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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2.23 15:06:28
  • 최종수정2023.02.23 15:06:28

신한서

전 옥천군 친환경농축산과장

우수도 지나고 봄비가 낙하산 펼치듯 조심스럽게 내린다. 계절이 겨울과 작별하고 산자락을 스멀스멀 기어 내려오고 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3·1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필자는 2002년도 이원면에서 호적계장을 8개월 정도 역임한 바 있다. 6·25 전란 당시 서대산에 숨어있던 빨치산의 습격으로 서대산과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원면, 군서면, 옥천읍의 호적은 불타 소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전란 후 1954년에 다시 호적을 급하게 회복하였기 때문에 사실과 잘 맞지 않아 호적업무 추진에 애로가 적지 않았다.

호적계장을 하면서 우연히 제적부에 기재된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 지역 이원면에서 창씨개명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창씨개명』이란 말 그대로 "성(性)을 다시 새롭게 만들고 이름은 바꾼다"는 뜻이다. 창씨개명에 대하여 일본인들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내선일체" 즉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국민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말살하기 위함이었고, 중일전쟁 당시 총 동원체제 확립을 위하여 추진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39.12.6 조선총독부령 제221호로 "조선인의 씨명(氏名)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다음 해 2월부터 개정된 조선 민사령이 시행됨으로써 조선인에게 조선식 성(性) 대신에 일본식 씨(氏)를 새로 만들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종래 조선에는 없던 씨(氏), 곧 가(家)의 이름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의 씨족을 일본식으로 개편하기 위함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소름 끼치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무리 창씨개명이라 하지만 성을 바꾸는데, 김 씨, 박 씨, 이 씨 등 같은 성씨는 같은 일본식 성으로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같은 집안, 형제라도 호주만 다르면 각각 다른 성으로 바꾸도록 유도하였다는 점이다. 호적법에 장남은 아버지가 사망하여야 호주상속이 되지만 차남은 결혼과 함께 법적으로 분가되며 동시에 호주가 된다. 이점을 노려 형제간에도 다른 성으로 창씨개명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과 이름을 일본어로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형제간에도 다른 성을 쓰도록 하여 우리 민족의 뿌리와 가족제도 자체를 없애려는 아주 무서운 일본인들의 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확인해 본 결과 이원면에서도 ▲곽(郭) 씨는 무려 6가지(松原, 亨邑, 郭山, 吉林, 西本, 西川)의 성으로 ▲김(金) 씨는 10가지(金城, 吉田, 金村, 金原, 金井, 金森, 金田, 金本, 三山, 上村)로 ▲박(朴) 씨는 12가지(梅田, 井上, 階川, 菊元, 新井, 松田, 村井, 武林, 靑山, 菊伊, 木山, 竹村) ▲이(李) 씨는 6가지(· 六, 三州, 牛峰, 興材, 國參, 東材)로 성을 바꾼 것으로 파악되었다.

일제는 6개월의 신고 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 내에 씨(氏)를 설정해 신고할 것을 의무화했다. 신고가 없는 경우에는 호주의 성을 씨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창씨는 신고 여부와 관계없이 법적 강제사항 이였다. 신고기간 내에 조선인 호수의 80% 정도가 씨를 신고하였다. 일제는 처음에 창씨를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전했지만 결국에는 사실상의 강제력을 발동하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조선인에게는 '비국민'이라는 딱지가 붙여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다.

창씨개명은 위의 실례에서 보듯이 아버지 혈통에 기초한 우리 민족의 뿌리를 말살하고 일본의 가(家) 제도를 도입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3·1절에 즈음하여, 우리 민족의 뿌리, 씨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검은 계략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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