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학(氣數學)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술학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기수학자로는 명종 때 인물인 박지화(朴枝華·1513∼1592)가 꼽히고 있다. 그는 벼슬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이르렀다. 이문학관은 승정원 소속으로, 중국 외교문서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서자 출신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명산을 유람했고, 특히 금강산에 들어가 7년간 수도했다. 이수광은 이런 그를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그는 밥을 먹지 않고 솔잎과 소나무 껍질만 먹었으며, 엄동설한에도 무명옷을 입고 지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그가 도인의 모습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을 보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다음은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이 지인 박인수(朴仁壽·1521∼1592)가 박지화에 감화되는 모습을 적어 놓은 내용이다. '그러다가 수암 박지화를 만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들었고(…). 이로부터 도의 진수에 깊이 맛들여서 평소에 방 하나를 말끔히 정돈하여 왼편에는 거문고, 오른편에 책을 놓아두고 거처하였으며 세간의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본문중 '위기지학'은 타
전회에 세종대왕과 불교정책을 언급했다. 이때 '태종에 이어 조선 초기의 가장 강력한 억불책의 하나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태종은 종교정책에도 과단성을 발휘했다. 그는 사원 혁파를 단행해 사찰의 노비와 전답을 국고에 환수했다. 그는 이같은 연장선에서 유교적 사회질서의 정착을 위해 가정에는 가례(家禮), 그리고 향리에는 이사법(里社法)을 보급했다. 가례는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말한다. 그러나 이사법은 자주 접하던 용어는 아니다. 이사법은 조선시대 각 향리에서 토신(土神)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풍년을 빌었고, 또 마을 인심(人心)을 밝게 하기 위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넓은 의미의 현대판 반상회로 볼 수 있다. 이를 처음 건의한 인물이 허지(許遲·1372∼1422)다. '무릇 우리 동리(同里)의 사람은 각각 예법(禮法)을 존중하고, 힘을 믿고 남을 능욕(凌辱)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자는 먼저 함께 다스린 뒤에 관(官)에 넘긴다. 혹은 가난하여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그 집을 두루 도와주되, 3년에 자립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손으로 출처를 가리고 보면 "어느 동네 반상회 때 나온 얘기인가" 할 정도로 현실적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는 것에 반비례해 불교를 억압했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석가모니를 아예 '불씨'(佛氏)라고 불렀다. 고려말 사대부들이 불교를 줄기차게 공격한데는 이데올로기 외에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고려 후기의 전국 사찰들은 노비 외에 광범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들은 여기서 나오는 잉여자본을 고리대금업에 재투자,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했다. 고려후기를 '사원경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원경제를 공격해야 사대부 자신에게도 재분배된 토지가 돌아올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당시 대신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불교 여러 종단을 선·교종 양종만 남기고 산문 폐쇄령을 내렸다. 이때 불교 통폐합을 강력하게 건의한 인물이 당시 대사헌 하연(河演·1376∼1453)이었다. '세종 계묘년에 대사헌 하연(河演)이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기를, 부처는 임금을 버리고 작위를 사양하였는데, 역대에서 깊이 믿어서 널리 절을 짓고 전지를 시주하며 노비를 바쳐서, 중외 사찰에서 나누어 부친 밭이 1만 1백여 결이나 됩니다. 동포 백성들이 주려 죽는 판인데, 놀고 있는 중들에게 또 무슨 밭을 주어서,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가 /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임제(林悌·1549∼1587)의 시조다. 그는 서도병마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위 시조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당했다. 임제는 그후 다시 복직되나 본래의 호방한 성격은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는 벼슬아치 사회에 대해 환멸과 절망을 느낀다. 그는 10년간의 관직생활을 뒤로 하고 전국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여성이 한우(寒雨)라는 평양 기생이다. 둘이 나눈 시조가 '해동가요'(김수장), '청구영언'(김천택)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먼저 임제가 한 수 읊는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를 /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한우가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 노라.' 임제가 '한우'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어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고 한다. 그러자 한우는 자신을 찬비에 빗대어 원앙침 비취금 속에 녹아 자라고 한다. 남녀간 서로의 수작을
중국 고서 중에 '잠서'(蠶書)가 있다. 북송 때 진관(秦觀·1049~1100)이라는 인물이 지은 책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잠업책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이 잠서를 알기 쉽게 풀이한 인물이 서강(徐岡·?∼1461)이다. 또 그는 최항 등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할 정도로, 학문에 관한 한 경지에 올랐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그의 직언은 유명했다. 단종실록 내용이다. '헌납 서강(徐岡)이 본원의 뜻을 가지고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내일 장차 동교에 사냥한다고 하는데, 사철 강무같은 것은 인군(人君)의 부득이한 일이지만, 지금 명분도 없는 사냥을 자주 행하시는 것은 불가할 것 같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소서…"'- 이 대목의 실록 내용은 훨씬 더 길다. 단종이 '뭐 그런 것을 가지고!'라는 식으로 말을 해도 그는 직언은 계속 된다. 시쳇말로 임금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있다. '서강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나이가 바야흐로 어리신데, 자주 사냥을 구경하러 다니시고 학문을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군이 바뀌었지만 그의 직언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상대가 단종과 정반
우리나라 역대 조정은 고대 이래로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냈다.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국가의 흥망성쇠는 산천의 음양 조화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명산대천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조선시대 들어서 다소 변하게 된다. 산천신에 신격(神格)을 부여하는 것은 종전과 같았다. 다만, 산천신을 신하로 의식하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을 탈 없이 하고 (…)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태조 이성계가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이라는 인물을 보내서 산천의 신에게 고유한 내용의 일부다. 고유문(告由文)은 중대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까닭을 적어서 사당(祠堂)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글을 말한다. 인용문을 보면 '왕은 이르노라', '이에 알리는 바이다' 등의 표현에서 보듯 신을 휘하처럼 하대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사에 대한 의식은 국조오례의 길례(吉禮) 편에 적혀 있다. 길례는 조선시대 제사의 종류를 사(祀), 제(祭), 향(享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후 산림자원도 수탈해 갔했다. 이때 맹수인 호랑이는 방해물이 됐다. 따라서 일제는 호랑이 포획을 장려했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 호랑이가 멸종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까지도 상황은 그 반대였다. 호랑이가 자주 출현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따라서 호환(虎患)이라는 단어가 대중어로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관련 내용이 64건이나 등장하고 있다. 호랑이가 가장 많이 출몰한 지역은 북한지역이었고, 그 다음은 태백산맥을 끼고 있는 영동이었다. 호랑이는 산간벽지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능과 궁궐에도 출몰했고 심지어 궁안에 새끼까지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망기로 홍경신(洪慶臣)에게 전교하였다."내가 듣건대,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고 한다. 발자국을 찾아 잡도록 이미 전교를 내렸으니 지금처럼 초목이 무성한 때에는 군대를 풀어 잡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발자국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방법이야 어찌 없겠는가.'- 호랑이를 애완동물처럼 대했다면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한 인물이 있었다. 짐작했겠지만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이) 우리(檻)에 큰 호랑이와 큰 멧돼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지은 시조로,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는 권농(勸農)이지만 농촌의 평화로움도 잘 드러나 있다. 남구만은 목가적 시조를 남긴 것과 달리 정치적으로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송시열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소론의 영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강릉으로 유배됐고, 장희빈에 대한 극형을 반대하다가 완전히 실각·낙향했다. 남구만의 사당과 묘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난히 우리고장 충북에도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현종대에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청주 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전세 및 대동미 여분을 받아 본읍에 두었다가 진휼의 자본에 충당하고, 속오군의 복호는 그대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잃지 말고(…)"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속오군을 급복하는 일 외에는 모두 그 말대로 따랐다.'- 실록 수정본은 고친
실록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장중경(掌中輕), 세류지(細柳枝), 내한매(耐寒梅), 일타련(一朶蓮), 적선아(謫仙兒), 계궁선(桂宮仙), 승양비(勝楊妃). 장중경은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출 정도로 가려리다, 세류지는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허리, 내한매는 추운 겨울을 견뎌낸 매화, 일타련은 진흙속의 한 송이 연꽃, 적선아는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귀양온 선녀, 계궁선은 달나라 궁궐에 사는 선녀를 각각 일컫고 있다. 여러 기생 이름중 압권은 아무래도 승양비(勝楊妃)인 것처럼 보인다. 미모로 양귀비를 뺨친다는 뜻이다. 기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왕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건 말건 자기 욕심부터 채웠다. 여기에도 승양비, 내한매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녀(妓女) 승양비(勝陽妃)·내한매(耐寒梅)는 자색(姿色)이 있었는데, 계성군(桂成君) 이순(李恂)이 가까이하는 바였으므로, 비록 감히 원(院)에 뽑아 들이지는 못하였으나, 왕이 자주 비밀히 불러다가 간음하였다.'- 조선시대 기생 이름 중 영자, 순희 식으로 흔한 이름은 '홍일점'(紅一點) 또는 '일점홍'(一點紅)이었다.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푸른 잎 가운데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의 세력을 흡수하는 방편으로 성(姓)을 하사했다.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이다. 이와 관련해 평민들에게도 성(姓)에 앞서 본관이 먼저 주어진 경우도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세금과 관련이 있다. 양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면 거주지가 명확하고 고정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유랑생활을 하면 세금 부과가 쉽지 않다. 지금의 가족관계등록법에 고려 본관제도의 잔상은 남아 있다. 바로 본적란이다. 본적란을 보면 당사자나 그 선대가 어느 곳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평민들은 역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받았다는 것이 된다. 성씨·본관 문화와 관련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이때의 삼한은 원삼국 시대의 마한, 변한, 진한이 아닌 신라, 고려, 조선조를 일컫고 있다. 누대에 걸쳐 문벌이 좋은 가문이라는 뜻으로, 달리 의관갑족(衣冠甲族)이라고도 한다. 어느 성씨·본관이 삼한갑족에 속하는지는 주관적인 면이 있다. 이와 관련, 상당수 문중이 자신들의 선조를 아전인수 격으로 삼한갑족에 포함시키고는 한다. 전주이씨를 제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삼한거족이
고려의 말기의 왕으로 '우'와 '창'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호가 주어지 않았다. 왕씨가 아닌 신씨의 씨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때의 신씨는 신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야 쿠데타 명분이 보다 뚜렷해질 수 있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고려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초 정인지 등이 작성했다. 승자의 시각 여부를 떠나 고려사가 없었다면 한국 중세사는 어둠 속에 묻힐 뻔 했다. 고려사가 편찬되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작성, 보관해 왔다. 그러나 잦은 외침과 내란 등으로 그 보관이 쉽지 않았다. 고려 고종 때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합천 해인사에 실록 보관을 위한 외사고를 설치했다. 당시 중앙에 있는 춘추관사고는 내사고, 이를 분산·배치했던 지방사고는 외사고로 불렀다. 그러나 해인사 외사고도 몽고 침략과 왜구창궐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1381년(우왕 7)에 충주 개천사로 옮겨져 약 2년간 머물렀다. 이것은 1383년(우왕 9) 죽주 칠장사로 옮겨가고, 약 7년 뒤인 1390년에는 다시 충주 개천사에 옮겨 약 30년간 존치되다가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졌다. 충주성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 남이장군을 소개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한참 기개가 높던 시기에 극형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이때 며느리와 사이가 안 좋았던 남이의 어미도 극형에 처해진다. 죄목은 국상중에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하나 문헌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아뢰기를,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조선시대 때 국상이 발생하면 백성들은 소복(素服)을 입고 백립(白笠)을 썼고, 또 빈소를 차린 후 곡반(哭班)을 편성하여 곡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가무, 도살, 혼인 행위도 엄격히 금지됐다. 나아가 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도살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엄하게 다스렸다. 국상과 관련해 고기와 생선이 들어가지 않은 투박한 반찬을 '소선'(素膳)이라고 불렀다.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이 졸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