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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청주시 출범으로 본 '청주의 역사적 정체성'

지명 청주 고려 태조때 첫 등장…'계수관' 지위 부여
왕건 '청주' 통해 주변 2군-6현 간접통치 형태취해
'물맑은 淸' 자를 쓴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
역사속 '청주시장 제 1호' 통일신라 원태라는 인물
청주목 지금보다 훨씬 넓어 대전 일부 '청주 월경지'

  • 웹출고시간2014.06.30 19:43:52
  • 최종수정2014.06.30 19:43:52
통합 청주시가 오늘(7월 1일) 역사적인 출범을 했다. 그러나 이번 출범은 청주·청원이 미군정의 어설픈 '통역행정'에 의해 분리된지 69년만에 재결합하는 것으로, 청주의 역사적인 정체성은 훨씬 더 올라간다.

통합 청주시의 새로운 출발을 맞아 지명 청주(淸州)의 최초 탄생 시기와 그 의미, 역사 속의 제 1호 청주시장 등을 살펴본다.

이밖에 고려, 조선 등 전통시대 '청주목'의 강역은 지금의 통합 청주시보다 훨씬 넓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알래스카와 같은 월경지(越境地)가 지금의 대전광역시와 세종특별시에도 존재했다. 그 이유와 배경을 살펴본다.

◇지명 '청주'(淸州)의 최초 탄생 시기와 그 의미

청주라는 지명은 고려사 지리지(태조 23년)에 처음 등장한다.

지명 청주가 역사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074년 전인 고려 태조 23년 때였다. 태조 왕건은 어떤 의도에서 인지 상당현(백제)-서원경(통일신라)으로 이어지던 지명을 '청주'로 개명했다.

'청주목(淸州牧)은 원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인데 신라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서원 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은 서원경으로 승격시켰다. 태조 23년에 청주로 고쳤고…'-<고려사 지리지>.

원문은 '淸州牧 本百濟上黨縣新羅神文王五年 初置西原小京景德王陞西原京 太祖二十三年 改爲淸州'로 돼 있다.

이처럼 태종 왕건을 청주의 지명을 새롭게 정한 것은 이른바 '계수관'(界首官) 제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계수관 제도는 어느 도시를 수부(首府·으뜸고을)로 정하고, 나머지 주변의 작은 고을은 수부도시의 속현(屬縣)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수부도시는 중앙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나머지 속현은 수부도시를 통해 중앙에서 간접 통치하는 방식이 된다.

당시 청주의 속현은 2군(郡)-6현(縣)이었다. 2군에는 연산군(燕山·지금의 문의)과 목주(木州·지금의 충남 목천)가 속했다.

그리고 나머지 청주의 속현(屬縣)으로는 진주(鎭州·지금의 진천), 전의(全義*충남 전의), 청천(淸川), 도안(道安), 연기(燕岐·지금의 세종시), 회인(懷仁) 등이 속했다.

이와는 별개로 당시 고려 조정이 왜 '물맑을 淸'(청)으로 청주의 지명을 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마다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일부는 지명의 한자화 정책 과정에서 중국 지명이 차용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또 다른 전문가는 △청주는 반왕건파(=친궁예파) 도시였고 △그런 반발이 완전히 제압됐기 때문에 '물맑을 淸' 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둘 다 근거는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조선시대에는 우리고장 '청주'와 발음이 같은 불이익을 당한 고을도 생겨났다. 지금의 함경도 '북청'(北靑)은 한자만 다를 뿐 본래는 발음이 같은 '청주'(靑州)였다.

조선 태조 이방원은 이 때문에 혼란을 느꼈는지 함경도 청주를 '북쪽에 있는 청주'라는 뜻에서 '북청'(北靑)으로 개명토록 했다. 이때 충북 보은도 지금의 충남 보령과 헷갈리면서 지금의 지명으로 개명됐다.

'군현의 칭호를 고치었다. 이조에서 소리가 서로 비슷한 각 고을의 칭호를 고치도록 청하니, 이에 청주(靑州)를 북청(北靑)이라 하고, (…) 보령(報令)은 보은(報恩)이라 하였다.'-<태종실록>

◇ 역사 속의 제 1호 청주시장

문헌상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라는 인물이다.

2014년의 청주시장과 역사속의 청주시장은 격이 달라, 비교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9주5소경의 '5소경'은 지금의 시(市)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우두머리는 시장으로 비교될 수 있다.

이같은 비교가 성립된다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元泰)라는 인물이 된다.

'3월,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 남원소경을 두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원문은 '三月, 置西原小京, 以阿삼수변+食元泰爲仕臣. 置南原小京, 徙諸州郡民戶分居之'로 돼 있다.

인용문 중 '阿삼수변+食'(아찬)이라는 품계는 17관등 중 제 6두품으로, 신분은 비색(緋色·주황색)으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원태라는 인물은 이때가 딱 한번으로, 그후로는 삼국사기 산라본기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청주목'의 강역

출범한 통합청주시와 조선시대 '청주목'의 강역, 즉 행정적인 범위는달랐다. 청주목의 행정적인 면적은 지금보다 크게 넓었다.

여지도를 보면 청주목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신수면'은 '수신면'의 오기다.

조선시대 청주목에는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24~25개의 면이 존재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1765)를 기준으로 할 경우 청주읍성 동쪽으로는 동주내면, 산외일면, 산내이상면, 산내이하면, 산내일면, 청천면이 존재했다.

반면 동북쪽으로 산외이면, 남쪽으로는 남주내면, 남일상면, 남이면, 남차이면, 주안면이 위치했다.

이밖에 서쪽으로 서주내면, 서강내일면, 서강내이면, 서강외일면, 서강외이면, 수신면, 덕평면, 북쪽으로는 북주내면, 북강내일면, 북강내이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경계개념이나 행정적인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월경지가 존재했다. 미국의 알래스카와 같은 경우로, 이를 '월경지'(越境地)라고 불렀다.(여지도 참조)

청주읍성 남쪽의 주안면(周岸面)과 서쪽의 덕평면(德坪面)이 에 해당한다. 주안면은 1895년 월경지 정리작업에 따라 지금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덕평면도 같은 해 전의면 일부가 되면서 지금의 세종시에 편입됐다.

왜 이같은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 △본래 청주목의 향소부곡 중 하나였다는 설 △청주목이 어물과 광물질을 조달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설 △청주 연고의 특정문중 관련설 등이 제기돼 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말 그대로 '청주 땅'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행정지역으로 편입된 곳이 있다. 바로 지금의 괴산군 청천면과 충남 천안시 수신면이다.

두 지역 모두 일제 행정개편 작업에 따라 지난 1914년 청주목에서 지금의 괴산군 청천면과 천안시에 편입됐다.

조선 최고의 책사로 불리는 한명회는 개성에서 태어나 주로 한양에서 생활했다. 그런 그가 천안시 수신면에 묻힌 것은 당시 일대가 청주목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명회는 청주 무심천 둑을 쌓고 또 망선루를 건축하는 등 생전은 물론 말년에도 관향 청주목을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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