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한양 도성을 떠나 닷새만에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 행궁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왕은 이념적으로 이 땅과 백성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머무는 곳은 모두 궁궐로 불렸다. 그 종류는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장전(帳殿) 등으로 표현됐다. 정궁과 이궁은 격이 다르지만 모두 도성 안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행궁'은 도성 밖에 지은 임시 궁궐로, 온천이나 왕릉 주변에 많았다. '장전'은 임금이 휴식 등을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임시 천막에 해당한다. 세조가 진천을 지날 때 '장전'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종대왕의 초수리 행궁터가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어 왔다. 자주 거론됐던 곳은 지금의 '내수읍 초정리 원탕 일대'와 '북이면 선암리 주왕이' 마을 등 두 곳이다. '주왕이'가 원탕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행궁지로 거론되는 것은 지명 때문이다. '주왕'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주)이 왕래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간행된
지명 '금강'(錦江)은 의외로 역사가 짧은 조선말기 쯤에야 독립적으로 대중화되면서 완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충청인의 젖줄인 금강(총길이 401.4㎞)은 남한에서 세번째로 긴 강으로, 그 수계 주변에 '금강 역사문화권'을 잉태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임선빈 박사의 '금강의 지명 변천과 국가제의' 논문에 따르면 '錦江'이 고문헌 속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정도전(1342~1398)의 '삼봉집'이다. 정도전은 1377년(우왕 3) 전라도 나주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충남 공주에서 숙박을 하게 됐고, 이때 '題公州錦江樓'(제공주금강루)라는 한시를 짓게 된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돌아오는 길에 또 금강 머리에 온 것을(歸來又到錦江頭) / 다만 강물이 유유히 흘러감을 볼 뿐(但見江水去悠悠) / 세월도 머물러 주지 않음을 어찌 알리(那知歲月亦不留) / 이 몸은 저 구름마냥 둥둥 떴으니(此身已與秋雲浮) / 공명이나 부귀 다시 무얼 구하리요(功名富貴復何求) /…/.'- 제목뿐만 아니라 시문 중에 '錦江'이라는 지명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조선중기 서거정이 지은 '동문선'에도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이때의 금강은 지금의 충남 공주 일대의 수계만을
가마는 집모양 처럼 생겼으면서 누군가를 태울 수 있는 기구를 말한다. 고구려 안악고분의 '주인도'(主人圖)와 '부인도'(婦人圖)에 가마가 등장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가마를 이용했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 가마의 한 종류인 채여(采輿)를 설명하는 내용이 장문으로 수록돼 있다. '위에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 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공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인용문의 '인갈'은 관인이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탈 수 있는 가마로는 연(輦), 여(輿), 가교(駕轎) 등 3종류가 있었다. 왕실에서는 '덩'이라는 가마도 사용했으나 이는 공주나 옹주가 타던 것이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지금의 초정)를 찾았을 때 어느 가마를 이용했는가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은 약간의 '예습'이 필요하다. '연'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먼길을 거둥할
'진짜 개똥쑥이라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음성 소이면 비산리에 소재하고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인삼약초연구소'가 21일 보도 자료를 발표, 유사 개똥쑥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개똥쑥의 추출물이 항산화와 암세포를 억제하는 효과가 탁월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이를 재배하는 농가와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같은 영향으로 전남 곡성, 경남 산청, 강원도 지역의 농가들 사이에서 토종 신소득 작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유행을 타고 개사철쑥, 더위지기, 사철쑥, 일반쑥 등 이른바 유사 쑥류가 개똥쑥으로 둔갑돼 유통되면서 재배농가와 소비자 모두의 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인삼약초연구소 이정훈 박사는 이에 대해 "개똥쑥이 일반 쑥과 가장 다른 점은 우리가 봄에 즐겨먹는 쑥과 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난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개똥쑥 꽃은 쑥 종류 중에서 가장 작고(꽃송이 평균길이 1.33㎜, 꽃송이 평균너비 1.27㎜) △줄기는 하나로 곧추 서며 △하부 잎은 4~5개로 갈라져 있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토종약초를 재배할 경우 먼저 전문가에게 정확한 약초의 기원을 확인해야 오용 재배를 사전에 예방발 수 있다"며
고려시대 우리고장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현종, 공민왕 등이다. 태조는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청주를 찾았다. 반면 현종과 공민왕은 거란과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갔다가 귀로에 청주를 들렸다. 고려 목종과 충렬왕도 각각 강조의 난과 순행 중에 우리고장을 찾은 바 있으나 이때는 청주가 아닌 충주였다. 특히 충렬왕은 순행 중 용안역(지금의 충주 신니면)을 찾았다.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청주목을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최대한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도계(道界)까지 마중 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다'(務從簡便)
장례의식요(일명 상여소리)는 생로병사의 마지막 여정이자 일생의 최종 관문에 등장하는 전통 노랫가락이다. 상여소리는 과거에는 흔치않게 들을 수 있었으나, 장례문화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이제 이를 쉽게 접할 수 없다. 청주대학교 이창신(음악교육과) 교수가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과 충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의 도움을 받아 '충북의 장례의식요'를 3백여쪽 분량으로 펴냈다. 특히 이번 저서는 장례의식요를 단순 채록한 것을 넘어 상당부분 이를 악보화하고 있어, '전승의 틀'을 보다 확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저술은 노한나(옥천 동이초), 노미란(영동 미봉초) 교사와 함께 도내 12개 시군에서 발품을 팔아 채록한 90여곡 중 40여곡을 악보화하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청주 1, 제천 2, 충주 2, 괴산 5, 단양 15, 보은 6, 영동 3, 옥천 4, 음성 1, 증평 1, 진천 1, 청원 1곡 등으로 백두대간 자락에 상여소리가 많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장례의식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예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장례의식요는 고개 하나, 냇가 하나 건너면 다를 정도로 변형이 심하다. 그러나 대개 출상 하루전의 '대돋음소리, 망자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설치된 개마무사(鎧馬武士) 조형물을 둘러싸고 왜색 시비가 일고 있다. '개마무사'는 말(馬)도 철갑으로 무장을 한 무사라는 뜻으로 공격시에는 돌격대 역할, 방어 때는 방호벽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왔다. 충주시는 지난 2007년 7월 고구려비 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실내 입구에 고구려 개마무사 조형물을 설치했다. 그러나 개마무사가 쓴 투구가 고구려 기마병이 아닌, 전통시대 일본의 무사 모습을 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 무사는 대부분 '조우관'을 쓴 모습을 하고 있다. 조우관은 한자 '새 鳥', '깃 우'(羽) 자로, 새의 꼬리 깃털을 머리에 장식한 것을 말한다. 주로 꿩의 꼬리깃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돼 왔다. 만주 집안현의 통구 12호 고분에는 조우관을 쓴 2명의 무사가 그려져 있다. 한 무사는 말을 타고 전투를 하고 있고(사진), 또 다른 한 명의 무사는 적을 사로잡아 막 목을 베려하고 있다. 이때 동일 고분 벽면에 그려진 2명의 무사는 모두 같은 모양의 조우관을 쓴 모습으로, 당시 화공(畵工)은 이를 마치 '펜촉 모양'과 함께 붉은색으로 처리했다. 묘사 기법은 약간 다르지만 조우
경기도 죽산-진천-청주에 이르는 길(지금의 17번 국도)은 조선시대에는 10대 대로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대로와 더불어 일본 사신들이 자주 왕래했다. 부산에 도착한 일본사신은 영남대로인 문경-수안보-달천을 거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갔다. 반면 남해안 내이포(乃而浦)로 도착한 사신은 창원-성주-옥천-청주-죽산-용인을 경유한 뒤 한강을 건넜다. 내이포는 지금의 진해를 말한다. '내이포에서 오는 자는 창원·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을 경유하여 입경(入京)하게 하고…'(由乃而浦來者 經昌原 星州 沃川 淸州 鎭川 竹山 龍仁 漢江入京).- 세종대왕이 탄 어가는 3개 대로 중 세번째 대로를 이용, 죽산을 거쳐 1444년 3월 1일 진천 북평천 가에 도착했다. '거가가 진천현 북평천 가에 머물렀다(駕次于鎭川縣北平川邊).- 인용문에 등장한 북평천은 고유지명은 아닌 진천 읍치의 북쪽 하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들판에서 휴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 어가가 진천에서 초수리(지금의 초정)까지 가는 데 있어, 어느 길을 이용했는지 실록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형과 당시 도로현황 등을 감안할
'충북전체 430명대 안동시 348명.' 충북출신 독립유공자 포상 비율이 '충절의 고장'을 무색하게 할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돼 있는 일제강점기 행형(行刑) 기록물중 충북출신 재판 판결문을 집중 분석했다. 그 결과, 충북출신과 관련된 판결문은 총 458명에 1천32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중 151명은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에 해당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후손들의 노력 부족으로 인하여 유공자 명단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독립 유공자 포상 기준은 여러가지를 복합적으로 고려하나, 일반적으로 '3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받으면 포상 요건을 갖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박교수의 이번 분석도 이같은 기준을 따랐다. 나아가 박교수는 미포상자 151명을 △의병계열 △3.1운동 계열 △기타 계열 등으로 분류, 다른 면을 살펴봤다. 그 결과, 3.1운동 계열 60명, 기타계열 51명, 의병계열 40명으로 3.1운동 계열이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는 단순 비교로, 형량(刑量)을 기준으로 하면 의병계열이 무거운 형을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주역은 음양오행설을 낳았고, 그 음양오행설은 우리나라 전통의학의 이론적인 바탕이 됐다. 주역에서는 사람의 머리는 둥근 하늘을 닮았기 때문에 둥글고, 발(足)은 각진 땅을 닮았기 때문에 각져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하늘은 양(陽), 땅은 (陰)이 된다.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가의 남성들은 하늘의 양기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갓(笠)을 썼고, 여성들은 땅의 음기를 더 흡수하기 위해 치마입기를 선호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유체계는 철저하게 하늘(天)과 땅(地)을 향했고, 그 중간에 사람(人)이 위치했다. 천지인 사상은 음식문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하늘은 사람에게 '오기'(五氣)를, 땅은 '오미'(五味)를 준 것으로 봤다. '오기'는 덥고(熱), 따스하고(溫), 서늘하고(凉), 춥고(寒), 보통의 기운(平)을 일컫고 있다. 이에 비해 '오미'는 단맛(甘), 짠맛(鹽, 신맛(酸), 쓴맛(苦), 매운맛(辛)을 의미하고 있다. 이중 '오미'는 입으로 들어가서 소화기관에 갈무리 되며 그중 영양물질은 '오장'의 기운을 만들어 준다고 한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다섯가지 맛을 골고루 지닌 식물이 바로 이름 그대로인 오미자(五味子)다. 갑자사화를 당해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