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앙탑(국보 제 6호)을 건탑하는데 사용된 석부재는 산척면 송강리 일명 산척산 일대에서 채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같은 내용이 학계의 최종 공인을 받을 경우 충주 중앙탑을 원형대로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지난 1917년 충주 중앙탑(공식 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엉터리로 조립했다는 증거는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 옥개석은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4조각으로 나눈 후 다시 꿰맞춤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 각층의 옥개석 세로선이 상하로 일치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충주 중앙탑의 옥개석은 2,3층 선이 가운데에서 우측으로 이탈돼 있다. 기단의 탱주와 면석 등에서도 잘못 조립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석탑의 탱주는 위치가 일정한 각격을 두고 배열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충주 중앙탑은 간격이 일정치 않다. 사람의 얼굴처럼 세로로 서있는 면을 말하는 기단 면석 역시 탱주와 마찬가지로 위치 배열이 일정해야 하나 지금의 중앙탑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같은 확인에도 불구하고 해체 직전의 실측도가 확인되지 않아 중앙탑을 원래대로 복원하는데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
한자 '表'(표)는 그것이 명사로 사용되면 '겉', '바깥' 등의 뜻을 지닌다. 반면 동사로 사용되면 '밝히다', '드러내다'로 쓰인다. 따라서 사당 '表忠祠'(표충사)에는 '충성심을 밝힌다'라는 뜻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의병장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헌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도 위치하고 있다. 두 사당은 명칭은 같으나 다른 점이 있다. 옥천 안남의 표충사에는 조헌 뿐만 아니라 아들 완기(完基·1570∼1592)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조헌은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지금은 정실과 소실 관계가 거의 성립하지 않고 또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완기만이 정실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3남2녀는 측실이다. 적자 완기는 22살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나머지 3남2녀는 대부분 장성했다. '조완도는 강음현감이고, 조완제는 전옥서 봉사이며, 다음은 조완배이다. 맏딸은 김노에게, 다음은 김성룡에게 시집갔다. 조완기는 자식이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완기는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하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일, 금산전투는 이보다 18일 늦은 8월 18일에 있었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두 전투에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크게 달랐다. 청주성 전투에는 대략 1천7백명, 금산전투에는 7백명이 참가했다. 불과 18일만에 의병의 수가 1천명 가량 줄었다. 관군은 전공이 의병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척 꺼렸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활동을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다. 심지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월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조헌이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책망하였기 때문에 순찰사가 감정을 가지고 각 고을로 하여금 조헌의 휘하에 응모하여 간 의병의 부모ㆍ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관군으로 하여금 응원해 주지 못하게 하여서…' 인용문은 계속 해서 '이때에는 조헌의 군사는 모두 흩어지고 7백 명의 의사(義士)가 남아 있어서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순찰사는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을 말한다. 음력 8월 18일의 충남 금산전투에서 7백여명의 의병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들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약간의 이설도 있으나 대체로 조헌
광복절인 15일 오후 청주 등 충북 일부 지역에 이른바 '물폭탄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이번 기록적인 강우현상은 16일까지도 예상되고 있어 적지 않은 비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이날 1시간 남짓 사이에 청주 106㎜, 오창 105㎜, 증평 72㎜(오후 6시 현재) 등을 기록하는 등 '물폭탄 현상'이 도내 중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장마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물폭탄 현상이 나타난 것은 △북태평양고기압의 수축 △고온 다습한 남서기류 유입 △수렴대의 매우 느린 이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지난주 중국 대륙까지 확장했던 북태평양고기압은 이번주 들어 남동 방향으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의 큰 기온차로 인해 수렴대(강한 비구름대)가 활성화됐다. 여기에 남서기류가 한반도로 강하게 유입되면서 수렴대의 강한 세력이 계속 유지됐다. 이번 물폭탄 현상은 정체전선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렴대가 매우 느린 속도로 남동진하면서 도내 대부분의 지역에 강우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강한 비구름층이 통과한 청주, 청원지역에서는 물폭탄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태풍은 북태평양고기압 세력의 외곽을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최근 발생한 태풍은
속보= 충주 중앙탑을 원형으로 복원하는 것은 물론 실측도 존재 사실이 밝혀진 이번 기회에 행방이 묘연한 1917년의 사리장엄들도 추적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고고미술자료 제 20집'(1968) 등 관련 논문에 따르면 조선통독부는 지난 1917년 11월 28일 중앙탑(공식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 6호)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목제사리함, 은제사리호, 고경(古鏡) 2매, 지편(종이조각) 등을 6층 탑신부에서 발견했다. 발견 당시 목제사리함 속에 은제사리호가 존재했고, 그 안에는 극소량의 사리가 담겨져 있었다. 고경 2매 중 1매에는 파상문(波狀紋)이 이었으나 나머지 1매는 무문(無紋)이었다. 일제는 6층 탑신부의 사리 발견 11일 후인 11월 29일에는 기단석 밑에서 은제 사리기(舍利器)를 발견했다. 그 과정은 기단 밑의 평판석을 제거하자 이번에는 구멍이 있는 덮개돌(蓋石)이 발견됐고 이를 제거하자 은제 사리기가 나타났다. 장준식 충청대 박물관장의 논문 '중앙탑'(충북의 석조미술 일부)에 의하면 총독부는 그해 12월 5일 발견된 충주 중앙탑 사리장엄들을 본부로 송부하라는 지시를 현장에 공문으로 하달했다. 이에 답한 고증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
일제가 충주 중앙탑(공식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 6호)을 엉터리로 해체·조립했으나 이를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는 실측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민족 정기를 회복하고 왜곡된 문화유산을 바로 잡는 차원에서 충주 중앙탑을 실측 도면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충주 중앙탑의 기울기가 심하자 지난 1916년 탑의 해체·복원을 결정했다. 이에따라 1916년 11월부터 1918년 1월까지 관련 작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지역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 당시 복원이 졸속으로 진행돼 충주 중앙탑이 본래 모습을 잃었다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충청대학 장준식 박물관장은 그의 논저 '충북의 석조미술'(충북학연구소 출간)에서 △4개 면의 탱주 숫자와 면석의 간격이 일정치 않고 △기단 갑석의 경우 부분적으로 다른 석질의 부재로 조립됐다고 밝혔다. 장 관장은 또 △탑신부의 경우도 조립이 잘못 되면서 세로선이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았고 △우주가 돌출되지 않고 면석으로 처리된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본보가 취재를 한 결과, 일제가 충주 중앙탑을 해체하기 직전에 작성한 실측도가 국가기록원에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
조헌이 우리고장 옥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는 않다. 조헌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라는 곳에서 조응지(趙應祉)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 잃고 계모를 맞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주경야독을 한 끝에 그의 나이 23살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왔다. 조헌은 보은현감도 역임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헌은 계모에게도 친모못지 않은 효도를 했다. 그는 혼자된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자청해서 보은현감이 됐다. 바로 계모의 친정이 보은이었다. 계모는 의붓아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사망하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찌 이런 인물을 다시 보랴. 다만 다른 어미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이지. 이 애야 말로 진실한 내 아들이다.' 조헌은 효자이면서 동시에 시조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실려 있는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내용 중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조헌은 왜군이 임진년에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하고 1년전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인용문에 등장하는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물안개가 끼었는데 뱃사공은 간데 없고 물가에 빈 배만 떠 있다. 그런 석양에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공과 빈 배, 그리고 나와 갈매기가 짝을 이루면서 작가의 외로운 심정을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소개하는 또 한 편의 시조도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 창랑은 푸른 물결, 조대는 낚시터, 낙조청강은 석양의 푸른 강, 유지는 버드나무 가지, 옥린은 물고기 비늘, 행화촌은 살구꽃이 핀 마을을 말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 설정이다.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종장은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음력 8월 1일과 2일로 약간은 엇갈린다. 그러나 1일 시작됐다는 내용이 보다 많다. 이날의 의병 공격은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반면 청주 부모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박춘무 의병군은 남문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기 쪽으로 퇴각해 있었던 방어사 이옥의 관군은 미호천을 건너와 청주읍성 북문을 공격했다. 이날 전투가 치열했는지 여부는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엇갈린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반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날 밤에 적이 저희들의 시체를 불태웠는데, 3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적은 북문(北門)으로 빠져 도망쳐 달아났다"라고 서술했다. 임란 발발 직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문소만록에서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전과가
폭염의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전국민이 집단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특히 주민들이 뙤약볕을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한낮 유동인구가 줄어드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본보가 기상청의 지역별 상세관측자료(AWS)를 통해 도내 지역의 한낮 최고기온을 조사했다. 그 결과, 도내에서는 제천시 백운면 일대의 한낮 최고기온이 상대적으로 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는 예상했던대로 인구, 고층건물, 콘크리트 면적이 상대적으로 많으면서 나타나는 도시 열섬현상으로 인해 최근 열흘 중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낮 최고기온이 도내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31~35도 사이의 기온 분포도를 보였다. 이와 관련 청주지역의 한낮 최고기온이 가장 높이 올라가는 시간은 오후 4시 20분 전후이고, 또 해질 무렵인 오후 7시가 돼야 한낮 최고치보다 대략 2도 정도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지역의 이같은 기온 분포도를 참고로 다른 지역도 살펴본 결과, 도내에서는 제천시 백운면 일대의 한낮 최고기온(4시 20분 기준)이 상대적으로 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운면 지역은 최근 열흘 중 7월 25일(29.2도), 26일(30.0도), 28일(29.4도), 30일(30.2도),
[충북일보]충북청주프로축구단이 부상 선수가 발생한 상황에서 경기를 중단하지 않은 심판진에게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자 청주FC 팬들이 한국프로축연맹을 규탄하는 등 발끈하고 나섰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최근 4차 상벌위원회를 열고 '심판 판정에 대한 과도한 항의'를 이유로 충북청주FC에 제재금 300만 원을 부과했다. 이번 징계는 지난 5월 31일 청주종합운동장에서 열린 K리그2 14라운드 충북청주FC와 경남FC 경기에서 있었던 청주 FC 선수의 부상이 단초가 됐다. 후반 68분 경남FC 헤난 선수가 태클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충북청주FC 여승원 선수가 몸쪽을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충북청주FC 측은 심판진에게 경기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후로도 수분간 인플레이 상황이 지속되다 경남FC 선수가 공을 라인 바깥으로 보내고 나서야 경기가 중단됐다. 이에 충북청주FC 구단 관계자가 대기심에게 여러 차례 항의했고, 결국 이같은 항의는 연맹의 징계로 이어졌다. K리그 상벌규정 유형별 징계 기준 2조 '심판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에 따르면 심판 판정에 대한 과도한 항의를 할 경우 제재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돼 있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민선 8기 충북도 출범 후 김영환 지사의 100대 공약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전담 조직 설치로 방향이 조정된 충북관광공사 설립이 검토된다. 국내외 관광객 유치, 관광 자원 관리 등의 효율적 운영과 관련 사업 확장, 충북 관광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다. 도는 타당성을 검토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충북관광공사 설립이 본격화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18일 도에 따르면 가칭 '충북관광공사 설립 타당성 검토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진행할 외부 전문기관 선정에 들어갔다. 다음 달 중 업체를 확정한 뒤 바로 용역을 의뢰할 예정이다. 용역 기간은 착수일로부터 6개월이다. 용역을 수행할 기관은 국내외 관광 여건과 충북 관광 자원 및 산업, 도내 관광 분야 행정조직과 기관 등의 현황을 분석한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관광 사업 추진 체계와 공사 설립·운영 성공 사례와 무산된 사례도 살펴본다. 조직과 인력 규모 등 공사 설립을 위한 기본 방향과 운영 체계를 설계하고, 공사 설립 시 충북도 역할과 기능, 공무원 정원 감축안 등을 검토한다. 충북문화재단 내 관광사업본부 기능을 흡수하고 통합 후 확대하는 방안도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