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참혹한 것으로, 인간심리의 여러 단면들이 노출된다. 임진왜란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른바 가왜(假倭), 부왜(附倭), 항왜(降倭) 현상을 낳았다. 가왜는 내국인 즉 조선인이 왜군을 가장해 노략질했던 사건을 말한다. 우리고장 영동이 외가인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쇄미록'의 1593년 음력 7월 14일자 일기를 이렇게 썼다. '구례를 분탕질한 적은 왜적이 아니고 곧 우리나라 사람이 왜적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왜인의 목소리를 냄으로 목책을 지키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고 거기 사는 백성들도 이 까닭에 놀라 움직여서 역시 모두 도망해 달아나니….' 비슷한 현상으로 숨진 우리나라 사람을 왜군의 시체로 변장시켜 정부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기록정신이 유별났던 오희문은 쇄미록의 1592년 음력 9월 13일자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진 밖의 망대에서 숙직하는 왜병을 쏘아 죽이고 머리를 베어다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다시 들으니 사실은 왜병이 아니고 무주 백성이 목화를 따고 있다가 적에게 죽어서 버려두고 거두어 가지 않았던 시체를 그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베어가지고 왔는데 의병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진짜 왜병이라고 하여 순찰사에게 바쳤다고
진천군 초평면 양촌마을에 완위각(宛委閣)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여러 용도의 7동 한옥으로 구성된 조선후기 전통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상당부분 망실, 사랑채 1동만 존재하고 있다. 완위각의 최초 건립자는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다. 그는 속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기사환국으로 정국이 어지러워자 더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기사환국은 장희빈 아들의 원자 책봉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남인이 숙종의 환심을 사 서인을 대거 몰아낸 사건을 말한다. 그는 선대 고향인 초평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이때 건립한 건물이 완위각으로, 당시에는 만권루라고도 불리었다. 조선 후기에는 장서각을 겸한 사립 도서관이 존재했다. 이정구의 월사고택, 유명천의 청문당, 유명현의 장성당 등이 그것으로, 조선 4대 사립 장서각으로 불렸다. '두타초'(頭陀草)라는 이하곤의 저서를 보면 당시 완위각에는 의학, 천문, 지리, 서예, 그림 등과 관련된 책이 1만권 가량 보관돼 있었다. 책이 워낙 많다보니 당대 문인과 각계 지식인들이 이하곤의 진천 초평의 완위각을 찾아 토론을 즐겼다. 화가였던 정선·윤두서(尹斗緖)와도 교유했다. 따라서 그의 문집에는 윤두서의 자화상과 공재화
조선시대 노비의 종류는 의외로 많았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양반가에서는 이런 노비를 경제적인 시각으로도 분류했다. 별득노비, 구활노비, 환퇴노비, 전당노비 등의 명칭이 이에 해당한다. 별급노비는 과거급제, 생일, 병간호 등 특별한 사유로 인해 받는 일종의 '선물형 노비'를 말한다. 넓은 의미의 상속 노비로 볼 수 있다. 구활노비는 기근, 질병, 이산가족 등의 이유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을 거두어 먹여살리는 대신 노비로 삼은 경우을 일컫는다. 환퇴노비는 매도를 했지만 '어떤 이유'로 본래의 집으로 환원된 노비를 말한다. 이때의 어떤 이유로는 문중 동의없이 몰래 팔았다가 들통난 경우, 보이지 않던 질병이 발견된 경우, 새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경우(일명 완노비) 등이 있다. 이밖에 전당노비는 쌀, 곡식, 돈 등을 빌리기 위해 담보로 제공한 노비를 말한다. 식사를 전담하는 여종은 취비(炊婢) 또는 주비(廚婢)라고 불렀다. 취비는 문자 그대로 '불을 때는 여종', 주비는 '부엌노비'를 의미하고 있다. 이들은 밥에 돌이 섞여 있거나 밥찬이 정갈하지 않을 경우 양반에게서 손찌검을 당하곤 했다. 괴산 이문건의 누에치기 기술은 전문가 경지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회에 이문건의 젖어멈 노비를 언급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노비들의 명칭과 역할은 의외로 세분화돼 있었다. 먼저 미산(未産) 노비, 잉임(孕任) 노비, 복중태(腹中胎) 노비 등의 명칭을 꼽을 수 있다. 미산노비는 출산하지 않은 여종, 잉임노비는 임신한 여종, 복중 태노비 역시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는 여종을 의미하고 있다. 태아는 종모법에 따라 성별에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노비가 돼야 했다. 이밖에 육아와 관련된 노비로는 '업저지'가 있다. 업저지는 주인집의 젖먹이 아이를 업어주며 하루종일 함께 놀아주는 어린 종을 일컬었다. 노비의 자식들이 주로 이 일을 맡았다. 계집종 중에는 성장해서도 결혼한 주인 아씨를 따라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계집종은 '교전비'라고 불렀다. 시댁 예의범절을 조언하고 말동무가 되는 것이 교전비의 주된 역할이었다. 그러나 교전비는 대체로 얼굴이 곱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칫 남편과 눈이 맞아 첩으로 들어앉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장례까지도 노비의 힘을 빌렸다. 이른바 '곡비'(哭婢)가 존재했다. 곡비는 그 지역 양반이 죽었을 때 빈소는 물론 무덤까지 따라가 대신 슬피 울던 노비를 말한다. 동네에서는
조선시대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다시 구분된다. 지금도 식구와 같은 표현으로 '식솔'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한 집에 살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일컫는다. 외거노비는 문자 그대로 집밖에 거주하는 노비를 말한다. 자유가 조금 더 주어진 대신 매년 일정한 노동력과 농산물을 바쳐야 하는 신공(身貢)의 의무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한 해 농사는 사실상 노비와 관련된 행사로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 중에 '종날'이라는 연례 행사가 있었다. 이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 온 집 안의 먼지를 떨어낸 후, 노비들에게 떡 대접을 했던 풍습을 일컫는다. 겉으로는 양반 주인집이 노비를 격려하는 날이지만, 노비에게는 한 해 고된 노동의 시작을 의미했다. 농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음력 정월에도 '문안비'라는 풍속이 존재했다. 조선시대 양반가 부인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따라서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보름 사이에 어린 계집종을 친척집 등에 보내 대신 새해 문안인사를 드리게 했다. 그래서 '문안비'다. 이때 문안비의 새해 인사를 받은 양반가에서는 그 계집종에게 세배 음식상을 후하게 차려주고, 또 세뱃돈을 두둑히
조선시대 노비들은 여러 계층이 존재했다. 양반가 상전들은 이중 노동과 출산 능력을 동시에 갖춘 젊은 계집종을 가장 선호했다. 당시에는 임신한 계집종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 역시 어미를 따라 노비가 돼야 했다. 이를 '노비종모법'이라고 불렀다. 암소가 송아지를 낳을 경우 그 집안에 재산증식이 이뤄지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 노비 몸값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적시돼 있다. '남종의 경우 나이가 15세 이상 60세 이하이면 값이 베 100필, 15세 이하 60세 이상이면 50필이고, 여종의 경우는 나이가 15세 이상 50세 이하이면 120필, 15세 이하 50세 이상이면 650필로 하라.'- 적어도 조선 성종대 만큼은 15세 이상-60세 미만의 연령대에서는 여종값이 20필 정도 더 비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여종이 자주 상전의 '잠동무'로 불려갔던 점도 고려됐던 것으로 보인다. 의외지만 조선시대에도 노비 휴가제도가 존재했다. 당시에는 휴가를 '말미'라고 불렀다. 비슷한 표현인 '겨를'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오희문은 1594년 음력 12월 21일자 쇄미록을 이렇게 썼다. "승노에게 말미를 줘 오는 정월 10일 전에는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영동 황간이 외가인 오희문은 이들 노비를 세습, 매득(買得), 별급(상속이나 증여) 그리고 유망비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확보했다. 유망비는 주인집을 도망쳐나와 떠돌아다니는 노비를 말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오희문 노비들의 물품교역에는 우리고장 지명도 등장한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강원도 평강에서 외가가 있는 영동으로 목화를 사러온 사례가 기록돼 있다. 1596년 음력 윤달 8월 16일자 쇄미록을 보면 '덕노'라는 노비가 외가가 있는 영동 황간에 와서 목화 12근을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소요된 시간은 총 15일이었다. '덕노'는 오희문 집에서 충성도가 가장 높았던 노비로, 이듬해 겨울에 서울로 미역을 팔러 갔다가 동상으로 엄지 발가락을 잃기도 한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매번 어떻게 그 먼 거리를 걸어다녔는가는 아직 완벽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주막이 대중화됐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괴산 연풍은 지금은 일개 면(面)에 불과하지만 일제가 1914년에 전국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 전까지는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연풍현은 고구려시대에는 상모현, 고려시대 때는 장풍현으로 불렸다. '연풍현'이라는 행정명칭을 처음으로 얻은 것은 조선 태종 3년(1403) 때였다. 이후 세종 11년에 충주의 동촌(東村)을, 성종 7년(1476)에는 충주의 수회촌(水回村)을 흡수하면서 행정 면적을 넓혔다. 그러나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풍현은 1600년부터 1615년 까지 약 15년간 지도 위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현이 너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후의 기록에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충원이 말하기를 "연풍 읍내와 서면(西面) 수회촌(水回村)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파수군(把守軍)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케 하여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했으면 한다."'- 인용문에 등장한 '충원'은 신충원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으로 조령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축성했다. 왜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조정 대신들 사이에 피폐한
'신각은 그(조헌 지칭)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 임진왜란 때 조헌의 충언을 유일하게 실천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신각은 자신이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城), 즉 인용문에 등장하는 성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역인 다른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蟹踰嶺)이라는 곳에서 왜군의 머리 70~80급을 베었다. 신각 대신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은 그 후임자인 이정암(李廷·1541∼1600)이다. 인용문 안에 이정암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의 본래 이름은 연안성(延安城)으로, 지금은 북한 지역이 된 황해도 연안읍에 위치하고 있다. 연안성 전투는 청주성보다 꼭 한달 늦은 1592년 음력 9월 1일에 있었다. 그날의 전투는 소규모 충돌이 아니었다. 왜군 수만명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 등이 흩어진 장수와 졸병을 거두어 죽기로
청주성 전투에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陸戰) 승리'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고 있다.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음력 8월 1일에 있었다. 그러나 청주성 전투를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로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충남 금산 진산면에는 이치대첩비가 존재한다. 권율은 그해 음력 7월 8일 금산 이치(梨峙·배재)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보다 먼저 승리한 전투가 있다. 이른바 경기도 양주 해유령(蟹踰嶺) 전투로, 1592년 5월 16일에 있었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 이혼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게재(蟹嶺)에서 요격하여 패배시키고 70급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 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용동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한 '게재'는'해유령'과 같은 지명이다. 어류 '게'를 한자로 쓰면 '蟹'(해)가 된다. 실록 다른 곳에도 숫자가 다소 다르나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
안내면 답양리 채운산에 가산사(佳山寺)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창건자는 정확하지 않다. 가산사는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작은 암자 규모를 유지되다 정조 대에는 일시적으로 폐사됐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1765년)는 가산사에 대해 '옥천군 북쪽 25리에 위치한다'고 적었다. 신경준도 '가람고'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정조 때 발간된 범우고(梵宇攷)는 '북쪽 2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됐다(今廢)'라고 적었다. 사찰에 영정각이 존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가산사에는 영정각(도기념물 제 115호)이 존재하고 있다. 영정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의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와 조헌이다. 영정각이 건립된 직접적인 이유도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였고, 영규대사 또한 연합작전을 펴면서 가산사를 승병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실 관계가 약간 불명확한 면이 있다. 두 인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의·승병을 훈련시켰다면 청주에도 함께 입성했다고 보는
전회에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이 9년여 동안 피난생활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는 지금의 충남 홍성으로 피신한다. 여기서 8개월 정도 머물다가 전북 장수로 피난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들이 현감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강으로 도피하고, 나머지 4년은 지금의 충남 부여 임피면에서 생활한다. 그는 평강에서 50개월 가량 머물면서 역둔전 등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으며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아들 윤겸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강시절을 제외하면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가장 많이 했다. 임진년 음력 8월의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산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점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추석)으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오희문은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임진왜란의 전황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노비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노비를 수시로 관청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보고토록 했다. 임진년 음력 8월 10일자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장 조헌과 참장 이천준은 때에 맞는 인걸로서(…) 승리를 거두어 행동하는 것이 옛사람과 같으니…' 이때의 승리는 청주성 전투를 의미한다.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에서 베이커리나 카페 등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