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최소 3곳의 단체나 인물이 등장하는 등 가짜로 예비 판정을 받은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증도가자 유입 경위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최근 "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증도가자 등 고려활자 7개에 대한 3차원(3D) 금속 컴퓨터단층촬영 결과 모두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본보의 취재 결과, 증도가자를 포함한 청주고인쇄박물관의 가짜로 추정되는 고려금속활자 확보하는 과정에는 현재까지 최소 3곳의 단체나 인물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경북대 산학협력단은 지난 2010년 '조선왕실주조 금속활자복원사업'을 수행하였고, 이때 청주고인쇄박물관은 해당 사업에 보조사업자로 참여하였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이 과정에서 보조사업자 자격으로 경북대 산학협력단에 자료구입비와 인건비 등의 명목으로 총 4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하였다. 이 지원금은 포괄적 성격의 예산으로, 사용처와 구매 항목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이같은 사업 성격 속에서 책임연구원인 경북대 남권희 교수는 자기대학 산학협력단에 "연구에 필요하다"며 대구시내 모 문화재매매업소로부터 전통활자 구입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산학협력단을 이를 수용하였다.
조선시대 색(色)의 물질은 얻는 것은 국가대사의 하나였다. 건축물의 외관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재위 16년(1740)에 종묘의 신탑(神榻)을 모두 당주홍(唐朱紅)으로 고쳐 칠하라고 명하였다. 신탑은 위패를 올려놓는 상, 당주홍은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한 붉은색 안료를 의미한다. 그러자 예조참판 이익정(李益炡)이 "각실의 신탑을 처음에는 번주홍(燔朱紅)으로 칠하였는데 수개(修改)할 때마다 당주홍으로 고쳤으므로 각실의 신탑은 그 색이 같지 않습니다"(영조실록 16년 4월 19일자)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달라서는 안 되니, 모두 당주홍으로 고쳐 칠하고 이 뒤로는 정식(定式)으로 삼으라"(〃)라고 하명하였다. 위패를 모신 공간은 가장 신성한 제례의식 공간이고, 따라서 변색이 잦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지방정부도 색물질을 얻는 것을 무척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 청주목 월경지의 하나로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에 주안향(周岸鄕)이 위치했다. 마치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와 같은 모습으로 주안향은 문의현을 뛰어넘은 곳에 위치하였다. 대전시 동구의 대청호 일대가 대체로 그 지역이다. 주안향은 구한말까지 그대로 존속됐고,
[충북일보] 지난 1998년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이 보물 제 1889호로 지정되었다. 이 먹은 당시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를 하던 과정 중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되었다. '단산오옥'은 '단산'과 '오옥'의 합성어다. 단산(丹山)은 단양의 옛 이름으로,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단양군(丹陽郡)으로 승격되는 1318년(고려 충숙왕 5)까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옥(烏玉)은 먹의 별칭인 오옥결(烏玉O)의 약칭이다. 따라서 단산오옥은 '단양 먹(丹陽 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 이 먹은 무덤 주인의 머리맡 부근 철제가위 위에 반으로 조각난 채 놓여 있었고, 단산오(丹山烏) 아래 일(一)자만 보였다. 그럼에도 '一'을 '玉'자로 추정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 단양군 조는 단양의 토산을 설명하면서 '墨 最良 號爲丹山烏玉'라고 기술하였다. 의역하면 '단양의 먹, 최고 품질로 단산오옥으로 불려진다'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도 《세종실록》 지리지와 똑같은 문장으로 기술돼 있다. 고려시대 단양에서 최고 품질의
[충북일보] 일본 정창원에 보관돼 있는 '제2 신라문서'는 과연 8세기 무렵에 지금의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서 작성된 것일까. 일제 강점기인 지난 1933년 일본 황실의 유물 보관창고인 정창원에서 8세기 무렵의 '제1 신라문서'(일명 신라장적)가 발견돼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특히 이 문서는 작성 장소가 청주 일대 어디인 것으로 추정돼 지역적인 관심을 증폭시킨 바 있다. 같은 해 정창원 남쪽 창고에서 유기 그릇의 일종인 '좌파리가반'(佐波理加盤)을 정리하던 중 포개진 그릇 사이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통일신라시대 공문서 2장이 발견되었고, '제2 신라문서'로 명명됐다. 그러나 제2 신라문서는 분량이 2장으로 적고 해독이 안 되는 문자로도 기록돼 있어, 소수의 구결 연구가를 제외하면 역사 전공자들도 그 존재를 아직 잘 모르고 있다. 현재까지 제2 신라문서 앞면에는 지역 진상물인 공물(貢物), 뒷면에는 관리 급여인 녹봉(祿俸)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대략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통일신라 때의 이같은 공문서가 바다건너 일본에 전래된 경위는 열도로 운송할 좌파리가반을 포장하는 과정에서 제2 신라문서가 충격 완화제로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내 학
헤이안 수립 이전의 교토를 지배한 호족은 하타(秦)씨였다. 하타씨 세력의 강대함은 교토시 중경구에 위치한 헤이안창생관(平安京創生館)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蜂岡寺) 조감도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치오카데라는 헤이안 설립 이전의 사찰로 하타씨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헤이안창생관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의 조감도를 보면, 흡사 나라에 있는 호류지(法隆寺)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장대하다. 이 하치오카데라를 후에 장소를 조금 바꿔 건설한 것이 지금의 교류지(廣隆寺)이다. 이 거대한 사찰을 건립한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를 비롯한 하타씨 일족들은 아라시야마(嵐山)일대의 가쓰라가와(桂川)에서 물을 끌어들여 하타씨의 대종가의 본거지인 우즈마사(太秦) 일대의 수전을 개발하였다. 신라에서 온 하타씨들은 우즈마사 일대에 논을 만들기 위해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기 시작하였다. 하타씨에게 있어서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고 댐을 만드는 기술은 고국에서 익히 해보았던 토목공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대 교토에 살았던 일본들에게 있어서는 한 번도 경험하거나 본적도 없었던 경이적인 기술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강의 물줄기를 변경하는 대규
[충북일보] 우덕순(禹德淳, 1876~1950)은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에 참여한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국내에서 을사늑약 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후에도 교육 및 의병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 충북 제천이 낳은 독립운동가 우덕순은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 아버지 우시영(禹始映)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이고, 독립운동 시기 우연준(禹連俊), 우홍(禹鴻) 등을 이명으로 사용하였다. 꼭 106년 전 오늘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哈爾濱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였다. 이 때 하얼빈역 바로 전 역인 채가구역(蔡家溝驛)에도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대기한 독립운동가가 있었으니, 그가 우덕순이다. 그런데 안중근의 동지인 우덕순이 충북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서울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서울 국립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서울 출신이라고 적혀있어서, 이러한 오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오해의 시작은 우덕순이 하얼빈 의거 이후 첫 조사를 받을 때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답변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첫 조사에 대한 진술은 안중근, 우덕순 모두 거
[충북일보] 괴산은 고려시대에는 괴주(槐州)로 불리었다. 지금의 지명 괴산(槐山)은 조선 태종대에 등장하였다. 본래 '州'(주) 자 지명은 '牧'(목) 이상에만 붙이는 행정 위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 후기들어 '주'자 인플레이션 현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고려의 국사(국사)나 왕사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 '주' 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시들도 중국을 갔다온 후 그 기념으로 자신의 출생지에 '주'자 지명을 끌어다 붙였다. "혹은 환시(宦寺)가 중국에 들어가 입시하였다가 사명을 받들고 환향하거나, 혹은 중이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내가 난 땅이라.' 하여, 권세를 타서 요구하고 청하여, (…) 혹은 군과 현을 승격하여 주를 만드니, 이 때문에 군과 현의 이름이 날로 뛰어오르게 되었으나…."- 선초의 태종은 이같은 주자 지명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메스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괴주는 지금의 괴산으로 개명됐다.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곳은 천(川) 자가 붙었으나 괴산처럼 산이 많은 곳에는 山자가 붙여졌다. 전자의 예로는 우리고장 제천·옥천·진천 등이 해당된다. 현재 괴산군은 감물면·문광면·불정면·사리면
[충북일보]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는 1864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때 국내 입국해 있던 천주교 선교사 가운데 일부가 "천주교도의 힘을 빌어 한 · 불 · 영 3국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이 조언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장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왕권유지 차원에서 천주교 탄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는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을 내렸고,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자 8천여 명이 학살을 당하는 대참극이 발생하였다. 바로 병인박해다. 병인년의 박해로 신자들은 산속이나 오지로 피신해 다니다가 수많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같은 사실이 중국 천진에 주둔해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알려지면서 그 보복으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다.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국내 숨어지내던 인물로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erron·1827-1903) 신부가 있었다. 그는 리
[충북일보] '레고 조형과 세필이 수묵화 위에서 만나다.'지난 2011년 약관의 나이에 충북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해 지역 화단을 화제를 낳았던 허주혜(24·충북대 대학원) 씨가 제 3회 개인전 '끝없이 펼쳐진'(Un ending)을 구 도지사 관사인 충북 문화관에서 갖고 있다. 출품작은 30여점으로 조선시대 화원화가 이인문(李寅文·1745-·)이 그린 (江山無盡圖)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다. 특히 출품작 가운데는 가로 9m가 넘는 작품도 있어, 모처럼 지역화단의 대작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이인문의 는 춘하추동 4계절의 대자연 경관을 연이어 그린 가로 8.5m의 권축(卷軸·두루마리) 작품으로, 현존하는 조선후기 최대의 거작이다. 허씨는 "강산무진도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구도가 지루하지 않고 마치 운율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며 "그 같은 구도를 모티브로 삼아 현대의 공간성을 재해석, 이번 개인전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에서의 구도는 좌에서 우로 전개되고 있고, 그 공간은 산과 강 그리고 집 등 전통시대 자연경관으로 채워져 있다. 허씨의 이번 작품들도 동일한 구도로 흐르면서 경관이 끝나는 곳에서는 시야가 가물가물, 경관은 제목 그대로 '끝없이 펼쳐진' 모습을 하고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金子敬·1944년생) 씨가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도움으로 지난 16일 세종시 부강면을 찾았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여인으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는 1912~1919년까지 7년 동안 부강에 거주한 바 있다. 그녀는 1919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고, 여기에는 부강에서의 조선인 탄압과 3.1운동 목격 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 타카시 씨는 후미코의 외가쪽 친조카로 현재 야마나시현 소구마치에서 후미코의 생가와 시비를 관리하고 있다. 타카시 씨는 먼저 세종시 부강초등학교(교장 민방식)를 방문해 곽창록 씨로부터 후미코가 다녔던 부강심상학교와 그녀의 학창시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 후미코의 자전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원제: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에 등장하는 부강파출소(당시 일본 헌병대 자리)를 방문, 일대를 둘러봤다. 후미코의 수기에는 조선인이 매질을 당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헌병대 건물이었다.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마당으로 조선인을 끌어내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