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은 땅이 기름지고 서울서 가깝기 때문에 토착 성씨보다는 외래 성씨가 많이 유입, 번성했다. '생거진천'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송강정사를 세운 연일정씨, 금성군사우를 건립한 청주이씨, 신잡과 신립을 배출한 평산신씨 등이 여기에 속하고 있다.진천 이원를 세거지로 갖고 있던 평산신씨는 형 신잡의 선조임금 호종과 동생 신립의 탄금대 전투 전사를 계기로 '원대한 가문'을 형성하게 됐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신잡의 아들 신경희(申景禧·?∼1615)도 원대한 가문을 이어갔다. 그는 아버지 신잡의 영향력 때문에 음보로 중앙에 진출했다. 음보(蔭譜)는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의 자제로 과거에 의하지 않고 등용된 벼슬아치를 말한다.신경희는 고산현감, 면천군수, 중화부사 등을 역임하고 행주산성 대첩보(大捷報)를 제일 먼저 국왕에게 보고하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다음은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신경희의 행주산성 승리 보고 내용이다.상이 이르기를, "성위에서 무엇으로 방어했는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창이나 칼로 찌르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으며 혹은 화살을 난사하기도 했는데, 성중에서 와전(訛傳)되기를 '적이 이미 성 위에 올라 왔다'고 하자 성중의 군졸이 장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사망, 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선 조정은 파천(播遷)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파천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일을 말한다. 이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선조 자신이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 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우승지 신잡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수찬 박동현(朴東賢)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輦·가마)을 멘 인부도 길 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 하면서, 목놓아 통곡하니 상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왜군의 북진 속도는 무척 빨랐다. 자칫 임금까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실록에 등장해 있는 내용이다. '앞서 적들이 충주에 도착하여 정예병을 아군처럼 꾸며 경성으로 잠입시켰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았다. 따라서 역대 왕들은 미래 예언을 믿는 도참사상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초기에 도참서적을 집에 간직하지 말 것을 명령하기도 한다.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동천록, 통천록, 호중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효유는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이 도탄에 빠질 때는 어김없이 도참사상이 등장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무학이 지은 도참기가 나돌았다. 선조실록에 등장해 있는 내용이다. '국초에 승려 무학이 지은 도참기에 역대 국가의 일을 말했는데, 임진년에는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자년(1386)으로부터 세상에 행해지다가 임진년에 이르러서 크게 성행했으나 아무도 그 말을 해석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조정에서 순변사 신립을 보내어 방어하
실록의 표현을 빌면, 왜군들은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신립과 그의 종사관 김여물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달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당시 충주목사 이종장은 아들 희립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탄금대 앞 개활지에서 전사했다. 그 와중에 사잇길로 도망을 쳐 살아남은 장수가 있었다. 순변사에 임명됐던 이일(李鎰·1538∼1601)이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제 1군은 파죽지세로 밀양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조선 조성은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임명, 급히 경북지역으로 파견한다. 순변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임시로 단기간 파견되는 특사를 말한다. 선조실록은 이때의 조정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청대하였으나 (임금은)비답하지 않았다. 계청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냈다. (…)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청대'는 신하가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던 일을, '비답'은 임금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선조 22년(1589) 비변사의 대신들은 각자 무신들을 추천한다. 능력있는 무신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국방력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책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이때 대신 윤탁연(尹卓然, 1538~1594)은 이종장(李宗張·?~1592)을 추천했다. 이런 흐름 속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 정사와 부사로 보내, 일본을 정탐케 한다. 그러나 둘이 귀국해 올린 보고서 내용은 정반대였다. 서인 황윤길은 "장차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임으로 대배해야 한다"고 보고를 했다. 반면 동인 김성일은 "일본은 침략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을 올렸다. 당시 조정은 동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은 묵살됐다. 당시 서인들은 이른바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다. 따라서 선조는 서인이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봤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일을 말한다. 이때 서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등이 대거 귀양을 가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신립이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달천강에 투신할 때 함께 자살한 인물이 있었다. 신립의 종사관이었던 김여물(金汝山+勿·1548~1592)이다. 종사관은 장수를 보좌하는 장교로, 종6품에 해당한다. 김여물은 임란 직전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정철(鄭澈·1536~1593)의 사람'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돼 있었다. 정철은 이때 동인의 모함을 받고 막 실각된 시기였다. 정철은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당시 영의정)와 함께 광해군 책봉을 건의키로 했다. 이는 이산해의 계략이었다. 이 때 선조는 인빈김씨에게 빠져 있던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을 책봉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철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같은 그 파장은 같은 당인 김여물에게도 미쳤다. 옥중의 김여물을 구해준 사람은 서애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그가 무략에 뛰어난 것을 알고 자기 막중(幕中), 즉 참모로 쓰려고 했다. 그러자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인간 됨됨이를 알고 자기 종사관으로 임명, 함께 출전하게 된다. '신립이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
임진왜란 참패의 원인을 두고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전략부재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새재에서 지키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칠 때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 성과를 거뒀다. 전문가들은 신립의 이 같은 성향이 협곡보다는 탄금대 앞 개활지에 진을 치게 한 것으로 봐왔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일부 사가는 신립이 조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이다. 같은 날 왜군은 벌써 새재 밑 문경에 도착해 있었다. 충주~새재와 문경~새재는 거리상 비슷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새재에 도착할지는 서로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런데 새재는 충주 사면이 더 가파르다. 이 점이 신립의 판단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일부 사가는 보고 있다.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은 익히 알려진대로 배수의 진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처음에 150명의 군사와 함께 서울을 출발한다. 이후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모집병을 끌어들이면서 군사가 8천여명으로 늘어난다. 제승방략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사를 지역단위별로 모집하고, 이를 지휘할 장수는 중앙에서
얼마전 충암 김정(金淨)의 후손들이 충암이 남긴 고서와 고문서를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했다. 기탁 목록에는 김정의 문집인 충암집,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 만동묘정비 탁본, 경주김씨족보 초고본, 송시열이 제주도에 지은 농맹혹문정의통고 등이 포함돼 있다. 김정은 1486년 지금의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1살인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사약을 받고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일부 한문학자를 제외하고 그를 크게 주목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명현 조광조와 '절친'의 관계였다. 따라서 중종 때의 개혁 정책은 거의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됐다. 도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이때 폐지됐고, 대신 숨은 인재를 천거 형식으로 선발하는 현량과(賢良科)가 도입됐다. 특히 그는 '국왕도 현인·철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기(修己), 즉 자기수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현철군주론이라고 한다. 그는 연산군의 학정이 군주의 자질미달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됐다. 중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유학(幼學) 윤세정 등이 상소하
비례부동(非禮不動),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옥조빙호(玉藻氷壺), 만절필동(萬折必東), 충효절의(忠孝節義). 괴산 화양구곡에 암각 글씨로 새겨진 표현들로, 모두 우암 송시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중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뜻인 비례부동은 첨성대 초입에 새겨져 있다. 첨성대는 화양구곡 제 6곡에 해당한다. 바로 옆에는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비례부동 글씨를 쓴 인물이 숭정황제임을 알게 하고 있다. 숭정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이다.우암이 중국의 여러 황제 중 유독 명나라 의종의 친필을 화양동에 새긴 것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암 권상하가 스승 우암의 유언을 받들어 세웠던 만동묘에는 명나라 의종 외에 신종의 위패가 봉안됐다. 신종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잘 돌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환관들이 정사를 대신 봐주는 환관정치가 판을 쳤다. 그러나 신종은 조선전쟁, 즉 임진왜란에 대해 관심이 무척 컸다. 사가에서는 그 이유를 이른바 '속방' 개념으로 보고 있다. 이는 속국과는 다른 개념으로, 중국은 천자의 나라가 되고, 주변국은 그 천자의 권력을 존중하는 질서에 따라 외교관계를 맺고 교
행궁(行宮)은 임금이 장기 출타를 할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을 말한다. 달리 '행재소' 또는 '이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병을 치료하거나 민정을 살피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때 단기간 출타할 때는 막사에서 지내지만, 장기간 출타를 할 때는 별궁을 급조했다. 초정약수는 세계 3대 광천수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특유의 톡 쏘는 느낌은 다른 약수와 크게 구분되는 편이다. 몇해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초정약수 성분을 조사했다. 그 결과, 초정약수의 톡쏘는 느낌은 탄산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성원리는 다음과 같다.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는 메탄, 유화수소, 이산화탄소, 질소 등의 기체 성분을 갖고 있다. 이중 이산화탄소가 지하 심층수와 만나면서 만들어낸 것이 탄산수이다. 톡 쏘는 맛은 탄산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초정약수의 이산화탄소 분압은 다른 약수보다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한다. 초정약수의 알싸한 맛에는 철 성분이 관여를 한다.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탄산수는 용출되는 과정에서 암석층을 만나게 된다. 이때 암석층내 철성분이 탄산수에 녹아 들어간 후 지표로 용출하게 된다. 여기서 알싸한 맛이 발현된다. 초정일대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파리하여 우습게 생기었지만 마음만은 명랑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시정간(市井間)에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온달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온달이 실제 바보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나, 대체로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보고 있다. 그 근거는 평강공주와 결혼할 당시 그의 관등이 '大兄'이었기 때문이다. 대형은 고구려 조정의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직위다.5~6세기 무렵의 고구려 조정에는 이른바 '국내성파'와 '평양파'가 존재했다. 사가들은 위와 같은 정황을 들어 온달 가문이 본래는 '국내성파'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장수왕의 평양천도 때에 '평양파'가 득세했고, 여기에 온달 가문은 정변에 휘말리면서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조정이 어떤 필요성에 의해 '국내성파'를 껴안으면서 온달도 중앙정계에 복귀했고, 이것이 설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라는 것이다.이때의 어떤 필요성은 남쪽에서는 나제연합군이 한강유역에 쳐들어왔고, 북서쪽 국경에서는 돌궐이 동진해오는 것을 의
중원고구려비(국보 제 205호)는 높이 2.3m, 폭 55cm로, 글자 한 개의 크기가 대략 3.5cm 정도 된다. 광개토대왕비와 마찬가지로 사면 모두에 글자가 새겨진 4면비다. 본래 예서체 한문 글자가 400여자 정도가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되나 마모가 심해 현재는 25% 정도인 100여자 정도만 판독이 가능하다.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등장해 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甲寅'이라고 쓰여진 日간지이고, 또 하나는 '신유년'이라는 年간지다. 이를 근거로 건립연대를 추정한 결과, 전자는 장수왕37년(449), 후자는 장수왕 69년(481)이 된다. 현재 두 가지 설중 '449년설'이 보다 많이 인용하는 편이다. 비의 성격은 발견 당시에는 척경비설이 유력했다. 즉 국경을 새로 개척하고 세운 비로 봤다. 그러나 비문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판독되면서 지금은 사실상 '회맹비'(會盟碑)로 굳어졌다. 회맹비는 어떤 사건이 원인이 돼 양자 사이에 임금과 신하, 또는 형과 동생의 관계를 비문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중원고구려비 비문에는 '세세위원 여형여제'(世世爲願 如兄如弟)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직역하면 '영원토록 형제같이 지내기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