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영조태실 터(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로 지난 1930년대 민간인에게 이전됐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은 현재 고인쇄박물관이 근무하고 있는 이규상 씨다. 그는 지난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한국의 태실≫(청원군·청원문화원 간)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 민담편에 의하면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
[충북일보] 조선 조정은 왕실이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도감과 의궤청 등 2개의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도감은 행사를 총괄 집행하고 의궤청은 말 그대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는 후세를 위해 행사의 전말과 경과, 소요된 재용과 인원, 의식절차와 행사 후의 논상(論賞)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을 일컫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궤는 어람용, 의정부, 예조, 사고(史庫) 보관용 등 5~9부가 제작됐다. 영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 만든 의궤도 존재하고 있고, 현재의 명칭은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이다. 이 의궤는 우연찮게 발견됐다. 충북도 문화재계와 청원군청은 지난 1981년 영조 태봉과 관련된 석부재가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채 산 아래 계곡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때 당시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태봉마을 이장인 이상린씨가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라며 다락에 있던 고전적을 보여줬다. 영조태실 의궤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봤다. 의궤에 의하면 △가봉에 사용된 석부재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현암에서 채석됐고 △공사는 1729년(영조 5) 9월 12일에 시작해 그해 10월 15일에 종료됐다. 그리고 이때 충청도관찰사는 도내 각 군현에 인력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그 태를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하였다. 그리고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후 항아리를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았다. 이어 태실 장소가 정해지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게 했다. 이렇듯 조선왕실은 왕자의 태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고, 그것은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가 모두 태에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자 않을 수가 없다. (…)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九經에 정통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징되는 것이다." 인용문 중 '구경'은 주역, 시전, 서전,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맹자, 주례 등 9가지 경전, '단상'은 얼굴이 시원스럽게 생긴 것을 말한다. 왕실이 왕자의 태를 반드시 명당 자리에 묻으려 한 것은 무병장수 기원 외에 명당을 선점,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 태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르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충북에는 경종 태실(충주시 엄정면), 영조 태실(청주시 낭성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 영장(營將)이었던 남연년(南延年·1653~1728)은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천복동(天卜洞)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인근에는 초록바위, 맹골, 곰 이야기 등 구전이 많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노래기 중말 동쪽에 있는 초록바위는 남연년이 어릴적에 무예를 닦던 곳이다. 또 남연년이 부친을 여의고 맹골 묘에서 아우 남극년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매일 범이 찾아와 벗이 돼 주었다. 이밖에 남연년이 황해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곰(熊)이 고향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해쳤다. 그러자 그가 단기(單騎)로 고향으로 돌아와 곰을 화살로 잡아 그 가죽으로 상자를 만들었다는 구전이 존재하고 있다. 남년연에 대한 이같은 구전은 영조대의 현양사업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일부는 사료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있고, 그의 문집으로 《미호집》(渼湖集)이 존재한다. 그는 《미호집》 제 20권에서 남연년에 대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났다' △'곰을 퇴치한 일로 군영의 장졸들이 공의 용맹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관덕당'(觀德堂)으로
[충북일보]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가들이 "만약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그가 재위 24년 동안 보여준 개혁과 대통합 그리고 민본(民本) 정치는 분명히 봉건왕조 조선을 구원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정조의 민본정신은 그가 생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백성을 '만천'(萬川)에 비유하고, 자신은 그 위에서 만천을 비추는 명월(明月)로 생각했다. 이처럼 정조는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지고지순한 왕정을 추구했다. 정조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회만 생기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했다. 1백회 이상을 기록한 그의 행차는 백성들의 민원을 집적 현장에서 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했던 호문(好文) 군주답게 《홍재전서》( 弘齋全書)라는 시문집을 184권 100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고, 제 19~25권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제문이 실려 있다. 이중 제 21권에는 1728년 무신란 때 청주읍성에서 희생된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 등을 추모하는 글인 '삼충사 치제문'이 들어 있다. 먼저 이봉상에
[충북일보] 영조는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의 1728년 무신란 희생자 유족에 대해 마치 속도전을 벌이듯 '보상과 위로'에 나섰다. 이는 역적은 가차없는 응징을 하고, 충신은 국가가 보훈한다는 의도였다.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을 기복시켜 일체로 승품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3월 20일은 1728년 무신란이 발발한지 닷새밖에 되지 않고, 또 반란의 수괴 이인좌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영조가 아직 반란의 구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청주읍성 희생자의 아들을 승품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이인좌는 3월 24일 경기도 안성 장항령(獐項嶺·사진)·죽산 일대에서 체포됐고, 그로부터 7일후 군기시 앞에서 처형됐다. 영조는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는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궁궐로 초청해 위로를 하기도 했다. '충신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 효충하여 대절(大節)을 높이 세웠음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있으나, 당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참모 홍림(洪霖) 등이 저항을 거의 못하고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그만큼 이인좌 반란군의 기습작전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곧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소문이 청주목과 경기도 일대에 쫙 퍼져있었다. '윤순이 아뢰기를, "무신년에 신이 감호사로 내려갈 때에 용인·광주·양지·죽산·청주에서는 술을 많이 빚어 놓고 역적들의 군사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고 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지금의 사단장격인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은 이인좌의 참모 목함경(睦涵敬)에게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목함경을 문초하니, 목함경이 공초하기를,(…) "이배가 병사(兵使)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에게 대문 안에서 베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자 이인좌가 신에게 환도와 군복을 주었습니다. 낱낱이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인용문의 병사는 이봉상, 신은 목함경 등을 의미하고 있으나 청주읍성 4대문 중 어느 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봉상은 첫닭이 울 때 쯤 목함경에 의해 대문 안에서 살해당한 것은 분명하다. 남연년을
[충북일보] 청주시 수동에 충북도기념물 제 17호인 표충사(表忠祠)가 위치하고 있다. 한자 '表'가 동사로 쓰이면 '나타내다', '밝힌다' 등의 뜻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표충'은 '忠을 밝힌다'라는 뜻이고, 따라서 전국에는 사당 표충사가 많이 존재한다. 밀양에는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고, 우리고장 옥천에도 같은 이름의 조헌 표충사가 있다.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 등이 청주읍성에서 희생됐다. 청주 수동의 표충사는 이들 3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기생 해월(海月)의 열녀각이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홍림의 애첩이었다. 표충사는 1728년 무신란이 진압된 직후부터 당시 조정 차원의 건립이 검토됐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라 사호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그러나 사당 표충사가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731년(영조 7)이었다.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성) 등 4개 목(牧)이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이 4개 목을 충청도의 계수관으로 활용해 이른바 강등 지명을 만들었다. 가령 우리고장 충주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충청도'에서 '충' 짜를 빼고 '공청도'나 '홍청도' 등으로 작명했다. 목사에게는 정3품의 관품이 주어졌다. 충청도관찰사가 종2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낮지 않은 벼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는 '당상관'의 예우가 주어졌다. 당상관은 직역하면 마루 위라는 뜻으로, 임금과 같은 마루 공간에서 국사를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밑은 당하관이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목사는 박당(朴金+堂)이라는 인물이었다. 문집을 포함한 현존하는 사료에는 그에 대한 인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면 《경종실록》을 보면 그가 청주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임천군수를 역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 성문을 돌파할 당시 취침 중에 있다가 관노의 고함을 듣고 처자, 인부(印符) 등을 버리고 담장을 넘어 탈출했다.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 급창(及唱)이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의 충청도관찰사는 권첨(權詹·1664-1730)이었다. 그는 안동이 본관으로, 조선 관료사회에서 외직의 꽃인 관찰사에 거푸 역임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1724년 전라도관찰사, 1727년 충청도관찰사에 역임됐다. '권첨을 충청감사로 삼았다. 권첨과 정사효(鄭思孝)는 다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다.'- 인용문에 권첨과 정사효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신란 당시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 권첨은 전술한대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둘의 우유부단함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됐다. 당시 박필현이 전주읍성을 공격할 때 처음의 밀약과 달리, 마음이 변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인물이 바로 정사효이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사전에 밀약이 있었던 점은 향후 신문과정에서 엄청난 죄값으로 작용했다. 권첨은 앞서 밝힌대로 1827년 8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그 즉시기 아닌, 해를 넘겨 부임했다. 그것도 교구(交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인좌 반란군에게 충청감영 관할인 청주읍성을 점령당했다. 교구는 신구 관찰사가 직인을 교환한다는 뜻으로,
이인좌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아들로 명문사족의 후예였다. 그의 처가 쪽도 명문으로, 그의 아내 윤자정(尹紫貞)은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의 손녀이다. 두 집안 모두 남인 계열인 것을 감안하면 당색에 따라 혼인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인좌는 아내 윤자정과 사이에 중명(中明)·仁明(인명)·문명(文明)·화명(化明) 등 네 아들을 뒀다. 딸도 뒀을 가능성이 있으나 사료에는 아들 이름만 등장한다. 무신란 때 4명의 아들이 어렸던 것으로 봐, 당시 이인좌 나이는 30대 초~중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내 윤자정도 거의 같거나 20대 후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이인좌는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 청천)의 집을 떠난지 정확히 21일만인 1728년 3월 27일 한양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역죄로 능지처참됐다.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은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4월 9일 송면 집에서 청주옥(그림)으로 끌려나와 대역죄인의 아내로써 신문을 받았다. 당시 청주옥은 지금의 남문로 영프라자 자리 쯤에 위치했다. 이인좌는 분명히 박필현과 함께 1728년 무신란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그러나 아내 윤자정은 "마지못해 거사를 했노라"는 식으로 남편 이인
1728년(영조 4) 무신란을 가리켜 청주지역에서는 '신천영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신천영(申天永·?-1728)의 당시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의미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 이인좌와 신천영이 내통했거나 사전 공모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다만 이인좌는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점령한 후 곧바로 신천영을 가병사(假兵使), 즉 임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했다. "권서봉을 청주 원으로 삼고 안성에 왔고, 가병사는 신경제의 손자 ·신천영으로 정했습니다."-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인 신천영 가문은 연산군 무렵에 청주 상당산성 동쪽인 낭성면과 가덕면 일대로 낙향, 대과급제 24명·진사 80명을 배출한 명문 사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8년 무신년의 난에 신천영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신은, 숙부 신필회, 동생 신석영, 신익영, 사촌 신필대 등 문중 구성원 대부분이 가담, 영조와 노론세력 타도를 외쳤다. 무신란과 관련해 의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한때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1617- 1680)다. 그는 신천영의 5대 조부인 신식(申湜·1551-1623)의 외손자가 된다. 이는 신천영 문중이 선대로부터 남인의 당색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숙종대 청주지역의 남인세력들은 사사
[충북일보] 청주국제공항에 조류 대응을 위한 드론이 투입된다. 이와함께 향후 사망자 발생 사고를 일으킨 항공사에는 1년간 운수권(항공기 운항권)을 배분하지 않는다. 국토교통부는 30일 공항시설, 항공사 정비·운항 체계, 항공 안전 감독 강화 등 항공 안전 전반에 대한 개선 대책인 '항공안전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국토부는 공항 안전성 증대를 위해 충돌 시 큰 피해로 이어지는 둔덕 형태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을 제거하고, 경량 철골구조로 전면 교체한다. 종단안전구역 권고기준(240m)에 미달되는 김해, 무안, 원주, 여수, 울산, 포항경주, 사천 등 7개 공항 시설은 부지확장 또는 활주로 시단 조정을 통해 종단안전구역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연장이 불가한 경우 EMAS도입을 통해 활주로 안전을 확보한다. 조류 충돌 재발 방지에도 나선다. 무안공항에 조류탐지레이더를 시범설치해 레이더 운용 경험과 데이터를 축적하고, 인전·김포·제주 등 민간 공항은 이번 달 부터 순차적으로 설계 등을 거쳐 2026년 도입을 추진한다. 청주공항을 비롯한 민·군 겸용공항은 군 등 관계기관과 기술적 고려사항, 추진일정 등 협의를 거쳐 하반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오는 6월 3일 치러지는 21대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충북 지역 정치권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각 정당은 '대선 모드'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전 대표가 후보로 확정되면서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에 본격 착수했다.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본선 조직을 구성하는 등 전열 정비에 힘을 쏟고 있다. 29일 지역 정치권에 따르면 민주당 충북도당은 다음 달 초 선대위 구성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충북선대위는 도당을 중심으로 전·현직 단체장과 국회의원까지 폭넓게 아우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광희(청주 서원) 충북도당위원장과 도내 현역 국회의원 등이 공동으로 선대위원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현역 중 이연희(청주 흥덕) 국회의원은 이재명 대선 후보 캠프 총괄본부에서 중책을 맡아 활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도당은 5월 황금연휴가 지난 뒤 선대위 첫 회의를 발대식을 겸해 열기로 했다. 공직선거법에 선거일 전 30일부터 선거일까지 당원 집회 등을 열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별 선대위 구성도 본격화하고 있다. 다음 달 12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만큼 인선
[충북일보] "충북 이노비즈 기업들이 연결을 통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한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은 지역 내 탄탄한 경제 기반으로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30일 취임한 안준식(55) 신임 이노비즈협회 충북지회장은 회원사와 '함께 성장하는 기술혁신 플랫폼'으로서 이노비즈협회 충북지회 역할을 강화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안 신임 회장은 "취임 후 가장 먼저 해야할 부분은 이노비즈기업 협회와 회원사 위상 강화"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대외협력위원회(위원장 노근호 전 충북테크노파크 원장) △경영혁신위원회(위원장 이미연 ㈜유진테크놀로지 대표) △회원사 협력위원회(위원장 한연수 ㈜마루온 대표) △봉사위원회(위원장 함경태 ㈜미래이앤지 대표) △창립 20주년 추진위원회(위원장 신의수 ㈜제이비컴 대표)로 5개 위원회를 구성했다. 안준식 회장은 도내 회원사들이 가진 특징으로 빠른 적응력과 협력네트워크를 꼽았다. 그는 "충북 이노비즈 기업은 제조 기반 기술력과 신사업으로의 적응력이 뛰어나다. 첨단산업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다수 분포해 있고, 산업단지 중심 클러스터화도 잘 이뤄져 있어 협력 네트워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