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이 최근에 개관돼 관람객을 맞고 있다. 충주고구려비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5~6세기 무렵에 고구려에 의해 세워진 역사적 실체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골 마을의 '입석'(立石) 정도로 방치됐기 때문에 '역사' 위에 '설화'가 덧입혀져 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이효장 설화'다. '이효장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순직했다. 시신을 서울로 운구를 하던 중 중앙탑 부근에 이르자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하구암리에 산소를 잡자 비로소 운구되었다. 조정에서는 이효장의 공로를 인정, 이곳 일대의 땅을 하사했고 그 표적으로 2개의 비석을 세워 경계로 정하니 그중 하나가 충주고구려비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와 유사한 면이 있다. 온달은 전투 중 '흐르는 화살'(流示)에 맞아 죽었고, 이효장은 근무 중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했다. 이효장(李孝長·?∼146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다. 부친은 한성부윤을 지낸 이사관(李士寬)이고, 모친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딸이다. 실록에 그가 어떤 정책을 수행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호조참의로 있을 때 해청(海靑)을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김육이 대동법의 전면적인 시행의 주장했으나 유림과 대신들의 주장에 막혀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이 어떤 이유와 명문으로 반대했는지 실록에 상세히 실려 있다. 현종 연간에 배기(裵紀)라는 유생이 상소를 올려 대동법 시행의 불가함을 아뢰었다. 그는 '호남에는 그것(대동법 지칭)을 시행할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다섯이 있습니다'라고 주장, 대동법 시행을 반대했다. 그는 그 이유 중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지금은 호서(湖西)는 1결(結)에 10말, 호남은 1결에 13말, 이렇게 균등하지 못하게 거리가 가까운 곳은 도리어 가볍고 먼 곳이 도리어 무거우며, 각읍의 잉여미도 경비를 제한 외에 남아 있는 것이 수만으로 계산할 정도인데도 꼭 더 많은 잉여미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시행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한 마디로 도량형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운반거리가 차이가 나는데 공물(貢物·쌀)을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거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이유의 또 다른 하나를 다음과 같이 거론했다. '지금은 지극히 흔해빠진 토산물까지도 모두 서울 시장의 높은 값
1639년(인조 17)에 제천지역 유림이 김식(金湜)·김권(金權)·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존재했던 봉강서원(鳳崗書院) 이다. 봉강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중건됐고, 1672년에 '봉강(鳳崗)'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제사와 함께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배향 인물중에 김육(金堉·1580∼1658)이 보인다. 김육은 충청도의 대동법을 논할 때 생략할 수 없는 인물이다. 대동법은 하나의 세법에 불과하나 그것이 조선시대 나라 전반에 미친 영향은 이성계와 사대부 일군이 위화도 회군후 실시한 과전법에 버금갔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잡다한 공물을 백미로 통일, 단순화시킨 공물법을 말한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우리고장에도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 지금 굶주린 백
전회에 중종대의 충주목사 안위(安瑋·1491∼1563)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다. 실록은 그가 한 쪽 눈이 멀었다고 적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안위(安瑋)는 한쪽 눈이 멀었는데 본조(本曹)는 조정의 예모(禮貌)를 맡는 곳이고 또 객인(客人)을 접대할 때에 보기에 민망하니 가소서." 하니…'- 중종은 이에 대해 "다른 직임이라면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 객인이 보는 곳에는 예모에 합당하지 않다. 아뢴 대로 갈라"고 이직을 하명한다. 그러나 그는 신체 장애를 극복하고 구황행정을 잘 펼쳐 조선시대 특별 진급의 일종인 '가자'(加資)를 받았다. "충주목사 안위는 관직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였고 일 처리가 자세하고 익숙하여 진휼하는 일이면 다 강구하여 있는 힘을 다해 조치해서 때맞춰 구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내의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안위는 구휼행정만 잘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수 구황음식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바로 '충주구황절요'다. 이 책은 1541년(중종 36) 안위가 충주목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기관(記官) 홍윤창(洪胤昌)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내용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쓴 '묵재일기'에는 양아록 주인공 숙길(淑吉) 외에 맏손녀 숙희(淑禧·1547~?)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이문건은 대를 이을 손자 숙길이가 태어났을 때는 축배를 드는는 등 부산을 떨었다. 맏손녀 숙희가 태어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숙희의 행동이 맘에 들었는지 여러 행동을 촘촘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숙길이 누나 숙희도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병치레를 많았다. 이문건은 1553년 일기의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아이는 약질로 태어났으며 성품이 밝고 명랑하나 조급하고 잘 울었다. 계축년(7살) 8월 풍열을 앓는 것이 경기와 같았는데 약을 썼더니 차도가 있었다. 그해 9월에 아랫니를 갈기 시작했다." 이문건은 성주에 두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숙희는 할어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주로 위채에서 생활했고, 이때 일기를 매일 쓰고 또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이 때문인지 숙희는 할아버지 이문건에게 "나도 글을 가르쳐달라"고 자주 졸랐다. 이문건은 묵재일기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어제부터 천자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숙희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희는 9살 때 육갑, 13
조선시대 사헌부는 오늘날로 치면 대략 검찰에 해당한다. 그 수장은 종2품의 대사헌이다. 그 밑으로는 종3품의 집의(執義), 정4품의 장령(掌令), 정5품의 지평(持平) 등이 이었다. 사헌부 벼슬아치는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했기 때문에 그 직위에 관계없이 '대간'(臺諫)이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성종 연간에 사헌부 집의를 지낸 인물로 안위(安瑋·1491∼1563)가 있다. 사료를 보면 그는 1539년 사헌부 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대윤 윤임(尹任·1487-1545)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 우리고장 충주목사로 좌천됐다. 이를 두고 조정에는 쑥덕공론이 많았다. 당시 사관이 '이해되지 않는 인사'라고 생각됐는지 실록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신은 논한다. 전에 소세양(蘇世讓)이 윤임(尹任)을 탄핵하려고 장령 안위(安瑋)에게 부탁하여 대론(臺論)을 유발하려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안위가 충주 목사로 나가고 안위의 아우 안현(安玹)이 전라 감사로 나가게 되자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했었다.'- 조선시대 도적이 창궐은 탐관오리의 횡포 외에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와
지역 성주이씨 문중이 얼마전 묵재 이문건(李文楗·1494∼1567) 부부의 묘를 경북 고령에서 문중산이 있는 괴산문 문광면 대명리 송면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원피스인 철릭(帖裏), 지석의 일종인 묘지명 등 부인 안동김씨 '돈이'(敦伊·1497-1566)의 유품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명종 때 장조카 이휘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극형당할 상황에 놓였다. 이때 이문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 신주를 본인 집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누님이 새벽에 오셨다. 함께 울었다. 밥과 국과 술잔을 가지고 신주 앞에 차려 놓고서 통곡하였다.'- 능지처참을 당할 정도의 대역죄를 지었으면 삼촌인 이문건도 중형에 처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문건이 고향유배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언묵의 딸인 돈이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사촌간이었다. 이문건과 부인 안동김씨의 부부금슬은 전반적으로 좋았으나 한번 대판싸운 내용이 묵재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문건이 외박을 하고 들어오자 안동김씨 돈이가 이렇게 바가지를 긁는다. "멀지도 않은 곳에 있으면서 어째서 밤에 기생을 끼고 남의 집에서 잤수. 어찌 이것이 늙은이가 할 짓이란 말이오
청주시민들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곳을 '작천'(鵲川) 또는 '까치내'라고 부르고 있다. 언뜻 '까치내'는 조류 까치를 연상케 하나 그렇지는 않다. 현재 두 개의 어원설이 제기돼 있다. 하나는 '까치내'를 '아치내'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다. 이때의 아치'는 '작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설날 전날을 '까치설'이라고 한다. 이때의 '까치'도 '작다'라는 뜻의 '아치'가 변한 말이다. 또 하나는 '가지내'가 '까치내'로 변했다는 설이다. 이때의 '가지'는 '갈래' 즉 '지천'(支川)을 의미한다. 미호천이 큰 하천이라면 무심천은 갈래 하천, 즉 지천으로도 볼 수 있다. 두 어원 사이에 정설은 아직 없다. 까치내 일대에 형성된 들이 '팔결들'이다. 대략 오근장역 북쪽에 위치하는 들로 보면 된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팔결들의 한자식 표기는 '八結坪'(팔결평)이었다. 팔결들은 의외로 농경지 면적을 측정하는 방법인 '결부법'(結負法)과 관련이 있다. 결부법은 경무법(頃畝法)과는 달리 토지의 비옥도를 토지 면적에 반영한 측량법으로 조선시대 세수(稅收)의 기준이 됐다. 이 경우 '八結坪'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여덟 결(結)의 들' 정도가 된다. 조선시대 1결의 넓이는
전회에 미호천의 어원이 '미꾸지'(한자 표기는 彌串)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고 밝힌 바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꾸지'에서 물고기 '미꾸라지'를 연상하고 있다. 미호천에는 얼마 전까지 천연기념물 제 454호인 미호종개가 서식했다. 미호종개도 미꾸라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사촌격인 '미꾸리'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종 분류상은 분명히 다르다. 한지 표현으로도 미꾸라지는 '추어'(鰍魚), 미꾸리는 진흙 미꾸라지를 뜻하는 '이추'(泥鰍)로 적고 있다. 그러나 '미꾸지'는 '미꾸라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명이다. 미호천에 미꾸라지가 많이 살아 '미꾸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순우리말 '곶'(串)은 해안가나 내륙하천의 툭 튀어나온 지형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경북 포항의 호미곶, 북한 황해도의 장산곶 등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과장하면 닭의 며느리발톱처럼 돌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미꾸지'(彌串)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서 서쪽으로 승용차를 몰면 궁현리, 산단리, 사곡리를 거쳐 삼거리에 도달한다. 반면 부강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면 명학리, 내판리를 거쳐 역시 삼거리에 도달한다. 이곳이 전회에도 언급한
청주·청원이 통합됐다. 이와 관련, 벌써부터 미호천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호천의 어원은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복잡하고 의외로 '문화 권력'과 관련이 있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미호'(美湖), 즉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과는 관련이 없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세종시 동면 예양리 '미꾸지'라는 지명에서 시작됐다. 한국교원대 김순배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이 '미꾸지'는 1864년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자 '두루 미, '곶 곶' 자를 쓴 '미곶(彌串)으로 표기돼 있다. 이후 1872년의 연기현지도에는 '아름다을 미', '곶 곶', '나루진' 자를 쓴 '미곶진'(美串津)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지금의 지명인 '아름다울 미', '호수 호' 자를 쓴 '미호'(美湖)로 변했다. 그러나 '미호'라는 지명은 지금은 세종시(구 충남 연기지역)보다 청원군 강내 지역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선후기 연기군 동면 예양리 일대의 유력한 재지사족은 이른바 '결성張씨' 문중이었다. 익히 알다시피 조선시대 양반가는 유교정신으로 무장된 계층이다. 따라서 결성장씨 가문이 '미꾸지'라는 투박한 지명보다, 일대를 '양인동'(養仁洞·仁을 키
해괴제는 전통시대 나라 안에서 지진 등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지내던 제사를 말한다. 옛사람들은 나란 안에서 괴이한 일이 일어나면 자연속의 기 흐름이 응어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해괴제는 문헌상 고려 현종 14년에 처음 등장한다. '을해일에 金州에 지진이 있었다. 이때부터 지진이 발생한 자리에 해괴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고려하면 떠오르는 것이 불교다. 그러나 고려의 조정은 불교 만큼이나 점술을 믿고 숭상했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복주(지금의 안동)를 거쳐 우리고장 청주에 5개월 가까이 머무른다. 이를테면 청주가 한때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한 셈이다. 홍건적이 거의 물러나가 공민왕은 점술가를 불러들여 '어느날 개경으로 환궁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점쳐보게 한다. 고려 조정에서의 주술을 그만큼 일상적인 것이었다. 해괴제도 그 범주의 하나에 속했다. 조선시대의 해괴제는 문헌상 태조 7년에 처음 등장한다. 해괴제는 자연에 지내는 제사의 일종으로 반드시 축문을 지어 읽었다. 해괴제는 지방뿐만 아니라 궁궐 자체에서도 지냈다. 이때 가장 많은 원인 제공자는 엉뚱하게도 부엉이 울음소리였다. 당시 궁궐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를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
조선전기 복지제도의 하나로 연호미법(煙戶米法)이 있다. 이는 풍년들 때 쌀을 더 거뒀다가 흉년이 들면 다시 나눠주던 제도를 말한다. 규정대로 시행됐으면 매우 이상적인 복지제도로 볼 수 있다. 고려 현종 14년(1023)에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조선 태종 7년(1407)까지 계속 시행됐다. 그러나 연호미법은 그 직후 폐지된다. 탐관오리가 중간에서 농간을 자주 부렸다. 이들은 세미를 과다하게 설정해 놓고 그 차이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수법으로 착복을 했다. 조선전기 청주목사를 지낸 인물로 김자수(金自粹·?~?)가 있다. 그의 본관은 경주, 호는 상촌(桑村)으로, 김세필이 그의 고손이 된다. 그는 시문이 동문선에 실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그가 우리고장의 사례를 들어 연호미법의 폐지를 주장했다. '우선 충주·청주의 두 고을로 본다면, 청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3천 9백 80결(結)인데, 더 늘어난 것이 5천 70결이고, 충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6천 1백 70결인데, 더 늘어난 것이 4천 5백 70결이니, (…) 이것은 탈루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이런 때를 당하여 또 연호미(煙戶米)를 거두게 되면, 백성들의 원망이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