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부모산의 모유정 전설 밑에 거대한 집수지 존재하고 있었다.' 청주 부모산성(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 정상 경사면 부근에서 성곽시설의 하나인 집수지(集水址)지가 원형(圓形)의 형태로 발굴됐다. 특히 발굴된 집수지는 규모가 클뿐 아니라 완전한 형태로 발굴, 삼국시대를 포함한 통일신라기의 서원경(청주)을 대표하는 역사유적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13일 충북대박물관(관장 성정용 교수)은 올 4월부터 일대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 이같은 발굴 성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집수지는 물을 모아 두었다가 사용하는 성곽내 시설로, 전통시대 사람들은 성내 샘이나 연못조성 환경이 여의치 않을 경우 집수지를 축조·사용했다. 때문에 집수지는 성내 낮은 곳에 위치하는 연못이나 샘과 달리 남해 대국산성, 거제 둔덕기성 등의 사례에서 보듯 성정상 부근 경사면에서 일부 발굴되고 있다. 부모산성 집수지는 지난 2012년 모유정(母乳井) 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집수지는 발굴팀이 모유정 위에 식생하던 50년생 버드나무 거목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 최근 직경 최대 9m, 높이 2.5m 규모의 모습이 처음으로 완전히 드러냈다. 조사결
전통시대부터 존재하던 속리산 법주사의 금속제 미륵대불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반출됐고, 이후 일대는 1939년까지 약 70년 동안 허허벌판으로 잡초만 우거진 채로 방치됐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손을 맞잡은 사람이 전북 태인 출신의 갑부인 가산(嘉山) 김수곤(金水坤)과 당시 법주사 주지 석상스님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배불정치에 크게 분개했다. '당시의 주지 장석상씨는 대원군의 배불정치로 불상이 뜯겨 역사상 큰 오점을 후세에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에 일치, 바로 그 자리에서 김씨의 사재로 미륵불을 더욱 크게 세우기로 했다. 조각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김복진씨에 의해 높이 80자의 콘크리트 불상 건립에 착수했다.'- 가산이 미륵대불 불사금으로 내놓은 사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1960년대 발간된 경향신문은 밝히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콘크리트 시멘트불이 낙성되자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의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는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김수곤 씨의 특지로 경비 약 3만원을 들였다'라고 김수곤이 희사한 불사금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우리나라 화폐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하의 소(牛) 가격은 '70원'
청원군의 69년 역사도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중 신문이 활자화할 정도의 주요 사건·사고는 과 같다. 이들 사건·사고에 등장하는 '병든 돼지고기', '정관수술', '음성나환자', '머슴살이, '피반령 교통사고' 등의 표현은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회갑 잔치집 병든 돼지고기 먹고 6명 사망' (강내면 저산리 / 1958년 3월)과거 회갑은 장수의 기준이 됐다. 따라서 자식들은 부모가 회갑을 맞으면 친인척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초정,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것이 전래 풍속이었다. 그러나 회갑잔치는 종종 식중독 사고로 연결됐다. 1958년 3월 하순의 강내면 저산리 식중독 사고는 '병든 돼지고기'를 식재료로 사용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지난 27일 충북 청원군 강내면 저산리 회갑 잔칫집에서 발갱한 식중독 사건은 29일 하오에 이르러 3명이 또 사망함으로써 사망자는 도합 4명으로 증가되었고, 나머지 28명 식중독자 중에도 생명이 위태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식중독의 원인은 돼지고기가 변질된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하며 독소는 위생시험소에서 규명 중에 있다.'-당시 식중
법주사는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전통불교 여러 종파 중 법상종(法相宗)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법상종은 이른바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사상(彌勒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륵사상은 부처의 후신불이 미륵불이 어느 시점에서 도솔천에서 하생,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한다는 이론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로 치면 일종의 메시아 사상이다. 그러나 하생이라고 해서 미륵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물을 통해 온다고 불교는 말하고 있다. 법주사 경내에는 국보 제 64호인 석연지(石蓮池)가 위치하고 있다. 이 '석연지'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돌에 연꽃을 새진 연못' 정도가 된다. 바로 석연지는 '도솔천의 미륵불이 빨리 하생, 연못(池)을 통해 출현하라'는 상징적인 염원을 담은 조형물이다. 그렇다면 법주사 미륵불과 석연지는 같은 사상을 표현한, 미래의 구원을 염원하는 조형물이 된다. 이처럼 법주사는 창건 초기부터 미륵도량의 전통이 굳어져 있다. 법주사가 동제 대륵대불-청동미륵대불-금동미륵대불 등 미륵불을 줄곧 세우려 한 이유
우리나라의 어버이날은 1973년 3월 30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 6615호)으로 제정됐다. 따라서 오늘(8일)은 제 42회 어버이날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어버이날은 많이 알려져 있듯이 어머니날을 개칭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지난 1956년 어머니날을 제정,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어머니날은 이미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하나의 풍속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교회 주일학교가 중심적인 공간이 됐다. 다만 지금처럼 '5월 8일'이 아닌, '5월 둘째 공휴일'이 어머니날이었다. 1932년 5월 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내일이 어머니날입니다. 오월달 둘째 공일. 이날을 어머니날로 지키고 기념하는 풍속이 우리 조선에서도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일찍이부터 성풍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은 '어머니날 전날 밤이면 어머니를 위하여 기도회를 열고 기숙사 같은 데서는 어머니날이면 반드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도록 서로 깨우쳐 주며 주일학교에서는 카네숀 붉은 것은 어머니 모신 아이가 꽂고 흰 것은 어머니 없는 아이가 꽂고…'라고 기술돼 있다. 이처럼 국내 어머니날 행사가 기독교 신
신경식(辛卿植) 전의원은 1938년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 125-9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주고(1957년)와 고려대(1963년)를 졸업했고, 1963년 대한일보에 입사해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1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주일특파원, 주월남특파원, 정치부기자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73년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의 수석비서관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두 번 낙선한 끝에 청주 청원에서 13대(1988~1992·민정당), 14대(1992~1996·민자당), 15대(1996~2000·신한국당), 16대(2000~2004·한나라당) 의원에 내리 당선되는 등 4선 의원을 지냈다. 그는 4선의 의정생활 동안 문공위원장(1994)과 정부의 정무장관(1996), 그리고 한나라당 사무총장(1998)을 역임하는 등 국회, 당,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뿐만 아니라 정일권 국회의장, 김영삼 대통령, 이회창 대통령 후보 등 최고 정치지도자의 비서실장을 무려 다섯 번이나 맡는 등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1993년 3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초대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됐다. 그러자 당시 경향신문은 이런 인물평을 썼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정치
속리산 법주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은 팔상전(국보 제 55호)과 미륵대불이다. 팔상전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목탑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의 요청으로 1624년(인조 2)에 재건됐다. 조선은 유교가 국시였기 때문에 불교를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기의 승려들은 호국사상으로 무장, 전국 곳곳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따라서 임진 직후의 조선 조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계의 요청을 일시적으로 수용,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불사(佛事)가 많이 일어났다. 법주사 팔상전도 그런 배경하에 건립됐다. 이에 비해 법주사의 또다른 상징물인 미륵대불은 시간적으로 전통과 현대에 걸쳐 있는 묘한 조형물이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동불(銅佛)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건립과는 과정에서 일주문 밖으로 반출, 당백전을 주조하는데 사용됐다. 법주사 미륵대불이 동불이자 실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17세기 선비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 지은 '산중일기'에 잘 드러난다. "말을 달려올라 가보니, 법주사가 수정봉 아래에 있었다. 지대가 평평하였다. 제3문으로 들어가니 높이가 7,8
법주사 사하촌은 분지 지형을 띄나 경작지는 넓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가난을 조금이라도 떨치기 위해 부업을 해야 했다. 대표적인 부업이 복조리였다. 사하촌 주민들은 9월이 되면 복조리의 주재료가 되는 산죽을 채취하기 위해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채취된 산죽은 △하루쯤 말리기 △껍질 벗기기 △네 가닥으로 쪼갠 후 물에 담그기 등의 과정을 거쳐 복조리 재료로 사용됐다. 이때 여자와 아이는 바닥조리, 성인 남자는 '우기'와 '매끼틀기'를 주로 맡았다. '우기'는 바닥조리를 오므려서 묶는 것을, 매끼틀기는 복조리의 허리 부분으로 단단히 묶는 작업을 일컫는다. 복조리의 세는 단위는 '지리'로, 50개를 하나로 묶은 것을 말한다. 사하촌 주민들은 이 복조리를 '지리' 단위로 묶어 보은은 물론 청주, 상주장까지 내다팔았다. 속리산 사하촌 주민들이 두 번째로 많이 한 부업은 도리깨의 '노리'(아들) 만들기였다. 도리깨는 크게 손잡이 막대, 노리, 꼭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노리'는 보은지방 사투리로 표준어는 '휘추리'다. 복조리 제작이 끝나면 영농철 전까지 사하촌 주민들에게 약간의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주민들은 이때 봄부업으로 도리깨를 많이 만들었
미호천은 음성, 진천, 청원을 통과하면서 그 유역을 충북 최대의 곡창지대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수계 주변에 구릉지대가 발달, 가뭄이 자주 찾아왔다. 미호천 유역을 수리안전답으로 바꾸기 위한 역대 정부의 시도는 △초평저수지 건설공사(일명 청미수리조합 사업) △미호천Ⅰ지구 서업 △미호천Ⅱ지구 사업 등 3단계에 걸쳐 진행됐다.◇청미수리조합, 초평저수지를 초축하다 초평저수지는 미호천 중류인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초평저수지의 축조공사는 일제 강점기 때 시작됐다. 그러나 미군정기에 재착공을 하는 등 시국의 변화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58년 완공됐다. 당시 언론이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청미수리조합에서는 총공비 3억2천만원의 거액을 들여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에 남한에서 제일 큰 저수지를 착수하였는데 우선 연락도로 수로간선공사 기공식을 지난 26일 오후 1시 현장에서 공사담당자와 관계 군민이 다수 참석한 아래 성대하게 거행하였는데 준공은 명월이라 하며 이 공사가 끝나면 몽리(蒙利)면적이 1천7백 정보이고 혜택을 입을 농민수는 3천호라 하며 이로 말미암아 1년에 정곡(精穀)으로 45만석이 증수될 것이라고 한다.'- 초평저수지 축조는 1940-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는 충북 불교의 종가로 속리산의 상당한 면적을 소유하고 있다. 법주사로는 종교시설로, 경제적 영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주사가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데는 역사적인 계기가 있다. 1464년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는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복천암을 방문했고, 이때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의 대규모 토지를 복천암에 하사했다. '임금이 속리사와 복천암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에 쌀 3백석, 종 30명, 논밭 2백결을, 속리사에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 하사하고 신시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인용문 중에 '2백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결'(結)은 우리나라 전통시대 토지단위의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이 '결'(結)은 엄밀히 말하면 면적이 아닌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토지단위다. 세조의 아버지 세종은 토질의 비옥도에 따라서는 6등급, 그해 풍흉에 따라서는 9등급으로 분류하는 이른바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처음 도입·실시했다. 이때 전분6등법상의 1결 면적은 1등전과 6등전이 대략 3분의 2대 1 정도가 됐다. 즉 비옥도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등전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이 넒어지게 된다. 비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에서 베이커리나 카페 등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