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李光, 1879~1966)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망국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외교관련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3.1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이회영과 교류하면서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의거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중국에서 한교선무단의 단장으로 교민보호에 앞장섰다. 1948년 귀국하여 충북도지사, 감찰위원장, 체신부장관을 역임했다. ◇신민회 동지들과 망명길에 오르다 이광의 호는 성암(星巖), 본관은 전주로 1879년 9월 30일에 충북 청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범형(範珩),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이광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본격 나섰다. 이 시기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되어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2년 뒤인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를 계기로 광무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는 동시에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광이 가입한 신민회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단체였다. 1909년 양기탁
[충북일보] 헤이안, 지금의 교토를 도읍으로 한 덴노는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이다. 784년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는 야마시로국(山背國)의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새로운 도읍의 건설은 신라계인 하타(秦)씨를 어머니로 하는 후지와라노다네쓰구(藤原種繼)를 중심으로 야마시로국을 비롯한 근방의 여러 지역의 부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나가오카교(長岡京)로의 천도에 제동이 걸린 것은 평성경의 궁궐문을 이건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기근이나 질병이 유행하면서 789년에는 간무의 모후(母后)인 다카노노니가사(高野新笠)가 사망하고, 790년 황후가 사망하게 된다. 간무는 마침내 수해를 입기 쉬자 지형에 위치한 나가오카쿄을 포기하고 794년(延曆 14년)에 도읍을 나가오카교보다 북쪽에 위치한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겼다. 예나 지금이나 천도는 대개 지배자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상례이다. 710년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의 천도는 율령체제의 확립과 함께 관청과 관인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이 거주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실은 아스카가 구호족의 중심지여
[충북일보] 조선시대 10여명의 희생자를 낸 옥천 권대전 역모사건(일명 정한 역모사건)은 조흥빈(趙興賓)이라는 인물의 고변(밀고)으로 시작됐다. 권대진에게는 '낙'(絡)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는 조흥빈의 아들 '완'(浣)에게 권대진의 역모를 흘리며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이 기회를 놓히지 말라"는 식으로 동참을 꼬드겼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조흥빈의 아들 '완'은 무시무시한 대화가 잘 믿기지 않았는지 며칠 뒤 발설자인 권대진을 직접 찾아가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했다. 권은 성공을 확신했는지 역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권대진의 역모 의도를 재차 확인한 조완은 이를 아버지(조흥빈)에게 알렸고, 그가
[충북일보] 조선 인조 때의 옥천지역 역모사건과 관련해 권대진, 정한, 양천식 위로로 서술을 했다. 그러나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종합하면 당시 역모사건에는 총 32명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옥천 10명, 합천 6명, 나머지는 전라도, 경상도, 청주 등이다. 청주에서는 조철이라는 인물이 당시 역모사건에 가담했다. 옥천 가담자가 가장 많은 것은 권대진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가장 컸음을 의미한다. 옥천 가담자 가운데 권대진, 권락, 권계, 권순, 영이, 박선검, 박준검 등 7명은 처형됐다. 권락, 권계는 권대진의 아들이고 권순은 조카이다. 이밖에 영이는 권대진가의 노비이고 박선검, 박준검 권대진가의 보인이었다. 보인은 대신 병역의무를 지는 것을 말한다. 권락, 권계 형제는 아버지(권대진)의 역모 도모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인용문의 '그
[충북일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있다.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이다. 서울 남산 아래 살았던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을 하나 동료의 모함을 받아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정거는 일정기간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일컫는다.그는 가학(家學)을 하면서 문학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고, 이 시기에 그 유명한 동악시단(東岳詩壇)이 형성된다. 동악시단은 이안눌이 주축이 돼 결성된 일종의 시(詩) 동호인회로, 정철(鄭澈)의 제자였던 권필, 선배인 유근수, 평생의 맞수였던 이호민·홍서봉·이정구 등이 참여하였다.그가 끝까지 출사(벼슬살이)를 마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 32) 다시 과거 시험을 봐 문과에 급제하였고, 32세 되던 해에 우리고장 청풍부의 경시관(京試官) 임무를 부여받았다.조선 조정은 지방에서 치뤄지는 향시(鄕試)를 감독하기 위해 시험 감독관을 지방의 과거 시험장에 종종 파견하였고, 이를 경시관이라고 불렀다.시험 감독관으로 파견되는 만큼 현지 체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아안눌의 청풍 체류기간도 길지 않았으나, 이때 〈호서록〉(湖西錄·동악집 제 4권)이라는 연작
[충북일보] 정운경(鄭雲慶, 1861~1939)은 제천 유력가문 출신으로 영춘에 살면서, 을미의병기 호좌의진 참여를 시작으로 을사의병기에는 원용팔에 이어 단양에서 의거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의거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단순히 현실의 묵수나 과거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이상을 지키며 유학자로서 민족이 처한 위난을 극복하려는 충절에서 비롯된 지행합일의 실천이었다.◇ 제천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나다 정운경은 1861년(철종12) 2월 9일 제천의 월림(月林)에서 정희원(鄭羲源)과 원주 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자는 화백(和百), 호는 송운(松雲)이다. 그의 집안은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 정보연(鄭普衍) 때 제천에 터전을 잡은 이후 정보연의 손자인 정익하(鄭益河)가 나라로부터 불천위를 인정받으며 지역사회의 명문으로 번성하며, 인근의 유력 문중과 연이은 혼인관계를 통하여 향촌 내에 기반을 굳혔다. 정운경은 고향에서 재종숙 정일원(鄭一源)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타고난 재질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24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그 다음해에 부인인 한산 이씨가 두 딸을 남기고 일찍 타계하는 슬픔을 겪었다.
[충북일보] 9일이 제 569주년 한글날인 가운데, 구한말 조선을 정탐한 일본인이 한글을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고 평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본인은 '팔도의 말 가운데 충주의 말이 가장 격조있고 온하하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일본인 첩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1869~1919)는 지난 1893년 조선에 파견되어 1년 동안 팔도 구석구석을 정탐하였다.그리고 일본 도쿄로 되돌아가 1894년 4월 17일부터 1백54편의 조선 정탐글을 '이륙신보'(二六新報)에 연재했다.해당 글은 최혜주 박사가 지난 2008년 '일본인의 조선 정탐록 조선잡기'(김영사 간)라는 책명으로 출간한 바 있다.그러나 그동안 구한말의 조선풍속만 주로 인용됐고 언어와 문자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탐꾼 혼마는 한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구한말의 조선풍속만 주로 인용됐고 언어와 문자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탐꾼 혼마는 한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구조는 일본글과 같다. 교묘한 것이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 한인(韓人)은 실로 이와 같이 교묘한 문자를 가지고, 왜 고생스럽게 일상의 서간문까
[충북일보] 나라에 가서 도다이지(동대사)를 보지 않으면 나라를 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사카에 가서 오사카성을 보지 않으면 오사카를 갔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사카성은 오사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 오사카성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굳이 답사가 아니더라도 오사카를 여행하게 되면 오사카성의의 외곽이라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의 도시인 오사카는 운하가 많다. 오사카에는 오사카의 운하를 운행하는 배가 있는데, 특히 배를 타고 바라보는 오사카성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은 고대도성 나니와궁 옆에 위치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세우기 전에 이곳은 원래 이시야마의 혼간지(本願寺)라는 사찰터였다. 전국 무장들이 최후의 승부를 향해 치닫던 시점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사원과 잇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한다. 노부나가에 의해 사원세력과 잇키가 차례대로 진압되고 남은 세력은 승려와 촌민이 결합된 혼간지였다. 전국을 사실상 통일한 통일국가의 권력을 대표하는 노부나가도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혼간지를 쉽게 공략하지 못하였지만, 혼가지가 계속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돌산 위에 위
[충북일보] 우리고장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을 현혹한 인조조의 떠돌이 요승 양천식(楊天植)은 출가와 환속을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생활 자체가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역시 3번씩이나 개명하는 등 뭔가를 감추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인용문의 양정식은 양천식과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으로 출가와 환속을 함께 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나, 양천식은 외견상 관상(觀相)과 풍수(風水)를 보는데 능했다. 권대진이 첫 만남부터 양천식에게 설득당한 것은 이 때문으로 파악된다. 양천식은 권대진을 보자 "백마장군이 될 관상"이라고 유인하는 말을 던졌다. 민속에서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인물을 '백마장군'으로 호칭하고 있다. 의 공손찬(公孫瓚)이나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을 백마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충북일보] 안석경(安錫儆·1718-1774)은 전회 소개한 안중관과 고령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숙화(叔華), 호는 삽교(·橋)이다. 그는 부친 안중관과 함께 충주 가흥촌에서 살다가 1740년 원주의 흥원(興原)으로 이주하였다.충주 가흥과 원주 흥원은 행정구역으로는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리 멀지 않은 상류와 하류이다. 그리고 흥원은 남한강과 그 지천인 섬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충주로 치면 남한강과 달천에 해당한다. 섬강은 정약용이 충주 하담과 남양주를 물길로 오르내릴 때마다 스쳐 지나갔던 곳으로, 강가의 풍광이 선계(仙界)처럼 다가왔다. '섬강 나루에 해가 뉘엿뉘엿 저무니 / 여기저기 흐르는 물 석양빛이 일렁인다. / 멀리 있는 일엽편주 술 실은 배이런가 / 오리 쌍쌍 날아가는 데가 어부의 집이라네. / 봄 지난 버들이 언덕머리 아직도 푸르게 하고 / 꽃이 지는 물에 비쳐 바위 얼굴 때때로 붉어지네. /…/.'- 섬강은 상업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영·정조 연간의 문인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해좌집)라는 시에서 '밝은 등불 켜고 나무 끝 사이로 지나가니 / 아마도 한양에서 오는 배겠지. / 금년에는 소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