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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현장탐방 - 시각적 음악이 흐르는 건축적 조각가 심재현

  • 웹출고시간2014.05.15 18:22:59
  • 최종수정2014.05.15 18:23:19

조각가 심재현 선생은 전형적인 충북 사람이다.

1938년 6형제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6개월 후 부친께서 운명하셨기 때문에 어머님 사랑으로 자랐고 또한 큰형님을 부모님 같이 생각하고 성장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본향(本鄕)은 괴산이다. 그러나 조선조 말 정3품 벼슬 지내셨던 부친께서는 일제 점령시대에는 한 때 중국에서도 생활하셨고 충주, 괴산, 원주 등지에서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심 작가의 출생은 원주였고, 초등학교는 충주에서 입학하였으나 4학년 때 진천 삼수초등학교로 전학 와서 그 후로 줄곧 진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진천을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 왔다.

진천중학 졸업 후 진천농고를 국비 장학생으로 다녔지만, 재학 시절 영화 '해저 2만 리' 속의 선장의 오르간 연주에 반해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의 꿈을 갖게 된다.


또한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고 음악을 즐기면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꿈도 갖지만 고 2학년 때부터 미술 쪽으로 관심이 바뀌기 시작한다. 어쨌든 고교 시절부터 남달리 예능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심재현 작가의 예술가적 행동은 지속적으로 변화무쌍하게 발전해간다.

그러나 대학을 일반계열로 진학하고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1년 간 교사 생활도 하지만 결국 1965년 홍익대 미대 조각과 3학년에 학사 편입하여 1967년 졸업한다.

심 작가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였다. 그의 대학시절 동급생들은 한창조, 이영길, 김경옥, 박윤자 등으로 현재 70 초반의 작가들이니 모두 심 작가보다 4~5세 연하의 동기생들이다.

1967년 홍대를 졸업하고 미국 이민의 꿈을 갖고 어학공부를 시작한 후 1971년이 되어서 미국인 히피 친구의 권유로 캘리포니아 드림(Dream)의 꿈을 안고 L.A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오티스 미술대학을 수료했지만 이 때까지도 심 작가는 미국에서도 이렇다 할 작가적 활동을 펼치질 못하였다.


그렇게 L.A에서 생활하던 중에 평소에 지녔던 예술아카데미 설립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첫 단계로 이곳에서 '시몬손(Simmonson) 갤러리'를 창립한다.

'시몬손'이란 명칭은 자신의 성자(姓字) 심(沈)과 부인 심미자씨의 성자 손(孫)을 합성하여 만든 이름으로 1983년 L.A 코리안 타운에 설립하여 부인(미국명, 캐롤 심)께서 운영하게 된다.

필자가 청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시, 자매대학인 미국 샌디에이고 U.S.I.U 대학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인 1986년 6월 하순경에 홀로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고 샌디에이고를 떠나 L.A 코리안 타운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낯선 코리안 타운가(街)를 기웃거리며 지나가다가 '시몬손 갤러리'라는 한글 간판을 발견하고는 너무 반가워서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갤러리가 20년 전 홍익대학 재학시절 만났던 고향 선배 심재현 선생께서 운영하는 갤러리인줄 알게 되면서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그 후로는 주말이 되면 L.A를 찾게 되고, 그 곳으로 이민을 와서 작가생활을 하는 대학 친구 선후배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필자는 3년이 지나 1989년 L.A 다운타운에 있는 'L.A아트코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게 되어서 다시 L.A을 방문했을 때에는 심 선생께서는 주로 한국 교포를 상대로 운영하던 '시몬손 갤러리'가 아니라 미국인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갤러리인 'LACA 갤러리"라는 메이저급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4.29 흑인폭동'이 발생되며 결국 갤러리 운영도 적자에 시달리게 되면서 부득이 문을 닫게 된다.


'메이저급 갤러리 운영'도 '시몬손 아카데미 설립'의 아메리카 드림도 모두 실패하고 만다. 농업학교에서 상과대(商科大)로 다시 미대(美大) 진학으로 진로를 바꾸듯이 심재현 작가는 음악가의 꿈에서 조각가로, 아카데미 설립과 갤러리 경영의 꿈을 이루고자 동분서주 하면서 이민생활 25~6년을 보내지만 결국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몇 십 년 동안, 변신과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그에게 변하지 않는 딱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이었다. 심 작가는 어린 시절 남편을 여의고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셨던 어머니 황옥년 권사 밑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종교적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에게 신앙심이란 절대적이었다.

그가 뉴욕으로 가고자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L.A에 정착하게 된 동기도 임동선 목사(공군 군정감 출신)를 만나면서 그와 함께 '동양선교회' 창립멤버로 참여하게 되는 종교적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갤러리를 운영하고 교회에서 20년 동안 지휘자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조각가다"라는 생각을 포기한 적이 없이 살아왔음을 말한다.

그의 내면속 깊이 응어리져 있던 작가적 정신은 1996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후배 조각가 연제동씨의 집에 입주를 하고 한국에서 작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있던 심 작가에게 한국에 정착하게 되는 결정적 명분이 서게 된다.

귀국한 지 1년이 지난 다음해인 1997년은 대학을 졸업한 지 30년이 되고, 심 작가의 나이 60이 되던 해이다. 한국 조각사상 최고 금액의 최대 조형물이었던 '광주5.1 8기념조각공원' 조형물 재 공모에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1등으로 선정되며 40억원의 상금을 수상하게 된다.

조형물의 스케일이 워낙 크기 때문에 순 이익은 10억 남짓하였지만, 귀국 1년 만에 올린 쾌거로 2002년에는 서울 평창동에 작업실을 공유한 새로운 주거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이때부터, 26년 동안 미국 현대미술 현장에서 그의 몸에서 숙성되고 있었던 현대미술의 감성과 개념은 그의 신앙심과 탤런트와 융합되면서 폭발되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의 컨셉은 명제 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의 신앙이 기저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의 완성해가는 과정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중세미술처럼 꼭 기독교적이지 않다. 비록 바이블을 통하여 창조주의 창조의 영감을 받을지언정 '창작'에 독립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각가 심재현은 현대라는 시대에 적응된 구조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축적 조각가이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눈에는 모든 사물이 삼차원의 매스(덩어리)를 갖춘 존재감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귀국 첫 개인전(FUSION 갤러리, 청담동)을 가졌다. 이 때 그의 작품에 대하여 피터 프랑크(미국 미술평론가)는 "힘에 넘치는 '움직임'이 그의 예술의 축이다. 그 움직임은 '시각적 음악'이다" 평하였다. 또한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하여 "두 개의 상충하는 요소 즉 유기적인 생명 형상과 무기적인 구조의 결합이다"고 평하였다.

그 후, '세줄 갤러리'에서의 입체와 설치 작품 개인전, 한빛 갤러리에서의 조각전, 그림손 갤러리에서의 심재현 회화전, 지난 해 '이브 갤러리'에서의 평면 회화전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 사는 날까지 내 손이 쉬지 않게 해주세요!" 심재현 작가는 말과 행동은 느린 충청도 진천 사람이지만, 그의 손은 76세의 지금도 새로운 예술을 위하여 쉴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역 작가이다.

글/김재관(미술학박사, 쉐마미술관장)

사진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심재현 선생 주요경력

진천 삼수초등학교, 진천중학교, 진천농고 졸업

홍익미대 조각과 졸업

L.A 오티스대학원 수료

1971년 미국으로 이민

1983년~1992년까지 L.A에서 '시몬손 갤러리' 및 'LACA 갤러리' 경영

1996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서울에 정착

1997년 광주5.18기념조각공원 공모 당선 및 제작

2012년 대표작 제작

2013년 <주님 옷자락 잡고> 제작

그 외에 조형물 다수 제작 및 개인전 다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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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충북 이노비즈 기업들이 연결을 통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한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은 지역 내 탄탄한 경제 기반으로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30일 취임한 안준식(55) 신임 이노비즈협회 충북지회장은 회원사와 '함께 성장하는 기술혁신 플랫폼'으로서 이노비즈협회 충북지회 역할을 강화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안 신임 회장은 "취임 후 가장 먼저 해야할 부분은 이노비즈기업 협회와 회원사 위상 강화"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대외협력위원회(위원장 노근호 전 충북테크노파크 원장) △경영혁신위원회(위원장 이미연 ㈜유진테크놀로지 대표) △회원사 협력위원회(위원장 한연수 ㈜마루온 대표) △봉사위원회(위원장 함경태 ㈜미래이앤지 대표) △창립 20주년 추진위원회(위원장 신의수 ㈜제이비컴 대표)로 5개 위원회를 구성했다. 안준식 회장은 도내 회원사들이 가진 특징으로 빠른 적응력과 협력네트워크를 꼽았다. 그는 "충북 이노비즈 기업은 제조 기반 기술력과 신사업으로의 적응력이 뛰어나다. 첨단산업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다수 분포해 있고, 산업단지 중심 클러스터화도 잘 이뤄져 있어 협력 네트워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