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농서로는 농사직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세종 때 정초, 변효문이 공동으로 지은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농법을 처음으로 다룬 농서로 유명하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농서로, '중요한 것을 새롭게 취한 책'이라는 뜻의 촬요신서(撮要新書)가 있다. 상·하 두 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농업과 함께 주역, 세시적인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농업적인 내용을 훨씬 많이 다루고 있어, 주로 조선 전기의 농서로 분류되고 있다. 이 책은 세종 때 지어졌다. 내용은 '경가'(耕稼·갈고 씨뿌림))와 '잠상'(蠶桑·누에)으로 크게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사고의 모든 출발점이 주역, 그중에도 음양오행과 직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 내용은 웃음이 큭큭! 나올 정도이나 어떤 내용는 지금의 농업 재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논밭 갈이를 할 때 가을갈이는 깊게 하고 봄갈이나 여름갈이는 얕게 해야 한다.' '보리에는 눈이 좋은 바 겨울에 눈이 많이 안 내리면 여물지를 낳는다'. '나무심는 길일: 갑술, 병자, 정축, 기묘, 계미, 임진일이 길하고 병술, 임술일의 2일은 흉하여 마땅하지 않다.' '잠신(蠶神)에게 제사함: 정월 오(午)일 원유
조선시대 때 충북에는 보은(후에 군으로 승격), 제천, 회인, 연풍, 음성, 청안. 진천, 영춘, 영동, 황간, 청산 등 11현(縣)이 존재했다. 이들 현에는 종6품 외관직인 현감이 파견됐다. 현감의 임기는 6년으로 관찰사의 3배에 해당했다. 이처럼 현감 임기가 의외적으로 길었던 것은 중앙 관료들의 지방근무 기피현상과 관련이 있다. 자원자가 많지 않다보니 임기를 길게 하는 방법이 택해졌다. 조선 세종 때의 우리고장 영동 현감으로 곽순(郭珣)이라는 인물이 부임해 왔다. 이 즈음 영동지역은 계속된 가뭄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었던 모양이다. 곽순의 하직 인사를 자리에 세종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한다. '영동 현감 곽순(郭珣)과 신천현감 박기명(朴基命)이 하직을 고하니, 불러들여 보고 곽순에게 이르기를, " 그 도에는 근래에 실농하여 백성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 항상 구휼을 더하여 형벌을 삼가고 농사를 장려하라" 하고…'- 그러나 영동지역의 식량난은 조정에서 보기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 같다. 곽순은 올린 상언에는 "10명 중 8,9명이 굶고 있다"고 적혀 있다. 상언(上言)은 신하가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을 말한다. 간관(諫官)이 올리는 상소(
얼마전에 충주 팔봉서원과 음성 지천서원에 제향된 인물로 김세필(金世弼·1473∼1533)을 소개한 적이 있다. 생전의 그는 두번의 사화(史禍)를 겪었다. 그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 묘의 이장 문제로 연산군에게 밉보이면서 거제도로 유배됐다. 1차 유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산군이 종종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났다. 그는 기묘사화 때 또 한번의 고초를 당했다. 왕도정치를 지지했던 그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간언하다 매를 맞고 유춘역(留春驛)이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그는 중도에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어떤 사학자는 이때를 충주사림의 절정기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연경, 이자, 노수신 등이 이 언저리에 등장한다. 그 평화는 아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늦게 얻은 자식으로 김저(1512∼1547·3남)가 있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어사로 파견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 일파를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때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으로 있으면서 "소윤이 너무 많은 사
조선시대 '예무이적'(禮無二嫡)의 논리가 있다. 이는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 아내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때문에 첩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서자가 돼야 했다. 이 논리는 이른바 종모법(從母法)을 통해 세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부계가 양반이라도 모계가 천인이면 그 자식도 천인으로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그 반대인 종부법(從父法)도 한시적으로 시행됐다. 이는 어머니가 첩이라도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도 양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보면 좋은 의미로 보일수 있으나, 이 경우 양인이 된 첩의 자식은 부역을 의무적으로 져야했다. 왕족출신 서자인 이몽학(李夢鶴·?∼1596)이 시국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사료에는 잘 기술돼 있지 않다. 그는 1596년(선조 29)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함락하고, 이어 청양 등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당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성문을 닫은 채 방어에만 급급했다. 이때 사태를 반전시킨 벼슬아치가 신경행(辛景行·1547∼1623)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연찮게 난을 진압하는데 일정부분 공을 세우게 된다. '목사 홍가신은
우리나라 안경은 임진왜란 때 유입됐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몇해전 조선시대 김성일이 사용하던 실물 안경이 그의 후손들에 의해 공개됐다. 김성일은 황윤길과 함께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인물이다. 이듬해 귀국한 두 사람은 상반된 보고서를 내놨다. 정사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반면 김성길(金誠一)은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는 짧은 기간이나마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보고 내용중 동인인 김성일 것이 채택됐고,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안경을 썼을 확률이 높다. 이와 관련 국내 안경광학과 한 교수는 "일본이 아닌 중국을 거쳐 유입된 것 같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안경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정조실록에서 그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정조는 그러나 안경쓰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전회에 구수복이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조좌랑이라는 직책에서 파직되어 우리고장 보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찾았다. 지면 관계상 모두 소개하지 못했지만 이 대목에는 곡절이 더 존재한다. 그가 보은 속리산 일대를 찾은 데는 장인의 권유가 먼저 있었다. 문과방목을 보면 그의 장인은 이수(李穗)라는 인물로, 벼슬이 정3품에 이르렀다. 문과방목은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들의 신상을 기록한 사료를 말한다. 당시 구수복의 장인은 보은에 별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기묘년에 공이 이조 좌랑으로 파직되자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의 장인이 딱하게 여겨 보은(報恩)에 있는 별장에 살도록 했더니…'-< 연려실기술> 그러나 구수복의 장인 별장 처가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요즘 명절 풍속도의 하나로 '장인과 사위가 자주 다툰다'는 내용이 신문 지상에 보도된 적이 있다. 여성들이 경제전선에 뛰어들면서 처가의 발언권이 강해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현상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도 비슷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에 농장의 종이 싫어해서 장인에게 헐뜯기를, "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장차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장인이
조선시대 양반가 남자들은 자신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서자와 얼자, 즉 서얼(庶孼)을 심하게 차별했다. 서자는 양인(良人) 첩의 자손을, 얼자는 천인(賤人) 첩의 자손을 일컫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이라고 해도 양반의 숫자가 많아지면, 양반 전체의 기득권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이처럼 서얼 차별의 근원에는 조선 양반들의 집단적 이기심이 깔려 있었다. 모든 양반들이 서얼 차별제도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의식있는 일부 관료는 능력있는 인물은 서얼을 따지지 말고 과감히 발탁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 중종 때 두 명의 관료가 같은 주제를 놓고 서로 다른 내용을 상소한다. '김정국이 아뢰기를, "서얼에 대해서는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으니 고쳐서는 안 됩니다. 전에는 서경(署經)할 적에 그 선조(先祖)가 미천하면 서경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구수복이 아뢰기를, "서얼은 법이 이미 그러하지만, 어진이가 있다 하더라도 과거에 구애되어 포부를 펴지 못하니, 이것도 사람을 쓰는 길에 방해가 됩니다"'- 인용문 중 서경은 인사 등이 있을 경우 왕의 재가 있은 후 대간도 함께 서명을 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종의 왕권견제 행위로 볼 수 있다. 1519년 중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가 퇴위한 후 가진 직업은 문사관이었다. 문사관(問事官)은 문헌을 관리하거나 죄인의 신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법원, 검찰청의 서기와 비슷하다. 전회에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읍호 강등되고, 그에 따른 연좌제로 충청도가 청홍도(淸洪道)로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연좌제는 가족에게 보다 혹독하게 적용됐다. '이홍윤과 배광의·최대관·이휘·이무정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모두 교수(絞首)에 처하고, 15세 이하 아들 및 어머니·딸·아내·첩·할아버지·손자·형제·자매, 그리고 아들의 아내와 첩은 공신의 집에 종으로 주었으며, 재산은 모두 적몰(籍沒)하였다.'- 본문중 대명률은 명나라 형법을 일컫는다. 이홍윤을 심문할 때 문사관으로 배석한 관원이 민기(閔箕·1504∼1568)라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료마다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기유년(154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이 문사관(問事官)이 되었다.
전회에 유석(劉石)이라는 인물의 패륜사건으로 '충주목'이 '예성부'로 읍호가 강등됐고, 그에 따른 여파로 '충청도'도 '청공도'(淸公道)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가 1540년(중종 35)이다. 그로부터 9년 후 충주가 이번에는 다시 유신현(維新縣)으로 읍호가 강등된다. '충청도를 고쳐 청홍도로 만들고, 충주를 강등시켜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었다. 이기를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해를 청홍도 관찰사로, 이치를 유신 현감으로 삼았다.'- 청홍도할 때의 '홍'은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에서 왔다. 1547년(명종 2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 벽위에 붙여진 벽서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벽서 내용은 상부에 보고 되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윤임의 일파를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송인수·이약빙·임형수 등도 윤임의 일파로 지목돼 함께 사사했다. 거론된 인물중 이약빙은 우리고장 충주출신이고, 그에게는 홍남, 홍윤 두 아들 형제가 있었다. 그중 홍남은 벽서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누명을 받아
충주 별칭 중의 하나로 '예성'(蘂城)이 있다. 이 때의 '예'(蘂) 자는 꽃술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예성'이라는 별칭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충주목은 (…) 대원(大原, 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또는 예성(蘂城, 고종 42년에 다인철소 사람이 몽고 침략군을 방어함에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이라고도 부르며…'- 위 내용만 가지고는다인철소의 승격과 예성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 지난 1970년대 후반 충주 한 가정집에서 태극과 꽃 문양의 석조물이 발견돼 화제가 된 것이 있다. 당시 충주 향토사학회에서는 이를 '예성 심방석'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려시대 충주 별칭인 예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유물인지는 여부는 추가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지금까지는 예성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들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이 예성의 명칭이 부정적으로 사용됐다. 시리즈로 언급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연좌제의 일종인 읍호(邑號) 강등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는 반역, 폐륜같은 국사범이 나올 경우 목(牧)을 현(縣)으로 내리는 등 행정 지위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 생원이 기개높게 상소하는 장면이 기묘록보유에 등장한다. '참판 이찬(李澯), 참지(參知) 김노(金魯)는 모두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쓰므로 두 사람에게 붓을 들고 종이를 앞에 놓게 하더니, 공이 줄줄 불러대는데 글이 샘솟듯 하여 김(金)과 이(李)가 미처 받아쓰지를 못 하였다. 단번에 10여 편을 썼는데 사연이 매우 간절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공'은 박광우(朴光佑·1495∼1545)라는 인물이다. 생원은 지금으로 치면 초급 과거에 합격한 신분 상태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주어줬다. 곧바로 하급관리로 나가거나 또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시험보다 더 높은 것이 바로 문과시험으로, 지금의 고시(高試)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 국조방목(國朝榜目)이라는 것이 있다. 박광우 이름이 이 기록에 등장한다. 따라서 서두의 박광우 상소는 정식관리 신분이 아닌, 유생 상태에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과급제 후의 박광우는 여지승람 편찬에 관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는 한때 강릉부사 직도 수행했다. 이때 고찰 월정사도 들렸던 모양이다. '월정사' 제목의 한시가 전해진다. '솔 그
조선시대 때 환관의 또 다른 이름으로 엄인(門자 안의 奄자와 人), 화자(火子), 고자(鼓子) 등이 있다. '엄인'은 고려시대의 원나라 간섭기에 주로 사용됐다. 이때의 '엄'자는 그 훈이 '고자엄'으로, 글자 그대로 성불구자를 의미한다. '화자'와 '고자'는 보다 노골적인 성적 의미를 담고 있다. '화자'의 '火'는 남자의 몸(人)에서 두 개의 남성성이 떨어져 나간 것을 의미하고 있다. '고자'할 때의 '고'는 글자 그대로 북을 의미한다. 북의 속이 비었듯이 남성의 그것도 비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2가지 방법으로 환관이 됐다. 어릴적 개에게 고환을 물린 아이가 환관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다른 경우는 사설 내시양성소인 내자원(內子院)을 통해 내시가 됐다. 이때 남성성을 거세하는 수술은 주로 비오고 천둥치는 날 했다. 비명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도 괜찮기 때문이었다. 당시 환관들은 생식성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도 영위했고 양자를 입적시키기도 했다. 이때 여자의 집안과 양자된 자의 부모에게는 적지 않은 재물이 건네졌다. 전회에 조선전기 최고 환관인 김처선과 그의 양자 이공신을 언급한 바 있다. 양부 김처선은 주군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다가 참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