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폭염현상에는 기상 상식도 잘 안 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철 한낮기온은 열섬현상이 일어나는 도심지역이 지열이 상대적으로 낮은 시골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내륙 산간지역으로 도심과 거리가 먼 단양 영춘지역이 연일 충북의 한낮 최고기온을 수립하고 있다. 영춘지역은 8일 35.8도(오후 2시 46분 현재)를 기록, 이날 도내에서 한낮 최고기온이 가장 높게 올라갔다. 이밖에 가곡지역은 35.0도(오후 3시 53분)를 기록, 이날 도내 두번째 높은 기온 분포도를 보였다. 은 8일 오후 충북도내 한낮 최고기온에 대한 분포도로, 다른 지역보다 짙은 색으로 나타나는 곳이 각각 영춘(오른쪽 상단)과 가곡(왼쪽 하단)이다. 청주기상대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기상이론으로 설명했다. 기상대 관계자는 "중국 쪽에서 서풍내지 남서풍 계열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동쪽으로의 이동거리가 길수록 공기가 더 더워진다"며 "충북의 가장 동쪽에 해당하는 단양 영춘지역이 최근의 폭염에서 연일 한낮기온을 나타내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 한반도 전체를 봐도 울산, 포항, 영덕, 강릉 등 서해에서 상대적으로 먼 동해안 지역의
조선시대 지방의 도로는 형식상 공로(公路)와 사로(私路)로 구분됐다. 공로는 관료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니는 길을 말한다. 가령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충주를 순력하려면 청주-청안-괴산-음성-충주 등의 공로를 택했다. 반면 사로는 장돌뱅이들이 오갔던 길로, 상로(商露) 혹은 간로(間路·샛길)라고 불렀다. 국가의 동맥으로 오늘날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길은 '대로'(大路)라고 표현했다. 시대별로 기준은 다소 달라, 6대로, 9대로 혹은 10대로 등으로 분류됐다. 신경준(申景濬)은 '도로고'(1770년·영조 46)에서 전국의 대로를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로 가는 길은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제4로, 제주 제5로, 강화 제6로 등으로 각각 명명했다. 같은 해 홍봉한(洪鳳漢)은 왕명을 받아 저술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 전국의 대로를 국왕이 있는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 제 1로, 경흥 제 2로, 평해 제 3로, 동래 제 4로, 상주→통영 제5로, 삼례→통영, 제 6로, 해남→제주 제7로, 갈원→보령 제8로, 강화도 제 9로 등으로 분류했다. 반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한양∼의주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세종은 재위내내 여러 질환을 앓았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한 탓인지 안질을 심하게 앓았다. 때문에 세종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해 정사의 상당부분을 3정승이 처리토록 했다. '의정부서사제'는 3정승이 국정을 논하고 또 왕의 재가를 받아 정치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은 첨사(詹事)제도라는 것도 신설해 세자(후에 문종)의 정사 결재권을 크게 확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회를 할 때 세자에게 '남면수조'(南面受朝)하도록 했다. 남면수조는 말 그대로 남쪽을 바라보면서 조회를 받는다는 뜻으로, 사실상 국왕에 준하는 대우였다. 모두가 세종의 건강 때문에 비롯된 것들이었다. 세종 재위26년(1444) 청주에서 '호초맛 나는 물이 있다'는 첫 보고가 올라왔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과 전의현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 다음은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라는 문장이 이
역사에 있어 '가정'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개혁군주 정조(正祖·1752~1800)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조선의 운명이 바뀔수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정조는 말년에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인 절후(癤候)라는 악질을 심하게 앓았다. 정조는 병세가 최고의 위험수위에 달할 무렵 약원(藥院)의 신하인 심인과 정윤교를 불렀다.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잠을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요자리에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종기 자리가 어떠한지 궁금하므로 경들을 부른 것이다."- 이때 약원의 두 신하가 약이 되는 음식으로 권한 것은 '푹 곤 붕어의 국물'이었다. "피고름이 이처럼 많이 나왔으니 근이 이미 다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앞으로는 원기를 보충하는 면에 한층 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부어고(附+魚魚膏)를 본원에서 봉하여 올리겠습니다."- '부어고'가 바로 푹 곤 붕어의 국물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부어' 혹은 '즉어'(魚+卽魚)로 적었던 붕어는 음식을 넘어 약재로도 많이 인식됐다. 조선후기 인물로 우리고장 단양군수를 지낸 홍만선(洪萬選·1643~17
원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속국 고려의 임금을 자국영토 후미진 곳으로 귀양보내기도 했다. 고려 27대 임금인 충숙왕도 그런 신세가 됐다. 그는 원나라 조정의 미움을 사 수도 연경에서 1만5천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가야했다. 익재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世事는 시끄러워 귀담을 수 없는데 / 다리 위에 말 멈추고 할 말을 잊었노라 / 언제나 태양은 내 마음 밝힐지 / 푸른 산 바라보며 눈물지누나 / 내 언제 믿음을 저버렸던가 / 이국에서 헤매어도 은혜는 아네 / 내 몸 날개 없어 날아가지 못하고 / 슬프다 나 홀로 애만 태우네.'- 이처럼 익재는 고위 관료로서 뿐만 아니라 명문장을 남긴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작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나머지 8점의 익재영정을 그린 사람과 시기는 각각 다르다. 보은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보관돼 있던 익재 영정은 한번 도난을 당한 후 현재는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보관돼 있다. 자산영당 익재영정은 그의 직계후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사균(李思鈞·1471∼1536)이 화공에 의뢰해 제작했다. 연산군 10년(1504) 이른바 폐비윤씨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연산군은 이 시기기에 이르러 생모
40. 일본군에 이식한 독일 동원사단 편제 ■ 독일의 군단급 야전훈련 참관1884년 8월 29일 독일제국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육군경 일행이 근위군단의 전투연습을 참관하도록 허락하였다. 이 연습은 크리스트 군단장이 지휘하고 근위보병 제1사단과 제3사단이 참가한 대규모 훈련이었다. 동군과 서군이 역할을 설정해서 공격과 방어를 맡았는데, 2개 여단과 야포연대, 그리고 기병사단과 저격병대대가 동원되었다. 공병중대와 병참중대까지 참여한 본격적인 전투훈련은 놀랄 정도였다. 기록자인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 소장은 수백 미터 전방에 포진한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병들과 저격병의 공격 장면을 기록하였다. 또 중대 단위로 가상적의 공격을 막는 연습을 지켜보면서 야외숙영 모습까지 꼼꼼히 관찰하였다. 병사들은 각자 식품을 수령하여 조리해서 먹었고, 숙영지 주변은 바람막이를 해서 추위를 피하였다. 장교는 각자 개인 천막을 사용하였다. 흥미롭게 기술한 내용이 주보와 군악대였다. 주보는 병사들이 받은 봉급으로 음식물을 사먹도록 숙영지 근방에 두었다.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병사들이 쾌활하게 군가를 부르는 장면은 특이했던 모양이다. 근처 주민들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나와 함께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시문에 두루 능해 대가풍(大家風)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9개의 초상화를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른바 그의 호를 딴 '익재영정'들이다.이처럼 이제현의 초상화가 많은 것은 경주이씨 후손들이 그의 인물됨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많이 이모(移模)했기 때문이다. '이모'는 원작을 본떠서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9점의 이제현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본(국보 제 110호), 가산사 소장본(전남 문화재자료 164호), 구곡사 소장본(전남 유형문화재 189호), 수락영당 소장본(청원군 미원면 가양리·비지정), 구강서원 소장본(경북 문화재 제 90호), 장산영당 소장본(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72호), 용암영당본(충남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도동영당본(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기리), 도론영당본(전남 진도군 고군면 도섬리) 등이 있다.원작으로 평가받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8점의 작품중 우리고장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소장돼 있던 초상화가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현재 경주이씨 장산문중에서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이제현 초상화는 가로 96㎝, 세로 165㎝의 크기로 비단바탕에 그렸다. 그리고
술기운을 푼다는 의미의 '해장'은 '술'로도 풀 수 있고, 따근한 '국물'로도 풀 수 있다. 전자는 주당이 주로 하는 방법으로 '해장술', 후자는 일반인이 즐기는 방법으로 '해장국'이라고 표현한다. '해장술'은 문헌상 고려시대부터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해장술을 이렇게 노래했다. '해장술 느긋이 먹고 훈훈한 기운 볼에 가득하니(卯酒十分O滿O) / 연지 한 덩이 온 얼굴에 발랐는 듯(燕脂一顆抹渾顔) / 벌과 나비 나를 업신여기는구나(等閑蜂蝶應欺我) / 청춘을 헛보내면서 아직 느끼지 않는다고(虛度靑春尙未觀).'- 굳이 원문의 한자를 함께 실은 것은 특정한 낱말을 눈여겨 보라는 뜻에서 이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릴 정도의 조선시대 대문호이다. 그도 해장술에 얽힌 감정을 시로 남겼다. '깊숙한 주렴 장막에 낮 그늘은 기나길고(深深簾幕晝陰長) / 흰 갈옷 오사모 차림에 온몸이 서늘한데(白葛烏紗一頂O) / 해장술이 깨기도 전에 또 낮밥을 먹고는(卯酒未醒加午飯) / 돌아와서 방금 한바탕 낮잠에 빠져들었네(歸來方到黑甛鄕).'- 인용한 두 개의 시 원문에는 특정 낱말이 공통적으로 들
조선시대에는 강 이름을 구간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당연히 우고장 문화 젖줄의 하나인 금강도 이 범주에 속하고 있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은 금강의 각 나루, 즉 津(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 물은 황간ㆍ영동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대개 구역별 강이름은 나루의 이름의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등강은 옥천군 이원면 적등진 앞을 흐르던 강이고, '化仁江'(화인강)은 화인진 앞으로 흐르던 강이었다. 지금의 안내~안남면 수계로 볼 수 있다. '화인'이라는 예쁜 이름은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등장한다. '대천(大川)은 적등진이 이산현에 있고, 화인진(化仁津)이 군의 동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보은에 이르기 29리, 서쪽으로 회덕에 이르기 13리, 남쪽으로 무주(茂朱)에 이르기 29리, 북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3리이다.' 세종실
사라진 북한 지명 중에 '덕원'(德源)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의 문천시로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잘 모르면 원산 북쪽을 생각하면 된다. 1674년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자의대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남인은 1년(기년복), 송시열은 9개월(대공복)을 주장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논쟁은 하찮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입장에서 보면 형(소현세자)을 잃은 효종을 장자(長者·맏아들)로 볼 것이냐, 차자(次者·둘째)로 볼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으로, 1차와 달리 송시열은 이 논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유배를 간 곳이 서두에 언급한 함경도 덕원이다. 그러나 우암은 이 유배 때 그리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동생 '時燾'(시도)와 時杰(시걸)이 그곳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을묘년(1675, 숙종1) 1월에 진천(鎭川)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철령(鐵嶺)을 넘어 덕원(德源)에 이르러 함께 있다가, 4월에 성보(誠甫·송시도 지칭)는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고 수보(송시걸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