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우리고장 단양의 도담삼봉을 그린 화가로는 정선, 최북, 윤덕희, 김홍도, 이방운 등이 있다. 이들은 각각 '삼도담도', '단구승유도', '도담절경도', '도담삼봉도' '도담도'를 그렸다. 이중 최북(崔北·1720-?)은 자는 유용(有用) 또는 칠칠(七七)이고, 호는 호생관(毫生館)을 가장 즐겨 사용했다. 최북은 조선시대 여러 화가 중 기행을 가장 많이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실경산수화를 그리는 동기는 무척 다양하다. 먼저 임금의 명령으로 산수화를 그리는 경우가 있다. 김홍도가 정조를 명을 받고 단양일대를 그린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경관에 너무 아름다워 집으로 돌아가 화가에게 그림 제작을 주문하는 경우이다. 겸재 정선의 단양지역 그림은 대부분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밖에 화가를 직접 데리고 와서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경우다. 최북이 이광수의 부탁을 받고 그린 도담삼봉도가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라는 그림이 이에 해당한다. 그림을 보면, 도담삼봉 앞에 2명의 선비가 사공을 대동하고 뱃놀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능수버들이 늘어지고 또 나뭇잎이 초록으로 변하는 등 늦봄의 도담삼봉 경치가 맑은 담채로 그려져 있다. 서두
6.25 당시 북한 종군작가 전욱이 쓴 영동 노근리 관련 르포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쓴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6.25 당시 르포작가와 종군 기자들을 전선으로 파견, 이를 '조선인민보'와 '민주조선'에 집중적으로 싣는 등 관련 기사를 선무공작에 집중적으로 활용했다. 이같은 당시 르포 기사 중 전욱이 쓴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으로 평화주민 4백명이 학살-미국놈들 황간에서 또 만행'(조선인민보 1950년 8월 26일자) 제목의 기사는 노근리 현장을 가장 리얼하게 묘사, 일반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밀 분석을 하면 지명과 인명이 맞지 않는 등 노근리 미군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쓴 기사가 아닌 대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다음의 문장으로, 편의상 ①, ②, ③ 등의 번호를 부여했다. ①: '즉 29일 해질 무렵이었다. 진격하는 우리 인민군대 장병들이 황간역 북쪽 노옹리에 다다랐을 때 들과 철교 밑에서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참혹한 장면에 부닥쳤다.' ②: '조금 조금씩 말을 주고받고 보니 소녀는 서산리에 사는 최순자였고 그 등에 업은 젖먹이는 자기 동생이라는 것이다.
조선 숙종~영조 연간에 활약했던 문인화가로 이윤영(李胤永·1714-1759)이 있다. 그는 1751년부터 1755년까지 약 5년간 단양 지역에 은거하면서 시·서·화를 남겼다. 특히 그는 단양의 풍광을 너무 좋아해 자신의 호를 '준화재'(濬華齋)에서 '단릉산인'(丹陵山人) 또는 '단구처사'(丹丘處士)로 바꾸기도 했다. 그가 단양 은거를 결심한 것은 멀리는 증조부, 가깝게는 부친의 근무지와 관련이 있다. 그의 증조부는 이행(1657-1702)은 1689년 기사환국 때 같은 노론계 인물인 우암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약을 받는 것을 보고 충청도 결성, 즉 지금의 충남 홍성으로 낙향했다. 이 때문인지 이윤영도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 산수를 즐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이윤영은 부친 이기중(李箕重)이 단양군수 발령받은 것을 계기로 단양을 처음 찾았다. 이때 단양의 경치에 반해 훗날 단양을 다시 찾아와 은거하며 '사의적(寫意的) 산수화'를 주로 그리게 된다. 이윤영과 동시대를 산 이운영이라는 인물이 '기년록'이라는 글을 남겼다. "단릉공은 단양의 산수를 매우 좋아해 한두 명의 친구들과 이곳에 복거할 것을 약속하였다. 임신년에 구담에 창하정을 세우고
통계를 해석하는 방법 중 '%', 즉 지수(指數·index numbers)로 해석하는 방법은 어떤 통계 항목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는데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지수'는 수량의 대비에서 기준치를 '100'으로 했을 때의 그 100분비를 '%'로 나타내는 것을 일컫는다. 인구 변화율은 인구통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항목으로, 이를 통해 하부통계의 내용을 사전에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청원군 각 읍면의 '1990~2009년 기간'의 인구 변화율(단위: %)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충북개발연구원의 2010년 통계자료는 기간 동안의 인구 변화율을 1.35~6.44%, 0.11~1.35%, -0.9~0.11%, -0.7~-0.9%, -2.33~-1.7%, -2.96~-2.33%, -3.64~-2.96% 등 7단계로 구분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색농도를 다르게 표시했다. 비교연도가 된 1990년의 청원군 총인구는 11만4천6백89명으로, 남자나 5만7천687명, 여자가 5만7천2명의 인구 분포도를 나타냈다. 2009년의 청원군 총인구는 15만2천683명으로, 남자 7만8천8백81명, 여자 7만3천8백2명의 인구수를 나타냈다. 은 1990-
정선(鄭敾)은 36세 때부터 74세 사이에 총 12권의 화첩을 제작했다. 그중 9권만 현존하고 3권은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3년 '구학첩'(邱壑帖)으로 불리는 새로운 화첩이 발견됐다. 정선의 13권째 화첩으로, 단양 읍내의 정자를 그린 봉서정(鳳樓亭), 도담삼봉을 그린 삼도담(三嶋潭),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하선암(下仙岩)이 소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구학첩은 정선이 스스로 그린 것이 아니라, 친구 김광수(金光遂·1696-?)의 부탁을 받고 그린 작품이다. 서인 노론계 문인이었던 김광수는 우리고장 '사군산수'를 유람한 뒤 그 감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하양(경북 경산의 옛지명)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18세기 초반 친구 정선에게 부탁해 사군산수를 그리게 했다. 겸재는 그림 옆에 자필로 제목을 달았다. 때문에 그의 나이 63세 전후에 제작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김광수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명 감식가이자 수장가였다. 17세기 후반 인물인 신유한(申維翰·1681-?)은 김광수를 이렇게 평했다. '집안에 모은 고서화와 진기는 모두 천하명품이며 고시문 등도 천하의 기서(奇書)인데, 뜻에 맞는 것이 있으면 가재를 기울여
청원군 69년 역사는 지역별 이색 화제도 많이 낳았다. 81살 노인이 딸을 얻었는가 하면, 현암사가 20년만에 주민 품으로 돌아왔고, 비닐하우스에서는 11번째 자녀가 태어나기도 했다.◇81살 할아버지 첫 딸을 얻다, 신부는 34살 (강외 중정리 / 1964년 1월) 81살 할아버지가 첫 딸을 얻어 화제가 됐다. 이 할아버지는 "다음에는 아들을 낳아야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청원군 강외면 중정리 이용범(81) 노인은 80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고민하여 오던 중 지난 31일 하오 8시 첫딸을 낳아 정초에 밝은 화제가 되고 있다. 이옹은 작년 11월에 김진열(34) 씨와 재혼하자 바로 태기가 있어 이날 기다리던 손을 보게 된 것. 아직도 정정한 이옹은 『아들을 바랐는데 딸이어서 섭섭하다, 다음엔 아들을 낳아야겠다』라고 장담하였다.'-◇산골 마을에도 드디어 전기가 들어오다 (낭성면 8개 부락 / 1972년 6월) 청원지역 대부분의 산골 마을은 60년대 말까지도 밤이 되면 암흑천지로 변했다. 문명의 총아라는 전기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70년대 전반이 돼서야 관내 산골 마을에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1972년 6월의 점화식에는 중앙 고위관료와 청원군
우리고장 북부지역 '사군산수'를 전국적으로 대중화시킨 인물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었다. 이황은 단양서 가까운 지금의 경북 풍기 출신으로, 우리고장 사군산수에 반해 단양군수를 자청할 정도였다. 17세기 인물 윤순거(尹舜擧·1596-1668)가 지은 '단양산수속기후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구담으로 들어서니 오로, 현학, 채운, 옥순 등 여러 봉우리들이 보였다. 이것 모두 퇴계선생이 새롭게 작명한 것이다."(又一轉而入于龜潭。如五老,玄鶴,彩雲,玉筍諸峯。皆退溪先生命名而新之者。) 이중 지명 옥순봉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매우 자주 거론되면서 대중성을 지니게 됐다. 그 전 지명은 '귀머거리 聾'(농) 자를 쓴 '농암'이었다. 제천의 '금수산'도 퇴계 이황이 작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양군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본래 이름은 백암산이었으나, 1548년 퇴계 이황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금수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전까지 사군산수에는 불교식 지명이 많이 존재했다. 이후 사림파가 사군산수의 공간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대거 '비불교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단양읍 단성면 가산리와 대잠리 일대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상선
한민구 국방장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일부 언론이 '조부 한봉수 의병장, 사실은 친일 협력자'라는 식으로 잇따라 보도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청주 상당공원의 의병장 한봉수 동상과 중앙공원의 비 철거가 불가피해보이는 등 일련의 보도는 매우 민감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보도된 내용들은 이미 국내 사학계가 '그렇지 않다'라고 학문적 검증을 끝낸 것으로,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의 도움말을 빌어 관련 내용을 문답식으로 살펴본다.문: 한봉수 의병장의 자수가 곧 친일인가? 답: 그는 이미 1908년 11월 공주지방재판소에서 '강도살인사건'(의병에게 적용된 죄목임) 피의자로서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약 2주간 노모를 모시고 서울에 은신해 있었으나, 더 이상의 피신이 어려워지자 일제와 타협을 시도하였다. 즉, 그가 자수를 청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제 발로 걸어가 잡힌 것이 아니라, 1910년 5월 12일 충청북도 경찰부에서 파견한 형사대에 의해 피체 연행됐다. 다음 자료는 한봉수의 귀순 청원을 보는 일제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청주지부 검사는 한봉수를 심문하던 중 내부 경무국장에게
조선시대 단양, 청풍, 영춘, 제천 등 4개 군현의 산수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뜻에서 '사군산수'(四郡山水)로 불렸다. 비교적 풍부한 수량과 기이한 석벽 그리고 계곡·강 주변의 반석 등이 수려한 자연경관을 만들고 있다. 불우했지만 자족(自足)의 마음으로 살았던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사군산수'를 비교적 자세히 서술했다. '영춘·단양·청풍·제천 네 고을은 비록 충청도 지역이지만 사실은 한강 상류에 위치하였다. 두메 가운데 강을 따라 석벽과 반석이 많다. 그 중에도 단양이 첫째로 고을이 모두 만첩산중에 있다. 10리 되는 들판은 없으나 강과 시내, 바위와 골(동굴 지칭)의 훌륭한 경치가 있다.'- 문헌상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인물은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었다. 그는 1602년 충청도 경시관(京試官·일종의 시험 감독관)으로 부임했을 때 단양의 구담, 도담 등을 유람한 후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역하면 이렇다. '사군은 산수의 본향이다. 그중에 구담의 경치가 최고인데 모나게 우뚝선 옥순봉과는 급하고 가파르게 달려 서로 잇닿아 있다. 그 아래로는 흐르는 물이 돌아나가고 거센 여울 맑으니 또한 옥이로다.'- 필자의 어설픈 의역
충북선(忠北線)은 세종특별자치시의 조치원역과, 충청북도 제천시의 봉양역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조치원역은 경부선, 봉양역은 다시 중앙선과 연결되고 있다. 충북선은 일제강점기 당시 사설철도회사인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조치원~청주간이 1020년 3월에 착공, 1921년 11월 영업을 시작했다. 1923년 5월에는 청주~청안간 23.9km, 1028년 12월에는 청안~충주간 47.4km가 개통됐다. 이후 충주~봉양간 35.2km 구간이 1958년 5월에 개통되면서 충북 북부지역의 여객 외에 충주 비료공장의 수송로 역할을 겸하게 됐다. 2014년 현재 총연장 115㎞의 충북선에는 조치원역-오송역-청주역(구 정봉역)-오근장역-청주공항역-내수역-증평역-도안역-문암역-보천역-상당역-음성역-소이역-주덕역-달천역-충주역-목행역-동량역-산척역-삼탄역-공전역-봉양역 등 18개 역이 위치하고 있다. 이중 청원지역을 통과하는 역은 오송역, 오근장역, 청주공항역, 내수역 등이다. 그러나 에서 보듯 충북선 청원지역 구간에는 과거 미호역, 정봉역, 서청주역, 정하역, 금암역 등도 존재했었다. 청원지역 과거와 현재의 역을 살펴본다. 오송역은 분기역 역할을 하고 있는 등 중요도가 워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