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관찰력은 초수리 약수(초정약수)의 위치성, 우물의 규모, 솟아오르는 모양 등 외형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호기심 많은 지식인답데 그의 관찰력은 두루 넓었다. 이번에는 그의 오감 기능 중 맛을 보는 혀의 기능이 작동했다. 그는 처음 맛본 초수리 약수의 느낌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試삽(睡에서 目대신 口)之。味微辛而澁。俄而舌尖乍辣。又如點礬。人言如露酒淡者。非誇也。或傳此泉有兩派。其味一淡一辣。同出一井。而味不相和。亦一異云。'- '시험삼아 초정약수를 맛봤다. 맛이 약간 매우면서 떫었는데 혀에서 갑작스런 매운 맛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것은 명반과도 같은 맛이었다. 사람들이 露酒의 맑음같다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혹간에 샘에는 2개의 수맥이 있어 그 맛은 하나는 담백하고 하나는 맵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은) 한 우물에서 동시에 나오나 그 맛은 서로 섞여지지 않아 역시 한결같이 다르다라고 전해진다.'(필자 번역) 초수리 약수의 물맛을 기록한 이규경의 표현을 잘 살펴보면 이중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辛'(매운 맛)은 '乍辣'(순간적인 매운 맛)에, 澁(떫은 맛)은 點礬(명반)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오랫동안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역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그의 교유 관계가 일부 나타난다. 그는 '사소절분편변증설'(士小節分編辨證說)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저서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변증'이라는 낱말은 '직관 또는 경험에 의하지 않고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대상을 연구한다'는 뜻이다. '나의 조부 형암(炯菴, 이덕무 지칭)선생이 사소절 3권을 지었다. 그러나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로 전해왔는데 도성에 사는 최도사(崔都事) 성환이 편을 갈라 1권으로 하여 주자(鑄字)로 간행했다. (…) 1853년 가을에 서울에 있는 최한기가 내방하여 간행했음을 전하고 1854년 봄에 2질을 보내오니 옛 정분의 두터움을 알겠으며 그 감사함을 형용할 수 없다.' 인용문에 그가 교유한 최한기와 최성환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중국과 서양서적을 광범하게 섭렵한 후 개국통상론을 주장할 만큼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최성환(崔·煥, ?~?)은 지도와 지리학에 해박하여 김정호와도 교분을 가졌으며, 이규경 역시 김정호의 뛰어난 능
조선후기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있다. 그는 조선 제 2대 임금인 정종의 직계손이나 서자출신이었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가문에는 집 안에서 대대로 전해져오는 학문인 '가학'(家學)이 발달했다. 이런 가풍은 그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 1788∼1863)에게로도 이어졌다. 그 역시 '한미한 양반가=가학'의 등식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주류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부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국내는 물론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태어난 것이 조선후기 최대 백과사전의 하나로 불리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다. 제목중 '오주'(五洲)는 '5대양 6대주' 할 때의 그런 오주로, 그의 관심이 국내는 물론 세계로 뻗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0권 60책의 방대한 이 백과사전은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됐다. 다행히 그 전에 필사해 놓은 것이 있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이규경은 이 백과사전에서 청주목 초수리(초정)를 방문하는 과정과 그 당시 느낀 소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놨다. 이 책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
중국 송나라는 文과 武중 文을 더 높이 샀다. 그러다 보니 국방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려도 송나라를 본받아 文을 숭상하고 武를 하대하는 이른바 숭문언무(崇文偃武) 정책을 실시했다. 고려 강참찬은 귀주대첩의 총사령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이다. 고려 문신들은 평소에는 붓을 잡고 있다가 유사시가 되면 전쟁을 지휘했다. 이는 나중에 무신란의 주요 원인이 됐다. 반면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안 되 무과를 실시했다. 태조2년(1393)의 일로, 이때 장원 급제를 한 인물이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다. 무과 장원 제 1호인 셈이다. 실록이 이 부분을 자세히 기술해 놨다. '임오년에 나라에서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달생이 제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고, 나가서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무자년에 왜구들이 갑자기 근경에 침범하자 달생이 급히 이를 추격하매 왜구가 곧 달아났다. 태종이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였다.'- 인용문의 '어구마'는 임금을 위해 궁궐 안에서 기르던 말을 일컫는다. 성달생은 그 어구마를 무과 수석의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후 주로 궁궐의 경호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간혹 '경호실수'도
세종대왕 행궁이 국가 숙박시설인 '椒井院'(초정원) 인근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궁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해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세종대왕의 행궁이 좁은 골짜기가 아닌 '넓은 골짜기의 교통로' 주변에 위치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회에 "이 곳은 동학(洞壑)이 널찍하고 행궁 터가 안온하며 군사들의 환위(環衛)와 초소(樵蘇, 나무를 베고 풀을 깎는 것에도 모두 편리하옵니다"라는 문장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1394∼1463)이 아뢰는 말이었다. 그 뒤에는 "더군다나 초수의 나오는 근원이 멀되 길게 흐르니 이러한 곳은 얻기 쉽지 않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번역)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 이 문장의 원문은 '況椒水之出 源遠而流長 如此之地 未易得也'로 돼 있다. 해석한 문장 중 '멀되 길게 흐르니'(源遠而流長)는 △행궁이 원탕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그런데 그곳까지 '길게 흐른다'는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경우 세종대왕 행궁은 원탕 주변이 아닌, 그곳서 먼 곳에 위치한 것이 된다. '源遠而流長'이라는 문장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중 앞 표현 '源遠'은 '根深'과 짝을 이뤄 고문헌에 간간히 등장하는 표현이
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한양 도성을 떠나 닷새만에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 행궁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왕은 이념적으로 이 땅과 백성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머무는 곳은 모두 궁궐로 불렸다. 그 종류는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장전(帳殿) 등으로 표현됐다. 정궁과 이궁은 격이 다르지만 모두 도성 안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행궁'은 도성 밖에 지은 임시 궁궐로, 온천이나 왕릉 주변에 많았다. '장전'은 임금이 휴식 등을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임시 천막에 해당한다. 세조가 진천을 지날 때 '장전'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종대왕의 초수리 행궁터가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어 왔다. 자주 거론됐던 곳은 지금의 '내수읍 초정리 원탕 일대'와 '북이면 선암리 주왕이' 마을 등 두 곳이다. '주왕이'가 원탕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행궁지로 거론되는 것은 지명 때문이다. '주왕'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주)이 왕래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간행된
가마는 집모양 처럼 생겼으면서 누군가를 태울 수 있는 기구를 말한다. 고구려 안악고분의 '주인도'(主人圖)와 '부인도'(婦人圖)에 가마가 등장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가마를 이용했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 가마의 한 종류인 채여(采輿)를 설명하는 내용이 장문으로 수록돼 있다. '위에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 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공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인용문의 '인갈'은 관인이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탈 수 있는 가마로는 연(輦), 여(輿), 가교(駕轎) 등 3종류가 있었다. 왕실에서는 '덩'이라는 가마도 사용했으나 이는 공주나 옹주가 타던 것이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지금의 초정)를 찾았을 때 어느 가마를 이용했는가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은 약간의 '예습'이 필요하다. '연'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먼길을 거둥할
고려시대 우리고장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현종, 공민왕 등이다. 태조는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청주를 찾았다. 반면 현종과 공민왕은 거란과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갔다가 귀로에 청주를 들렸다. 고려 목종과 충렬왕도 각각 강조의 난과 순행 중에 우리고장을 찾은 바 있으나 이때는 청주가 아닌 충주였다. 특히 충렬왕은 순행 중 용안역(지금의 충주 신니면)을 찾았다.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청주목을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최대한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도계(道界)까지 마중 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다'(務從簡便)
경기도 죽산-진천-청주에 이르는 길(지금의 17번 국도)은 조선시대에는 10대 대로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대로와 더불어 일본 사신들이 자주 왕래했다. 부산에 도착한 일본사신은 영남대로인 문경-수안보-달천을 거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갔다. 반면 남해안 내이포(乃而浦)로 도착한 사신은 창원-성주-옥천-청주-죽산-용인을 경유한 뒤 한강을 건넜다. 내이포는 지금의 진해를 말한다. '내이포에서 오는 자는 창원·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을 경유하여 입경(入京)하게 하고…'(由乃而浦來者 經昌原 星州 沃川 淸州 鎭川 竹山 龍仁 漢江入京).- 세종대왕이 탄 어가는 3개 대로 중 세번째 대로를 이용, 죽산을 거쳐 1444년 3월 1일 진천 북평천 가에 도착했다. '거가가 진천현 북평천 가에 머물렀다(駕次于鎭川縣北平川邊).- 인용문에 등장한 북평천은 고유지명은 아닌 진천 읍치의 북쪽 하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들판에서 휴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 어가가 진천에서 초수리(지금의 초정)까지 가는 데 있어, 어느 길을 이용했는지 실록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형과 당시 도로현황 등을 감안할
조선시대 지방의 도로는 형식상 공로(公路)와 사로(私路)로 구분됐다. 공로는 관료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니는 길을 말한다. 가령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충주를 순력하려면 청주-청안-괴산-음성-충주 등의 공로를 택했다. 반면 사로는 장돌뱅이들이 오갔던 길로, 상로(商露) 혹은 간로(間路·샛길)라고 불렀다. 국가의 동맥으로 오늘날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길은 '대로'(大路)라고 표현했다. 시대별로 기준은 다소 달라, 6대로, 9대로 혹은 10대로 등으로 분류됐다. 신경준(申景濬)은 '도로고'(1770년·영조 46)에서 전국의 대로를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로 가는 길은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제4로, 제주 제5로, 강화 제6로 등으로 각각 명명했다. 같은 해 홍봉한(洪鳳漢)은 왕명을 받아 저술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 전국의 대로를 국왕이 있는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 제 1로, 경흥 제 2로, 평해 제 3로, 동래 제 4로, 상주→통영 제5로, 삼례→통영, 제 6로, 해남→제주 제7로, 갈원→보령 제8로, 강화도 제 9로 등으로 분류했다. 반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한양∼의주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세종은 재위내내 여러 질환을 앓았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한 탓인지 안질을 심하게 앓았다. 때문에 세종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해 정사의 상당부분을 3정승이 처리토록 했다. '의정부서사제'는 3정승이 국정을 논하고 또 왕의 재가를 받아 정치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은 첨사(詹事)제도라는 것도 신설해 세자(후에 문종)의 정사 결재권을 크게 확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회를 할 때 세자에게 '남면수조'(南面受朝)하도록 했다. 남면수조는 말 그대로 남쪽을 바라보면서 조회를 받는다는 뜻으로, 사실상 국왕에 준하는 대우였다. 모두가 세종의 건강 때문에 비롯된 것들이었다. 세종 재위26년(1444) 청주에서 '호초맛 나는 물이 있다'는 첫 보고가 올라왔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과 전의현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 다음은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라는 문장이 이
원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속국 고려의 임금을 자국영토 후미진 곳으로 귀양보내기도 했다. 고려 27대 임금인 충숙왕도 그런 신세가 됐다. 그는 원나라 조정의 미움을 사 수도 연경에서 1만5천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가야했다. 익재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世事는 시끄러워 귀담을 수 없는데 / 다리 위에 말 멈추고 할 말을 잊었노라 / 언제나 태양은 내 마음 밝힐지 / 푸른 산 바라보며 눈물지누나 / 내 언제 믿음을 저버렸던가 / 이국에서 헤매어도 은혜는 아네 / 내 몸 날개 없어 날아가지 못하고 / 슬프다 나 홀로 애만 태우네.'- 이처럼 익재는 고위 관료로서 뿐만 아니라 명문장을 남긴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작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나머지 8점의 익재영정을 그린 사람과 시기는 각각 다르다. 보은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보관돼 있던 익재 영정은 한번 도난을 당한 후 현재는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보관돼 있다. 자산영당 익재영정은 그의 직계후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사균(李思鈞·1471∼1536)이 화공에 의뢰해 제작했다. 연산군 10년(1504) 이른바 폐비윤씨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연산군은 이 시기기에 이르러 생모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