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충북지역 현감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국록을 먹고 있는 관료의 입장에서 반군을 적극적으로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함은 물론 일부는 반군에 협조했다. 당시 회인현감 김도응, 황간현감 이정휘, 진천현감 임상극, 청안현감 이정열, 보은현감 조문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연히 영조는 이들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따라서 '失臣節也'(신하의 절조를 잃었다)라며 처형을 명령했다. '군문에서 회인의 전 현감 김도응(金道應)과 황간의 전 현감 이정휘(李挺徽)를 효시케 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용문 중 '도부'는 관찰사가 수령의 보고에 대하여 답하는 공문을 말한다. 따라서 '도적의 관문을 도부하였다'라는 인용문의 표현은 반란군의 수괴 이인좌가 내려보낸 공문을 김도응, 이정휘 등 당시 두 고을 현감들이 접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이인좌 반란군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영조는 '失臣節也'라는 말로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영조실록》에는 충주지역 반란 인물로 전회에 소개한 민원보
[충북일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욕돌역(褥突驛)은 과연 지금의 충주시 신니면 용원 일대일까. 충주시민연합은 얼마전 보도자료를 내고 △문무왕이 충주 순행 중에 머무른 욕돌역에 문화공원을 조성할 것 △문무왕을 감동시킨 능안(能晏)의 가야무 전승할 것 △그리고 우륵국악단의 전통 고증에 따른 내실화 등을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충주시민연합은 욕돌역의 공간적인 위치가 지금의 충주시 신니면 용원초등학교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의 주장대로 삼국사기에는 욕돌역이 분명히 등장한다. 다음은 그에 대한 번역문이다. '25일, 임금이 귀국하던 길에 욕돌역(褥突驛)에 머물렀는데, 국원(國原)의 관리인 대아찬 용장이 사사로이 잔치를 열어 임금과 시종하는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 긴주(緊周)의 아들인 15살 소년 능안(能晏)이 가야의 춤을 추었다. 임금이 그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앞으로 불러 등을 두드려주며 금술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幣帛)을 자못 후하게 주었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원문을 옮기면 '二十五日 王還國 次褥突驛 國原仕臣龍長大阿飡 私設筵 饗王及諸侍從 及樂作 奈麻緊周子能晏 年十五歲 呈加耶之舞 王見容儀端麗 召前撫背 以金盞勸酒 賜幣帛
[충북일보] 5월 23일△이용민(충청일보 기자)·조윤경(아시아경제신문 기자)씨 결혼=23일(토) 낮 12시 청주 상당구 문의면 청남대.△박걸순(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씨 자혼=23일(토) 오전 10시 30분 발리웨딩 컨벤션센터2층 펠리체홀.△노재관(충북도농업기술원 친환경연구과 식품개발팀장)씨 자혼=23일(토) 오후 2시 CJB 웨딩컨벤션 3층 신의 정원△윤태(전 충북도농업기술원 연구개발부장)씨 자혼=23일(토) 오후 1시 청주시 흥덕구 복대교회 본당△이경이(청주시 강서보건지소 주무관)씨 결혼=23일(토) 오후 2시30분 발리웨딩홀 2층 펠리체홀△정창헌(전 청주시 영운동장)씨 자혼=23일(토) 오후 2시30분 발리웨딩컨벤션 2층 펠리체홀△강혜진(옥천군 옥천읍)씨 결혼=23일(토) 낮 12시 옥천명가하우스웨딩홀 2층 △배유미(서원구 수곡2동 주민센터)씨 결혼=23일(토) 오후 1시 청주 마리앙스웨딩컨벤션 마리아쥬홀5월 24일△한대수(충주시 농업정책국장)씨 여혼=24일 낮12시 충주시 금릉동 파라다이스웨딩홀2층 피렌체홀(010-3412-9972)
채찬(蔡燦, ?~1924)은 한말 의병 출신으로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남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백서농장의 농감(農監)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장으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무장투쟁의 최선봉에서 활약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명으로 백광운(白狂雲)을 사용하였는데, 따라서 당시 '백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졌다.◇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채찬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고,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소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군으로 투신하기 위해 남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구한말 국내의 의병이 망국 후 만주 독립군으로 전환한 역사적 사실을 실증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서간도지역에는 1911년 유하현을 중심으로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과 군사훈련을 할 수
[충북일보] 환국(換局)은 정권이 급작스럽게 교체되는 국면을 의미한다. 조선 숙종대에 이같은 환국이 경신, 기사, 갑신년에 3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주고 받았다.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남인, 기사환국으로는 서인, 그리고 갑술환국으로는 다시 남인을 몰아냈다. 결국 서인이 최종 승자가 됐고, 서인은 그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됐다. 환국의 소용돌이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기사환국(1689)으로 전라도 정읍에서 먼저 사약을 받았지만 남인의 영수 민암(閔墨+音·1636-1693) 역시 갑술환국(1694)으로 유배지 제주도에서 사사됐다. 민암의 동생이 민희(閔熙·1614-1687)이고, 그 또한 형과 같은 남인의 당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환국의 소용돌이 과정에서 남해안의 궁벽한 곳으로 유배돼 끝내 그곳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멀리 귀양간 죄인 민희가 순천의 배소에서 죽었다. 민희는 탐오하고 방탕하며 용렬하고 고루하므로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나이가 74세이었다.'- 1728년 일어난 무신란과 관련해 청주지역만 많이 부각돼 있으나 우리고장 충주지역의 호응도 무척 강했고, 이를 이끈 인물이 민희의 손자인 민원
[충북일보] 경종의 급서하고 그의 배다른 동생인 영조가 즉위하자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이들 대부분은 영조에 호감을 갖지 않은 세력인 소론과 남인계열의 당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중에는 권서봉(權瑞鳳·?-1728)이라는 인물로 있었고, 그는 이 상소로 인해 유배를 가야 했다. '임금이 오두석과 이삼령 등의 상소를 읽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흉악하고 참혹하다. 저 무리들의 흉악한 상소가 어찌 모두 자기 마음에서 나왔겠는가. 국문할 필요가 없다. 이덕배·오두석·이삼령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이덕표·권서봉(權瑞鳳)·최선·정전·이가운은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권서봉의 유배생활을 그리 길지 않아, 무신란 1년 전인 영조 3년(1727)에 해배됐다. '을사년 이후 이명의는 북변으로 귀양가 있었고 권서봉도 또한 근읍(近邑)으로 귀양가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에 이르러 이명의는 호남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권서봉도 잇따라 방한(放還)되었다.'- 인용문 중 '근읍'은 말 그대로 가까운 읍, 그리고 '방한'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권서봉은 마음의 칼을 갈고 있었고, 이인좌가 이를 놓칠리가 없었다. 이인좌는 사람을
[충북일보]권순명(權順明, 1876~미상)은 충북 제천 사람으로 후기의병에 참여하여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908년 10월 김춘쇠(金春釗) 의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의병전쟁에 참전하여 1년 2개월 동안 6백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기도 양주·가평과 강원도 홍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 의병의 본향 제천 장담에서 태어나다 권순명은 1876년 충북 제천군 근좌면 장담리(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서 태어나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제천 장담마을은 한말 의병운동의 발상지였다. 한말 의병사에서 제천은 그 중심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천을 '의향(義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연원한다. 제천이 의병의 발상지이자 중심지가 된 까닭은 바로 제천 장담마을에 화서학파의 정맥을 이은 유중교가 살고 있었고, 스승을 찾아 온 그의 제자 유인석이 한 때 거주했기 때문이었다.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학문 세계를 철저히 존중하였던 이항로를 연원으로 한 화서학파는 전기의병을 이끌어 나갔다. 화서학파는 서세동점과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정통 성리학적
[충북일보] 병마절도사는 조선시대 각도의 최고 무관, 즉 오늘날로 치면 방위사령관으로 종2품의 품관을 지녔다. 우후(虞侯)는 병마절도사를 보필하는 직으로 달리 아장(亞將), 부장(副將)으로 불렸고, 종3품의 품관을 지녔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직손인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었고, 바로 밑의 우후는 박종원(朴宗元?-1728)으로 상당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급습하던 그날(3월 15일), 병마절도사(혹은 兵使) 이봉상은 질펀한 술자리를 가졌다. 후대의 표현이지만 다산 정약용은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悲西原]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감회를 읊었다. '도적떼는 못가에서 칼날 갈고 있을 때(群盜池邊礪鋒刃) /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元師營中鬧絲竹)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紅酒··挾素妓) / 아문에 칼날 미쳐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劍及牙門·不起)'- 그러나 어찌됐건 병사 이봉상은 '국가'라는 제단에 피를 흘림으로서, 지금은 청주시 모충동의 표충사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반면 당시 우후였던 박종원은 처음부터 무장답지 않은 길로 나갔다. 그는 이인좌 반란군이
[충북일보] 속보= 청주대학교가 청자 등 고가의 유물을 매입할 때 마다 감정위원회를 개최했으나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면이 많아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감정위원들은 적정 감정가격만 제시하지 청주대가 실제 그 가격에 최종 구입하는지는 모른다"는 발언이 나와, 이 부분도 함께 살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대는 김윤배 전총장이 재임하던 시기인 지난 2010년 10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4년 동안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전기 금속활자본 등 13억 4천만원 어치의 유물 10점을 외부로부터 구입했다.(본보 4월 28일자 1면) 청주대 박물관은 그때마다 3~6인의 감정위원회를 구성, △매도 의사를 지닌 유물의 진-가품 여부 △유물의 재화적인 가치 △청주대의 적정한 매입 가격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청주대 박물관 관계자는 "감정위원 중 한 사람이 의견을 취합해 감정 의견서를 썼고, 또 비전공자가 감정에 참여한 것은 당시에 복수감정이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때의 복수 감정은 도자기류와 전적류(고서적)가 당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에 진행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보가 확인을 한 결과, 이 관계자의 말은 일부 사실과 다른
[충북일보] 영조태실 터(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로 지난 1930년대 민간인에게 이전됐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은 현재 고인쇄박물관이 근무하고 있는 이규상 씨다. 그는 지난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한국의 태실≫(청원군·청원문화원 간)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 민담편에 의하면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
[충북일보] 충북도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피해 농가의 손실 보전과 경영 회복을 돕기 위해 소득안정자금을 지원한다. 도는 1차 조사를 통해 2024~2025년 동절기 AI 발생으로 손실을 본 축산농가 59곳에 총 11억 원의 지원금을 지급했다고 16일 밝혔다. 출하 또는 입식 지연 농가나 조기 출하로 사료 잔량이 남은 농가를 대상으로 피해액을 산정해 보조금 형태로 지원했다. 도는 이달 중 2차 대상 농가 지원을 추진한다. 지원 대상은 청주 11곳, 진천 5곳이다. 1억3천만 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도 관계자는 "고병원성 AI 발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농가들이 신속하게 경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충북에서는 지난해 11월 7일 음성군 금왕읍 한 육용오리 농가를 시작으로 청주 2건, 음성과 진천에서 각 3건의 고병원성 AI가 발생했다. / 천영준기자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