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상당구 서문동 일대에서 조선시대 객사(客舍) 담장과 관련된 유구가 보존이 양호한 상태로 대규모 발굴됐다. 또 그 하층에서는 고려시대 토목기술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석축 배수로가 역시 양호한 상태로 발굴됐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지난 9월부터 최근까지 CGV 영화관 근처인 상당구 서문동 25-1번지 일대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청주목 객사담장 4기, 적심, 기단, 복합문 기와 등을 발굴했다. 담장은 남북방향의 'I'자형 2기와 남북과 동서 방향이 조합된 'ㄱ'자형 2기 등으로 전체 길이는 22.3m, 폭은 0.8~1m 규모이다. 이밖에 4개 담장은 기초를 다지기 위해 비교적 작은 할석을 깔을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관계자는 "발굴된 객사담장은 청주읍성의 북서쪽에 해당한다"며 "이를 감안할 때 과거 발견된 인근 객사터의 연장선에 있는 유구로 , 청주목 객사를 입체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밖에 객사 담장 유구가 발견된 하층에서는 석축 배수로, 적심, 초석, 어골문 기편 등 고려시대 유구 등이 역시 양호한 상태로 다량 발굴됐다. 석축 배수로는 길이 7m, 폭 60㎝ 규모로 고려시대 토
세종대왕은 공법(貢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지 10년만에 결단을 내렸다. 세종은 관료는 물론 '여염의 세민(細民)', 즉 평민에까지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국민을 상대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는 이런 배경하에 실시됐다. 조선 전기는 당연히 모든 권력이 국왕 1인에게 집중돼 있고 또 신분의 차별이 뚜렷한 봉건시대였다. 그럼에도 세종이 '세민'의 여론까지 들어보려 한 것은 이미 그때 민주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인 만큼 여론수렴 결과는 다섯 달 후인 그해 8월 초순에 나왔다. 결과는 공법시행 찬성 의견이 대략 57%, 반대가 42%로 찬성자가 많았다. '호조에서 중외의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49명입니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수는 총 1
올 단재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자는 적었지만 예년에 비해 알찬 내용들이 많이 쏟아졌다. 2013 한·중 단재 학술심포지엄이 11일 오후 충북대 학연산공동기술연구원에서 열렸다. 단재문화예술제천추진위원회와 충북대중원문화연구소가 공동 주관한 이날 학술회의에는 중국 북경대외무역대학 최옥산 교수와 충북대 박걸순 교수가 주제 발표자로 나섰다. 먼저 최교수는 '단재 신채호의 북경 지역 독립운동과 유적지 현황' 주제발표에서 사찰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언급, 참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단재는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가통(家統)의 영향을 받아 유교적 성향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왔다. 먼저 최교수는 석등암(石燈庵), 현량사(賢良寺), 홍라사(紅螺寺), 관음사(觀飮寺) 등의 북경지역 사찰에도 단재의 생전 체취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경시 서성구에 위치하고 있는 석등암 유적에 대해 "단재가 1918년 저술활동에만 몰두하려 사색을 위해 찾은 공간이었다"며 "지금은 사찰이 없어지고 석정호동(石火+丁胡同) 지명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북경시 동성구에 위치하고 있는 현량사에 대해서는 "단재의 시 '賢良寺 佛像을 보고'의 소재가 됐던 사찰"이라며 "현재 절은 완전히 사라지
민영은(閔泳殷·1870~1944·사진) 후손이 청주시를 상대로 제기한 토지반환 항소송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소송의 대상이 된 토지에 대해 "민영은이 친일의 댓가로 취득한 것"이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민영은은 최근 뉴스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정도와 일부에서 말하는 교육가로서의 활동은 그 실상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사후 70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지역사회는 민영은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민영은의 친일 행각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는 먼저 1937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이 됐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역시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김성수, 방응모 등이 중심이 된 '국민정신동원조선연맹'은 징병, 징용, 창씨개명, 공출, 일본어 사용 등에 대한 독려 활동을 펼쳤다. 1941년에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은 자발적인 황민화와 공출강화 활동을 펼친 바 있다. 이때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이었다. 그는 거액의 비행기 성금도 헌납하기도 했다. 매일신보 1939년 8월 18일자는 '애국기 충북호, 충북서 헌납결의, 민영은씨의 1만원을 필두로 성금벌써
전통시대 동양의 조세개념은 조용조(租庸調)였다. 중국의 수나라 때부터 등장한 제도로 조(租)는 토지에 부과하여 곡물, 용(庸)은 사람에게 부과하여 노동력, 조(調)는 호(戶)에 부과하여 특산품을 각각 징수·징발했다. 조선도 이같은 원칙을 준용, 농지를 가진 농민들에게는 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듯이 조선의 토지제도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공법(貢法)-영정법(永定法)-비총법(比總法) 순으로 변했다. 답험손실법은 글자 그대로 '담헙'과 '손실'이 합쳐진 표현이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조정은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집적 조사하는 것을 '답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등급을 메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불합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령 어느 지역의 농토는 가뭄 때문에 작황에 안 좋아 C정도의 수확을 했다. 그러나 현지에 조사를 나간 관리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A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였다. 세종은 즉위한지 얼마 안 된 때부터 토지세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토질의 전분6등법, 풍흉의 연분9등법으로 잘 알려진 '공법'(貢法)이다. 세종 즉위 3년(142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세종대왕이 청주목 초수리(초정약 지칭)에까지 와서 훈민정음 창제 문제에 대한 고민을 했을까라고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미리 말하면 그런 의구심은 시간 낭비가 된다. 세종대왕은 1444년 초정약수에까지 와서도 훈민정음 문제를 매우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 증거는 아이러리컬하게도 훈민정음 창제의 열렬한 반대자였던, 당시 집현전 부제학(정3품)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 안에 들어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양이 매우 많아 단독이 아닌, 집현전 학자들의 집단상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최만리는 자신이름의 상소문에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어떻게 하겠느냐 △상말(훈민정음 지칭)만 알면 한자로 써있는 공문서는 어떻게 읽을 것이냐 등 세세한 내용까지 상소했다. 그리고 그런 최만리는 이 상소문에는 "어찌 이것만은 행재에서 급급(汲汲)하게 하시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언문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인용문 중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작업, '행재'는 초정약수 행궁, '성
3천년 전의 중국 시경(詩經)에 '김치 菹'(저) 자가 등장한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도 菹자가 다수 관찰된다. 그렇다면 김치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일까. 충북대 제 19기 박물관대학의 2학기 7번째 특별강연이 지난달말 학내 박물관(관장 성정용 교수·고고미술사학과)에서 열렸다. 이날 특강에는 박채린(세계김치연구소 선임연구원) 박사가 등단, '조선시대 김치문화'를 주제로 박물관 대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에 답을 했다. 그의 이날 특강은 '한국 김치의 기원은 중국의 菹인가'에 모아졌다. 중국 후한 때 유희(劉熙)가 지는 석명(釋明)은 菹에 대해 '菹는 막는 것이다. 발효시켜 차지도 덮지도 않는 곳에 두어 물러지지 않게 한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菹음식이 문헌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지금부터 3천년전쯤 지어진, 중국 오경의 하나인 시경(詩經)이다. 문제는 이런 菹가 조선시대 여러 고문헌에도 수없이 등장하면서 한국의 김치가 중국에서 전래됐는가, 아니면 자생적인가의 논란이 있어 왔다. 중국 6세기 무렵의 고문헌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저채류(菹菜類)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이 총 37건 등장한다. 박 박사가 이를 분석한 결과, 초산발효에 의한 菹제조 내용이 대부분을 차
세종대왕 대의 과학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는 장영실과 이천이 주로 거론된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 김조(金金+兆·?∼1455)라는 인물도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물시계인 자격루 발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김조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 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수리(초장약수)에 거둥할 때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바로 김조이다. 그의 보고를 통해 당시 충청도 가뭄과 그에 따른 기근현상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혹은 기근으로 나물만 먹는 자도 있고, 혹은 먹지 못해서 부황이 난 자도 있으며, 쌓아 둔 곡식도 많아야 1, 2두(斗)에 불과하고, 적은 자는 1, 2되 밖에 없는데, 혹 떨어진 자 중에는 경작하던 토지에 파종도 하지 못한 자가 3분의 1분은 된다 하니….'- 식량이 남아 있다는 사람도 기껏해야 1~2말, 적은 사람은 1~2되라고 세종께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초수리에 거둥하던 때의 가뭄은 전년도부터 계속 된 것이라는데 더 심각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
가뭄과 기근은 혼용되는 면이 있으나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가뭄은 기상적인 현상이고, 기근은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굶주리는 현상을 말한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은 1444년 가뭄으로 인해 충청도 일대에 대규모 기근(飢饉) 현상이 나타났다. 세종실록은 그 실상을 '사람들이 나물만 먹은 빛을 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병조 판서 정연이 아뢰기를, "신이 청안(淸安) 지방에 가니, 남녀 30여 인이 모두 나물을 캐고 있으므로, 신이 종자(從者)를 시켜서 살펴보니 모두 나물만 먹은 빛이 있었습니다."'- 기근현상이 좀더 심한 지역에서는 아사자도 속출, 장례를 치르지 못해 시신을 길가에 방치하기도 했다. 당시 예조는 세종에게 이런 보고를 한다. "이제 파종한 것이 싹이 섰고 밀·보리가 팰 때를 당하였는데, 여러 날 비가 오지 않으니 (…) 원통한 옥사를 살펴보고 빈곤한 자를 진휼하며, 시체와 해골들을 묻어 주게 하소서" 하니…'- 세종은 자신이 초수리에 머물고 있는 기간에 심한 기근이 찾아온 것에 대해 이른바 "내탓이오" 의식을 보였다. 또 배곪는 충청도 백성을 신속히 구제하기 위해 이른바 '보고 라인'을 先시행- 後보고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한국기와학회와 한국성곽학회가 공동 주최한 2013년도 국제학술회의가 '성곽과 기와'를 주제로 지난 25~26일 충청대학교 문예관 아트홀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는 한국기와학회 장준식 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유창종 명예회장의 축사, 중국 사회과학원 유경주 박사의 격려사, 그리고 차용걸 충북대 교수의 기조강연이 이어졌다. 이밖에 주제 발표자로는 백종오 한국교통대 교수,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 카메다 슈이치 일본 오카야마대학 교수, 김호준 중원문화재연구원 등이 참여했다. 차교수는 '한국 성곽출토 명문와' 주제의 강연에서 삼국, 고려, 조선시대 기와 문화를 시대 흐름별로 설명, 한국 역사의 일부를 기와를 통해 설명했다. 이중 조선시대 기와문화가 충북과도 관련있는 부분이 많아 학술회의장의 또 다른 주목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조선초기는 기와의 수요가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그는 그 원인으로 △한양 도성 건설 △경복궁 신축 △각급 관청공사 △민가의 기와잇기 문화 등을 꼽았다. 태조 이성계는 기와 수요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조정에 동요직(東窯直)과 서요직(西窯直) 각 1명을 뒀다. 태종 때는 한양도성 내부의 민가까지 모두 기와는 얻는 일명 와즙(瓦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