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대체로 꼬리가 긴 새에는 '새 鳥', 꼬리가 짧은 새에게는 '새 추'(나무木없는 椎) 부수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전자의 예로는 '갈매기 鷗'(구), '닭 鷄(계), '비둘기 鳩'(구), '소리개 鳶'(연), '고니 鵠'(곡) 자 등이 있다. 반면 후자의 예로는 '참새 雀'(작),' 기러기 雁'(안), '병아리 雛'(추) 자 등이 있다. 꿩의 수컷은 '장끼', 암컷은 '까투리'라고 한다. 이중 장끼는 깃털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꼬리가 눈에 띄게 긴 편이다. 이에 비해 까투리는 색이 덜 화려하고 꼬리는 짧은 편이다. 꿩의 한자는 '雉'(치)로 적는다. 꼬리가 짧은 까투리를 기준으로 하면 '雉' 자가 맞아 보이지만, 꼬리가 긴 장끼와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한자의 혼란상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꿩의 꼬리를 머리 장식으로 즐겨 사용했다. 그것도 단순한 사용이 아닌, 신분과 위계를 드러내는데 주로 사용했다. 중국 역사서인 위서(魏書) 열전(列傳)의 고구려조에는 '머리에 절풍모를 썼는데 그 모양이 변형을 하였다. 새깃을 꽂았는데 귀천의 차이가 있었다(頭著折風 其形如弁 旁揷鳥羽 貴賤有差)'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벼슬이 높은 자는
전회 언급한 옥천 이원면 적등진(赤登津)은 교통량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경상도 김천과 지레 사람들이 한양을 가려면 반드시 적등강 수변에 위치한 나루를 통과해야 했다. 바로 '적등진'으로, 그 루트는 영동-옥천-보은-청주가 됐다. 적등진은 이 루트 중 영동-옥천 사이에 위치했고 그 옆에는 적등원과 적등루도 존재했다. 적등진 주변은 지금도 풍광이 매우 빼어난 편이다. 이 때문인지 뭇 문객들이 적등루(赤登樓)를 찾아 시를 많이 읊었다. 고려말 사대부 출신인 조준(趙浚·1346∼1405)은 정도전과 함께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이다. 특히 그는 경제이론에 밝아 당시 세법의 근간이 되는 과전법을 입안했다. 그도 적등루를 올랐다. '황급한 6월달 3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누가 계교를 얻었던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 서두에 언급한 것과 달리 적등루가 한가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직(李稷·1362~1431)이 지은 시에는 적등루 일대가 대단히 혼잡하게 그려져 있다.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
문화가 권역을 이루는 데는 산줄기뿐만 아리나 물줄기도 큰 영향을 미친다. 백두대간은 충청도와 경상도 문화권을 구분하고 있다. 충북은 다시 남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권으로 나눠지고 있다. 이것의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는 이른바 한남금북정맥이다. 전븍 장수 신무산(神舞山·897m)을 본류 발원지로 하고 있는 금강은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 연기, 공주, 부여, 논산, 강경 등 10여 개의 지역을 거치며 397㎞를 달린 끝에 서해에 도달한다. 현재 지류는 '하천', 본류가 되는 수계는 '강'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곰나루'(웅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 '금강'도 그런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 그러나 전통시대에는 금강은 구간별로 다르게 불렀다. 영동 심천을 통과하는 금강은 지프내(심천), 옥천 이원에서는 적등강(赤登江),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불렀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수계에 딸린 나루터(津)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 그 근원이 전라도(全羅道)에서 나와 양산(楊山) 서쪽을 지나 영동현(永同縣)에 들어가고, 이산현(利山縣)에 이르러 적등진
한자 '炙'(적)은 '저녁夕' 자 비슷한 것과 '불火' 자로 구성돼 있다. 이때 전자는 고깃덩어리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炙' 자는 고깃덩어리를 불 위에 굽는 모습이 된다. 중국 동진(東晋)의 간보(干寶)가 지은 수신기(搜神記·4세기 무렵)에는 '강자(羌煮)와 맥적(貊炙)은 이민족의 음식이다. 중국이 이것을 숭상하여 귀족과 부잣집에서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먼저 내놓는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중 후자 '맥적'은 부여의 구이음식을 지칭하고 있다. 흔히 만주지역의 예맥족을 우리민족의 역사시대 시원으로 보고 있다. 예맥족할 때의 '맥'은 그런 역사적 배경하에 수신기에 등장했다. 중국 후한때의 역사서인 '석명'(釋名)도 '맥적은 고기를 통으로 구워 각자가 칼로 잘라가면서 먹는 것으로, 호맥(胡貊)에서 온 것'이라고 적었다. 이때의 호맥 역시 부여족을 일컫고 있다. 이처럼 우리민족의 구이문화는 문헌상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삼겹살 구이도 분명히 불에 집적 굽는 직화(直火) 음식의 한 종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불판에 굽는 삽겹살 문화'는 역사가 매우 짧은 1970년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서 보듯 1960년대 이전에는 돼기
조선시대 내섬시(內贍寺)라는 내직 기구가 있었다. 내섬시는 호조 소속으로 궁중에 공급되는 각종 물품을 관리했다. 세종대 내섬시에 근무하면서 고문헌에 자주 등장했던 인물로 김흔지(金사람인변+完之)가 있다. 세종은 보위에 오른지 20년이 넘으면서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렸다. 이중 안질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때문에 세종은 1444년에는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봄·가을에 걸쳐 두번이나 찾게 된다. 이때 초정약수와 관련된 일을 전담한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김흔지이다.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별장식으로 머무는 곳을 행궁, 또는 이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임금이 행궁으로 향하는 움직임은 '행차'가 아닌 거둥으로 표현했다. 1444년 음력 1월 27일 우리고장 초정약수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木川縣)과 전의현(全義縣)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리고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전회에 우리고장 진천 문백면 한계마을이 고향인 강백년(姜柏年·1603∼1681)을 설명한 바 있다. 그가 지은 '청춘에 곱던 양자'라는 시조는 주군(임금)에 대한 일편단심을 시로 잘 승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는 받고 있다. 국문학 전공자들은 그의 시조뿐만 아니라 한시도 크게 주목을 하고 있다. 이중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해동시선에 실려 있는 '산행'(山行)이다. 해동시선의 저자는 조선말기 지식인인 이규용(李圭瑢)다. '십리를 가도 인적이 없고 / 텅 빈 산에 봄새만 우네. / 스님 만나 길을 물어 보았으나 / 스님가자 길이 다시 헷갈리네.' 원문은 '十里無人響 / 山空春鳥啼 / 逢僧問前路 / 僧去路還迷'로 돼 있다. 시골 산길의 조용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듯이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無人響', '山空' 등의 시어는 적막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이명한(李明漢·1595~1645) 있다. 두 사람은 8살의 나이차가 났으나 필담을 나눴다. 강백년이 8살 적다. 이명한이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자 강백년은 다음과 같은 시로 마중했다. '풍진 세월에 늙어 품은 계책 어그러졌는데 / 오늘 눈 속에서 그대 돌아감을 부러워하네 / 헤어짐에 봄
도토리묵밥과 도토리전. 도토리와 관련된 식품은 지금은 별미내지 다이어트식으로 많이 찾지만 전통시대에는 달랐다. 도토리는 우리나라 전통시대 때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대표적인 구황식품이었다. 문헌상 도토리가 구황식품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4세기 후반의 고려 충선왕 때이다. 충선왕은 흉년이 들자 반찬수를 줄이고 손수 도토리 맛을 봤다. '이달에 왕이 흉년에 백성이 굶주림으로 반찬을 줄이고 내주(內廚)에 명령하여 도토리를 바치게 하여 맛보았다.(是月 王以歲凶民飢 減膳 命內廚進橡實 嘗之)'- 고려 후기를 산 인물로 윤여형(尹汝衡·?~?)이 있다. 그는 벼슬이 높지 않았으나 고려후기의 부조리한 사회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의 시 '橡栗歌'(상율가)에 그같은 일면이 잘 드러나 있다. '상율'은 직역하면 '상수리 밤'이라는 뜻으로, 도토리를 지칭한다. '촌집 늙은이 마른 밥 싸 가지고(村家父老裏O糧) / 새벽에 수탉 소리 듣고 도톨밤 주으러 가네(曉起O取雄鷄聲) /…/ 온종일 주워도 광주리에 차지 않는데(崇朝O拾不盈筐) / 두 다리는 동여놓은 듯 주린 창자 쪼르륵(兩股束縛飢腸鳴) / 날 차고 해 저물어 빈 골짜기에 자네(天寒日暮宿空谷)'- 칠언고시 형식인 이 한시
조선시대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기구로, 그 으뜸은 종3품 당상관인 대사간(大司諫)이다. 당상관은 정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리로, 지역하면 정사를 논할 때 堂에 오를 수 있는 품계를 말한다. 그 반대말은 당하관이다. 조선 효종 때의 대사간의 한 명으로 강백년(姜柏年·1603∼1681)이 있다. 그가 바로 전회에 언급한 표암 강세황의 할아버지다. 1648년 이른바 강빈(姜嬪) 신원 사건이 일어났다. 강빈은 소현세자의 빈으로,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7년에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를 미워한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후원별당에 감금됐다가 끝내 사사됐다. 이 여파로 그녀의 친정어머니마저 처형되고,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그 중 석철·석린 형제도 의혹 속에서 죽고 말았다. 강백년은 대사간 입장에서 강빈의 신원(억울함을 풀어줌)을 간언했다. 말이 간언이지 인조의 최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강백년은 우리고장 청풍군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종6품인 점을 감안하면 품계가 수직 강하한 셈이다. '황감을 대사간으로, 김식을 헌납으로, 최후윤을 정언으로, 홍우원을 봉교로 삼았다. 상이 특명으로 부제학 이기
"그는 그림을 통해 문인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때문에 그는 평생 속기(俗氣)없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미술 평론가들이 영·정조 시대의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을 평한 글이다. 그는 39살 때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부탁을 받고 그린 '도산도'(陶山圖)의 제발(題跋)을 이렇게 적었다. '제발'은 서화 두루마리나 첩책 말미에 기록한 그 감상록을 말한다. '그림은 산수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크기 때문이다. (…) 또 직접 보지 못한 지역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억측으로 닮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술 평론가들은 강세황의 이같은 창작 태도를 '와유'(臥遊)와 '사의'(寫意)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됐다고 밝히고 있다. '와유'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이르는 말이다. 반면 '사의'는 사물에 의탁하여 도(道)와 진(眞)에 이르고자 하는 뜻을 의미한다. 강세황 작품에 대한 '한국적 남종문인화' 혹은 '남종문인화의 토착화'라는 표현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강세황의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강백년(姜柏年)이고, 아버지는 대제학을 지
한국지적협회(회장 오현진·청주대 명예교수·사진)가 지난 27일 청주시 사천동 봉화빌딩에서 이전 개소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특히 이날 개소식은 전국단위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청주로 이전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 주목을 받았다. 지적 (地籍)은 토지의 위치, 형질, 소유 관계, 넓이, 지목(地目), 지번(地番), 경계 등 토지에 관한 제반 사항을 등록하여 놓은 기록을 말한다. 이날 개소식에서 오회장은 앞으로의 활동 방향으로 △지적에 대한 기술과 제도 연구 △지적 기술자의 교육연수 및 경력관리 △회원 윤리 확립과 복리증진 등을 강조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지난해 지적재조사특별법이 공포되면서 새로운 지적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며 "일부에서는 지적을 공간정보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려 하지만 공간정보의 뿌리이자 요체는 앞으로도 지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반에 다소 생소한 공간정보는 지리정보시스템(GIS)을 기반으로 지적도 위에 건물정보와 건물 위치, 층수, 용도, 구조, 면적 등 행정정보를 함께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지적인의 교육 등에 대해서는 "지적제도의 미래지향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과학적 품성을 지닌 지적 공무원과 지적기술자를 양성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