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빌미로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국문받을 때에 한 짓도 죽을 만하다. 또 조광조가 시종직에 오래 있었으므로 나도 그 사람을 조금은 아는데 그 마음이 곧지 않으며, 김정은 우혹(愚惑)하다"하매…'- 조광조는 능주(지금의 전남 화순)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유배지에서의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하명이 내려졌다. 여러 사료가 이 부분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보인다. '드디어 약을 마셨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금부의 나졸들이 나가 목을 조르려 하였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하찮은 신하의 머리를 보전하려 하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고 더욱 독한 약을 마시고 드러누워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으니, 바로 12월 20일로…'.- 조광조의 시신은 죽어에도 바로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 한 계절을 건천에서 보낸 끝에 이듬해 봄에야 안장됐다. '소 수레로 관을 용인으로 옮겨다가 이듬해 봄 선산
조선시대 기녀들은 기생(妓生), 은근자(殷勤者), 탑앙모리(搭仰謀利) 등 3등급으로 분류됐다. 이중 기생은 어떤 모임에서 가무로 흥을 돋구는 여자, 은근자는 남들 몰래 매춘하는 부류, 탑앙모리는 매춘 자체만을 업으로 삼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기녀들에게는 이른바 수모법(隨母法)이 엄격하게 적용됐다. 즉 어머니가 기녀이면 그 딸도 운명적으로 기녀가 돼야 했다. 이들의 공식적인 활동기간은 15~50세까지로, 쉰살이 넘으면 퇴기(退妓)라고 불렀다. 기녀와 관련해 해어화(解語花)라는 자못 운치있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시 양반들은 자신의 시와 문장을 알아주는 기녀를 그렇게 불렀다. 육체를 탐닉하다 보니, 되레 기녀들에게 아부하는 표현으로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고위관료 중 기녀와 관련해 스캔들을 자주 빚은 인물로 유운(柳雲·1485~1528)이 있다. 그가 충청도관찰사로서 우리 고장 청주, 진천 등지를 순회하던 중 기녀를 끼고 놀았던 모양이다. 당시 관찰사 직무공간인 감영은 공주에 위치했다. '큰 눈이 내렸다. 조계(朝啓)를 들었다. 지평 이연경(李延慶)이 아뢰기를, "듣건대, 충청감사 유운(柳雲)이 갈려올 때 청주 기녀
조선시대 수사용어 중에 공초(供招)와 공초(供草)가 있다. 우리말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것에서 보듯, 그 뜻은 다르다. 공초(供招)는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에 비해 공초(供草)는 다소 포괄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죄인을 신문하는 것을 취초(取招), 자백을 받는 것을 봉초(捧招), 두 번 이상 신문하는 것을 갱초(更招)라고 했고, 이를 통털어서는 공초(供草)라고 불렀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와 관련, 많은 사람들이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만이 조의제문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김일손과 함께 당시 사관으로 있었던 권경유(權景裕·?∼1498)도 관여했다. 추관들에 의한 공초(供草)가 시작됐다. 권경유는 당당하게 심문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의금부 관리들에게 '비록 만세후라도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표현을 넣어줄걸 요구한다. '경유(景裕)는 '이보다 더할 수 없다.'는 구절 아래에 '비록 만세 후라도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넣어 달라고 청했다. 추관이 듣지 아니하니, 경유는 붓을 던지고 서명(署名)을 거부했다. 급기야 고문을 당했
승정원일기는 승정원 소속 7품직인 주서(注書)가 작성했다. 주서는 승정원일기 작성을 위해 왕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동석, 대화 뿐만 아니라 행동도 묘사하듯 기록했다. 영조와 관련된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영조 40년 10월 1일, 여느 때와 같이 저녁공부(夕講)를 마치고 약방에서 들인 탕제를 마시던 영조는 갑자기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놀라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성종이 한때 자신의 지어미였던 폐비윤씨(연산군 생모)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이때 사약을 운반한 책임자급 인물은 이세좌(李世佐)이고, 실무자는 당시 승정원 주서였던 권주(權柱·1457~1505)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石+霜)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 권주로 하여금 전의감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권주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한 번 보기만 하면 잊지 아니하였다. 8세에 사서를 읽고, 10세에 경서와 사서를 통달하였으며, 13세에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문구를 지었다'.-
우량목에 대한 조선시대 산림정책은 전기는 금산(禁山), 후기는 봉산(封山)으로 대표된다. 이중 봉산제도는 '백목지장(百木之長·여러 나무중 으뜸)인 소나무 외에 특별용도를 지닌 다른 나무도 적극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황장목을 보호하는 산림은 황장봉산(黃腸封山), 밤나무는 율목봉산(栗木封山), 참나무는 진목봉산(眞木封山)이라고 각각 불렀다. 당시 황장목은 관(棺), 밤나무는 신주를 만드는데, 참나무는 배못을 만드는데 매우 요긴하게 사용됐다. 사료를 보면 우리고장 남한강 주변에도 봉산이 많이 설정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남한강 뗏목문화도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로 온 인물이 이덕숭(李德崇·?~?)이다. 성종이 직접 그에게 산림과 관련된 하명을 내린다. "귀후서(歸厚署)의 판목(板木)을 강변에 위치한 모든 고을에 나누어 배정하고 이를 무역(貿易)하여 물에 띄워 내려 보낸 지 오래이다. 도내의 단양군은 백성들이 본래 피폐하고 경내의 모든 산에서 해마다 나무를 베어 내어 남은 제목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한둘의 민호에서 독단으로 판비할 바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부근 경상도의 풍기·예천 등 경계에서 베어오는 한 나무에 끌어오는 인부가 거의
조선시대에는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을 커다란 흉조로 생각했다. 왕을 상징하는 태양이 달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식이 예상되는 날에는 구식의(救蝕儀)라는 의식을 올렸다. 이는 태양이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금을 포함한 모든 신하가 소복을 입고 기원제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일식이 있으므로, 임금이 소복(素服)을 입고 인정전의 월대 위에 나아가 일식을 구(救)하였다. 백관들도 또한 소복을 입고 조방(朝房)에 모여서 일식을 구하니 해가 다시 빛이 났다. 임금이 섬돌로 내려와서 해를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추보(推步) 하면서 1각(刻)을 앞당긴 이유로 술자(術者) 이천봉(李天奉)에게 곤장을 쳤다'.- 본문 중 '추보'는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행동을 말한다. 내용만 보면 일식이 오래 진행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과 관계없이 당시 천문관의 예상이 조금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1각(刻)을 빨리 예측한 이유로 천문관 이천봉에게 곤장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때의 '1각'은 지금으로 치면 14분 정도가 된다. 조선은 매해 연말 '동지사'라는 사신을 중국에 보내 달력을 얻어왔다. 이것으로 조선의 역법을 삼았다. 그러나 중국의 땅과 환경이 다르다 보니
사약을 받은 폐비윤씨(연산군 생모)는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묻혀졌다. 폐비가 되기 전까지 일국의 왕비였으나 그녀의 묘비에는 '尹氏之墓'가 새겨졌다. 이른바 민묘(民墓)라는 뜻이다. 한때 지아비였던 성종은 "이렇게까지 해준 것도 과분하다"는 투의 표현을 한다. '어서(御書)하기를, "단지 제사 의식만 정하면 되지 어찌 명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명호를 더하려 하면 이것은 바로 추숭(追崇)하는 것이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겠는가. 죄지은 사람이 제사나마 받는 것으로 족하다"하였다'.- 연산군은 보위에 오른지 얼마 안 돼 임사홍의 고자질로 자신의 생모가 억울하게 사사된 것을 알았다. 그는 어머니 폐비윤씨의 한을 풀어주고, 또 묘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했다. 먼저 연산군이 말문을 연다. '전교하기를, "성인(聖人)의 칠거(七去)의 법이 있으니, 만일 그런 죄라면 버리고 말 것이지 하필 죽여야 하는가.(…) 성종(成宗)께서 명철한 임금이시지만, 어찌 잘못한 일이 없겠는가· 그때의 재상들이 극력 간하였다면 반드시 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형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반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과 예를
조선시대 때 당인(黨人)은 같은 당파, 당여(黨與)는 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거의 비슷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이원(?~1504) 은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당인으로 분류됐다. 먼저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신문에 답하는 내용이다. '윤필상 등이 물으니, 일손이 대답하기를, "신종호는 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는 종직의 처제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채수·이계맹·이주·이원은 제술(製述)로 과차(科次)받았고… " 하였다'.- 본문중 이원의 이름이 보이고 있고, '제술로 과차받았고'라는 표현은 지금으로 치면 시문 지도를 받은 것 쯤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문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이원은 김종직과의 관계를 가급적 희석시키려 한다. "신은 일찍이 종직에게 수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직이 동지성균으로 있을 적에 신이 생원으로 성균관에 거접하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를 차운하여 종직의 과차로 나아가니, 종직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일손이 신더러 그 제자라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오며…'- 결국 이원은 김종직과의 당인 관계가 인정돼 1498년(연산군 4)부터 곽산, 나주 등지를 이배
"지난 정유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와 비상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본문중 건시는 홍시, 비상은 극약의 재료를 의미한다. 12명의 부인을 뒀던 성종은 폐비윤씨를 극형에 처하기로 최종적인 결심을 하고 있었다. 살려두려 해도 어머니 인수대비의 태도가 워낙 완고했다. 형식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윤씨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대신 채수(蔡壽·1449~1515)라는 인물은 완곡한 어법으로 반대했다. '채수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諫諍)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중 채수 졸기 그는 이때의 간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정황상 채수는 합리적이면서 온정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진다. 해당 사례가 그 유명한 '어을우동'(於于同,·?~1480 사건에서도 읽혀진다. 일반인에게는 '어우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록은 시종 어을우동으로 쓰고 있다. '좌승지 채수와 좌부승지 성현 등은 아뢰기를, "어을우동의 죄는 비록 중하
두시언해(杜詩諺解)는두보(杜甫)의 시를 한글로 처음으로 번역한 작품을 말한다. 이를 번역한 사람은 유윤겸, 유휴복, 조위 등 3인이다. 세종 때 시작해 성종 12년(1481)에 완성됐다. 전회에도 밝혔지만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사림파를 손보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차에 김종직의 '조의제문' 문장이 발단이 돼 일어났다. 서두에 거론한 3명 중 조위(曺偉·1454~1503)는 김종직의 처남이면서 어려서 그에게 배웠다. '전교하기를, "그 사초에 기록된 종직의 제자 신종호 등 약간 명도 과연 모두가 일손처럼 수업을 하였느냐,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느냐" 하였다. 윤필상 등이 물으니, 일손이 대답하기를, "신종호는 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는 종직의 처제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무오사화(연산군 4)가 일어날 때 조위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는 요동 쯤에 이르러 국내에서 정변이 일어난 소식을 들었다. '동지중추부사 조위를 명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축하하게 하였다. 이해 가을에 사옥(史獄)이 일어났는데, 조위 역시 연류되어 일이 망칙하게 되었었다. 조위가 돌아올 때 요동에 당도하니 수행원들은 모두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1482년(성종 13년) 음력 8월 16일. 조정에서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를 계속 살려둘 것인가, 사약을 내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이파 등이 사약이 마땅하다고 발언했다. 사약 집행자는 이극감의 아들인 형방승지 세좌(世佐·1445~1504)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石+霜)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그 집에 유숙하라'는 것은 그날밤 사약을 집행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소수지만 원자(연산군)의 생모인 점을 들어 극형만은 안된다고 말한 인물이 있었다. 손순효(孫舜孝·1427~1497)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가 소를 올리기를,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 (…)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조선시대 법률 제정은 검상조례사( 檢詳條例司)라는 곳에서 전담했다.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태조 6년)도 검상조례사에서 편찬했다. 그 책임자를 검상(檢詳)이라고 불렀다. 검상은 비록 정5품의 관직이었지만 의정부의 모든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상피법이 적용되는 등 이조전랑과 함께 요직 중의 요직으로 인식됐다. 1455년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첫 검상으로 임명한 인물이 이극감(李克堪·1427∼1465)이다. 그는 시와 서에 모두 밝았다. 다음은 세조 등극에 도움을 준 인물들에게 내린 공신 교서의 내용이다. 본문 중의 '경'은 이극감을 말한다. '생각건대, 경은 시·서의 명가(名家)에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후예로서, 강개하여 경국제세하려는 뜻이 있었고 마음이 활달하여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동문선(東文選)은 조선 성종 때 왕명을 받아, 양성지· 서거정 등이 우리나라 역대 명시를 책으로 엮은 시문집을 말한다. 이극감의 한시가 동문선에 비교적 많이 수록돼 있다. '강가에 눈이 녹아 강물이 많아졌는데(江上雪消江水多) / 밤이 되어 들리는 죽지가 소리(夜來聞唱竹枝歌) / 그대와 이별한 뒤 무한한 생각(與君一別思何盡) / 천리
[충북일보] 옥천의 A 초등학교에서 동급 학생 간 집단 괴롭힘을 의심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경찰과 교육 당국이 조사하고 있다. 옥천 A 초등학교 6학년생 아들을 둔 B씨는 "아들이 동급생 6명으로부터 장기간 상습적인 언어와 신체 폭력을 당했다"라며 "이 사실을 아들의 카카오톡 대화방 등을 살펴보고 나서 알았다"라고 한 언론에 알렸다. B 씨는 "지난해부터 아들의 팔과 다리 등에 자주 멍이 들었고, 최근엔 친구 집에 다녀온 뒤 얼굴과 은밀한 신체 부위까지 멍들어 심각성을 인지했다"라고 주장했다. 또 "가해 학생들이 아들에게 음식값을 대신 내게 하거나 세탁비를 받아 내기도 했다"라고 했다. B 씨는 이 내용을 학교와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옥천경찰서는 "초등학교 재학생인 아들이 수개월 간 같은 학교 다수의 남학생에게서 신체·정신적 위해를 당했다"라는 내용의 학부모 진정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교육 당국도 경찰 조사와 별개로 이 사안을 이미 관리하고 있다. 해당 학교는 지난 11일 학교폭력 전담 기구를 열었고, 이튿날 B씨의 아들을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옥천교육지원청도 다음 달 1일 학교폭력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