대박물관 제 19기 과정에서, ‘한국 금관문화의 창조력과 아름다움’제목의 특강 시간을 가졌다. 박 씨는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심심찮게 제기됐던 ‘신라금관= 북방민족 영향설’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신라금관은 △마립간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에서만 출토됐고 △관장식에 사슴뿔 모양이 가지가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금속을 잘 다뤘던 시베리아 스키타이나 알타이 종족이 동해안을 타고 내려와 금관을 만들었거나, 그들의 문화가 전파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가 존재해 왔다.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시베리아 지역에는 한반도와 달리 사슴이 많기 때문에 금관에 자연스레 사슴뿔 모양의 조형장식이 들어갔다고 봐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라 마립간 정권= 시베리아 북방민족 이주민’을 인정하는 것으로, 당사자들도 이를 확대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박씨는 이날 특강에서 다양한 논리를 내세우며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먼저 그는 "신라금관은 고조선 것을 계승한 순수 한민족 문화의 산물"이라고
경북 상주시가 추진 중인 문장대 온천개발 사업과 관련해 2백50여년 전에 제작된 김정호(金正浩, ?~?)의 대동여지도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가 최소한 3가지의 인문지리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문장대 온천개발을 계획 중인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와 중벌리 일대의 수계가 경북의 땅이면서 왜 낙동강이 아닌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현대의 지도로는 이같은 사실이 잘 느껴지지 않으나, 대동여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단숨에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청화산(靑華山)-문장대(文藏臺)로 연결되는 산줄기를 굵은 선으로 묘사했다.(그림 화살표) 바로 그 산줄기가 한반도 백두대간이라는 뜻으로,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곡선)가 굵은 선을 경계로 분수(分水)되고 있다. 이에 비해 문제가 되고 있는 문장대 온천계획지구는 백두대간 이서(以西, 붉은원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일대는 경북에 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계는 남한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주시는 이 점을 의식해 제 2안으로 "오염수를 남한강 수계가 아닌, 밤티재를 넘어 낙동강수계로 인위적으로 배출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