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영(八詠)은 8곳의 경치를 읊었다는 뜻이다. 김득신이 '괴협취묵당팔영'의 제 1, 2영에서 일대의 서경을 노래했다면 제 3영은 생활의 정감을 노래했다. '우리 집은 강위에 있는데 / 문밖에 상선이 정박했네 / 달 밝은 백사장에 닻을 내리고 / 안개 낀 옛 골짜기에 돛을 내렸네 / 한수(漢水) 입구에서 바람을 타고 가 / 탄금대 곁에서 노를 두르리네 / 내일 고기와 소금을 팔면 / 촌민들 수 없이 모이겠지.'- 김득신의 생활공간이자 창작 장소인 취묵당 앞의 괴강으로 서해안 상선(商船)이 거슬러 올라와 소금과 고기를 팔고 있다. 인용문 중 '한수'(漢水)는 남한강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도 괴산 불정면 목도강변에서는 백중이 되면 매년 황포돛배의 정박 행사가 재현되고 있다. 제 3영은 그것을 문헌적으로 고증하는 시로 봐야 할 것 같다.제 4영은 괴강가에서 밤중에 물고기 잡는 모습이 마치 소설을 쓰듯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십분 발휘된 시로 볼 수 있다. '오래된 나루의 어부들의 횃불 / 초저녁부터 밝게 빛나네 / 여울머리에선 잠든 해오라기 놀라고 / 물 밑에선 물고기 숨고 달아나네 / 반딧불은 백사장 가에서 반짝이고 / 별빛은 선궁(仙
김득신은 괴강가의 취묵당짓는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창동(蒼童)을 시켜 작은 소나무를 베어내고 큰 소나무만 남겨두며, 작은 돌은 뽑아내고 큰 돌은 끊으며 썩은 흙은 제거하여 더러온 고을을 청소하니 기이한 형세와 경치가 번갈아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엔 마땅히 당우를 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청당태수에게 청해 목수를 얻어 재목으로 쓸 약간을 베어서 두 칸 당을 지었다.'- 인용문 서두의 창동은 청년같은 소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괴산임에도 불구하고 청당(청안현) 태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다소 이채롭다. 백곡은 이렇게 완성된 취묵당을 통해 멀고 가까운 곳의 경치를 확보했고, 이에 크게 만족해 했다. '성불산이 잇달아 솟아 있는 것, 남녘과 동녘까지 이어진 교외, 이탄 광탄의 급류, 물가에 늘어선 나무, 어촌마을이 벌려 있는 것, 구름이 일어나고 새가 날아가는 것, 고리가 노릴고 사람이 다니는 것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니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기쁘기가 예쁜 선녀가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만 같은 뿐만 아니다.'- 김득신은 처음에는 괴강으로의 낙향 생활에 불안함을 보였으나 얼마안가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으면서 일대 근·원경을 소재로
문법과 발음으로 봤을 때 넓은 의미의 사투리인 '청주 지역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서원대 배영환 교수가 최근 '청주지역어의 문법적 특징' 논문을 국문학논집 제 22집에 발표, 학계는 물론 일반의 주목을 받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지금까지 충청도 사투리는 △느리고 길게 빼는 '~했어유' 체 △대답할 때의 '야!' 정도가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배교수의 조사 결과, 공간적 범위가 한층 좁아진 청주지역에도 독립적이고 확연히 구분되는 '청주 지역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청주 지역어의 개념을 '청주 토박이가 오래도록 써오던 말'로 규정했다. 논문에 의하면 청주 지역어의 방언적 특징은 각종 조사와 종결어미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전자의 예로는 ①목적격 조사 '을/를'을 '얼/럴'로 발음하는 경우, ②보조조사 '은/는'을 '언/넌'으로 발음하는 사례, ③여격조사 '한테'를 '한티', '헌테', '하테' 로 발음하는 경우, ④처격조사 '에/에서'를 '이/이서' 등으로 발음하는 사례 등이 있다. 이밖에 ⑤도구격 조사 '으로'를 '이루', ⑥보조조사 '밖에'를 '배끼', ⑦'부터'를 '부텀', ⑧'마다'를 '마두'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김득신의 문집인 백곡집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날 수 있다. '괴강에 머문 지 4년이 넘는데, 철에 따라 경물로 시를 지으니 시주머니가 넉넉하네'(槐江泥滯四年强 時物供詩富錦囊). '명성을 다투고 이익을 탐함은 내 일이 아니니, 괴강에 돌아가 모래밭에 앉아 낚시질하리'(爭名貪利非吾事 歸去槐江坐釣沙).그는 취묵당 주변의 괴강가 일대를 철따라 다양하게 시의 소재를 얻을 수 있는 공간, 명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는 곳 등으로 표현했다. 다음 시도 백곡이 괴강가를 봄날의 흥취에 마음껏 젖을 수 있는 곳, 또 뒷산이 되는 개향산을 빼어난 명승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괴협에 봄기운이 돌아 홀로 돌아오니, 시골 흥취가 느긋하여 막을 수 없네'(春生槐峽獨歸來 野興悠悠不可哉). '꿈 속의 넋이 또한 개향산의 빼어남을 알아, 울긋불긋한 벼량을 밤마다 올라가네'(夢魂亦識香山勝 翠壁丹厓夜登). 그러나 김득신이 처음부터 괴강가 일대를 마음의 안주처로 흡족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취묵당과 초당을 지어 은거를 시작한 뒤에도 벼슬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했음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출처는 모두 백곡집이다. '이 몸이 어찌
사적 제 317호인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사지 석실(石室)이 창건 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해체·보수된다. 이에따라 미륵리사지의 상징적인 문화재이자 보물 제 96호인 석조여래입상을 당분간 볼 수 없게 됐다. 23일 충주시는 38억원(국비 26억)의 예산을 들여 금년부터 오는 2016년까지 7백20일 동안 미륵리사지 석실을 전면 해체·보수하고 일대를 부분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풍화가 심해 박리현상과 균열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면석들은 세척 후 보존처리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충주시는 '석실을 3면에서 구성하고 있는 면석 전체 공간은 119㎥에 달한다'며 '일대가 작업장이 되는 만큼 석조여래입상에 보호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밖에 개개의 면석들은 △암석상태 조사 △세척작업 △풍화억제처리 등의 과정을 거쳐 보존력을 더욱 높이게 된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화강암 특유의 박리현상과 하중으로 압력균열로 인해 미륵리사지 석실 전체가 구조적인 불안정 상태에 놓여 있고,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해 왔다. 미륵리사지 석실을 구성하고 있는 화강암(백악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파껍질처럼 떨어져 나가는 암석 특징을 지니고 있
김득신은 여러 정황상 목천현 백전(栢田·지금의 천안신 병천면 가전리)에서 태어나 20대까지 보냈고, 그 이후는 한양에서 생활한 것으로 여겨진다. '병자피난초작'(丙子避難初作)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난리통에 한 번 서울 집 떠나온 뒤로 / 홀로 깊은 시름 안은 채 삼처럼 어지럽구나 / 깊은 골짜기 쌓인 음기에 봄이 더디니 / 작은 매화가 추위에 움츠려 피지 못하네 /.../ 홀로 하늘가 한 구석에 떠도는 이 내 신세 / 병란에 소식 끊기어 깊은 시름만 안고 있네 / 두 장모와 최모 박모 친구들 잘 있는지 / 서로 만난다면 한스러움 금방 그칠텐데 /.../'- 김득신은 그의 나이 32살 때 병자호란(1636년)을 만나 영남지역으로 피난했다. 이 시는 그때 지은 흔치 않은 장시(長詩)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뒤에 이어진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그해 겨울 영남지방에 눈이 무척 많이 왔음을 알 수 있다. '듬성한 수풀 너머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 푸른 절벽에 기댄 절간이 있나보다 / 아이놈과 함께 찾아가려 하지만 / 봄눈이 너무 많이 쌓였으니 어이하리 / 멀리 서울서 온 나그네 / 이별의 정한 가누기 어렵구나 / 이 산 어디에서 봄빛을 찾을꼬 / 찬 골짝
하사용 씨는 1930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의 미호천 제방 옆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일대를 애장터 또는 떼집거리 등으로 불렸다. 지명 그대로 일대는 버려진 황무지에 집 없는 사람들이 움막이나 떼집을 짓고 기거하던 빈민촌이었다. 하 씨의 사진에 움막집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움막집은 말이 집이지 방바닥은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깔았고, 흙이 덕지덕지 붙여진 벽틈에로는 빈대들이 낮에도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씨는 부모를 졸라 어렵게 강외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밀린 월사금(수업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학력은 여기서 멈췄다.경찰지서 소사에 넝마주의까지 그런 사용은 10살 되던 해 이웃 아저씨의 배려로 면단위 경찰지서인 주재소의 소사(심부름꾼)로 취직했으나 이것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의 배고픔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족과 자신의 연명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는 이번에는 넝마주이를 했다. 그 시절에는 버리는 것이 많지 않아 주워 모을 것도 별반 없었다. 마을 어귀를 돌고, 조치원 읍내를 돌아다니며 종이, 철사, 유리조각, 헌 고무신, 버려진 기저귀 등 고물을 빈 자루에 주워 모아 고물상
지난 2012년 경북 고령에서 괴산 문광면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묘지(墓誌·혹은 묘지명)와 철릭 등 이문건(李文楗·1494-1567) 부부묘 출토유물이 대거 충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20일 성주이씨 묵재공파 문중에 따르면 충북도는 최근 이들을 포함해 이장하는 과정에서 함께 출토된 백자 항아리, 여모(여성용 모자), 세조대(細條帶) 등 전체 5건 10점의 유물을 도유형문화재 제 360호로 일괄 지정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문건가 족보는 도유형문화재 제 361호 지정했다. 앞서 본보는 지난 2012년 7월 2일자 기사에서 '괴산 성주이씨 문중이 이장 중에 발견된 묘지명과 철릭 등 관련 유물을 보관상 어려움을 느껴 충북대에 기탁했다'고 보도, 관련 유물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바 있다. 이번에 지정된 23x17㎝ 크기의 묘지명 6편은 흔치 않게 남편(묵재 이문건)이 아내(안동김씨·?-1566)를 위해 직접 명문을 쓰고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먼저 간 부인을 생각하는 애뜻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묘지명은 망자의 덕과 공로를 글로 새긴 후 묘지에 넣은 것으로, 전통시대 남편이 아내를 위해 직접 글을 쓴 사례는 고려문신 최루백(崔婁伯·?~1205)이
백곡 김득신은 괴강이 내려다보이는 개향산 언덕에 취묵당을 건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활공간인 초당(草堂)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풀 草' 자에서 보듯 이때의 집은 사대부가의 격식을 갖춘 것이 아닌, 작고 허름한 초가로 여겨진다. 김득신이 초당과 관련해 남긴 글은 당시 괴산지역 공간과 자연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먼저 그가 남긴 '초당서'에는 광탄, 방간야, 성불산, 한림, 장군 등의 명사가 등장한다. '성황당 서쪽 광탄 북쪽의 方干野(방간야)와 더불어 성불산이 펼쳐진 곳에는 언덕이 쓸쓸하지만 한림의 옛집이 있고, 남은 터가 활량하지만 장군의 옛 자취를 알 수 있는데 사람이 사는 연기는 끊어졌지만 풍월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인은 천석고황(泉石膏亡+月)과 운림질고(雲林疾痼)가 있어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붉은 먼지를 떠나니 초헌과 면류관에는 관심이 없고 강호에 백발을 비추며 낚시질함이 소원이다.'- 인용문 중 '한림'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부친 김치, '장군'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조부 김시민을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성불산은 현재도 유통되는 지명으로 괴산 서쪽의 해발 530m 산을 지칭하고 있다. 근래 현 임각수 괴산군
누정의 본래 기능은 취경(取景), 즉 경치를 모으는데 있다. 때문에 전통 누정은 방이 없는 대신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 듯이 탁 트였다. 누정에는 주인의 의도에 따라 누(樓)·정(亭)·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의 이름이 붙으나 그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 누정의 명칭은 자연, 동식물, 사람 호칭, 역사적인 사건 등과 관련된 것이 많다. 우리고장을 위주로 예를 들면,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의 금호루(錦湖樓)는 금강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물과 관련된 누정 명칭으로는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의 관어대(觀魚臺)가 있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민욱(閔昱·1559-1625)은 이곳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뜻에서 '관어대'로 이름지었다.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의 가학루(駕鶴樓)는 누각이 학의 날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전되고 있다. 추풍령 정상에서 승용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언덕 위의 전통건물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가학루다. 사람 호칭과 관련된 누정으로는 애한정(愛閑亭)과 백석정(白石亭)이 있다. 괴산읍 검승리에 위치하고 있는 애한정은 조선 현종 때 괴산군수였던 황세구(黃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