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경상도 지역의 지리적 경계는 마치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 서쪽으로는 소백산맥〔백두대간〕 줄기가 아구리가 좁은 U자 모양으로 감싸고 있고, 그 가운데를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같은 닫힌 구조의 지형에서는 배타적이고 폐쇄성이 강한 문화가 발달하기 쉽다.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서 보듯 팔도 가운데 경상도 사투리는 유독 발음이 강하다. 어문학자들은 이같은 원인을 경상도의 닫힌 지리구조에서 찾고 있다. 신라는 고대부터 이같은 환경탓에 백두대간을 늘 의식했다.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 충주~문경 사이에 위치한 계립령을 처음으로 열었다. 다른 지역 입장에서 보면 고갯길 하나 뚫은 것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역사적인 일인 양 《삼국사기》에 기록하였고, 이후부터 계립령에는 '우리나라 역사문헌에 등장하는 제 1호 고개'라는 서술어가 따라다니고 있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대부터 백두대간을 돌파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병아리가 달걀껍질을 쪼고 나오려는 모습과 같았다. 그 결과, 신라는 550년 백두대간 죽령(689m)을 넘어 단양에 적성비(赤城碑·국보 198호)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충북일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고인이 생전에 행하였던 '휘호 정치'가 새삼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연초에 써 언론에 공개한 '대도무문(大道無門)', '유시유종(有始有終)', '제심합력(齊心合力)', '무신불립(無信不立) 등의 휘호는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도무문'은 지난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과 1995년 김종필 전 민주자유당 대표와의 갈등 때, 1997년 임기 후반기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뜻의 '유시유종'을 휘로로 썼다. 이밖에 1998년 IMF 때는 힘을 합쳐 외환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제심합력', 이회창 전 총재와 갈등 때는 신의를 강조한 '무신불립' 휘호를 썼다. 이들 휘호 가운데 YS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한 것은 '대도무문'이다. 그러나 대도무문은 본래의 의미가 다르게 알려진 가운데 지금도 정치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 YS는 유혹에 흔들리거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바른길을 걷겠다는 의미로 대도무문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대도무문은 본래 불교 가운데 선(禪) 불교, 그리고 그 지적 재산권은 중국남송 이종(理宗) 황제 때
[충북일보] 서상열(徐相烈, 1854∼1896)은 1895년 제천의병에 참가하여 선봉장 역할을 한 인물로, 학문으로는 김평묵과 유중교 문하에서 수학하여 화서학파를 계승하였다. 그는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 강경한 투쟁노선을 갖고 대항하면서 의(義)를 실천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한말 전기의병장이다. ◇위정척사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다 서상열은 충북 단양 출생으로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서제순(徐濟淳)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호는 경암(敬菴), 당호는 춘수당(春睡堂)이며, 본관은 달성이다. 서상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인품이 바르고 굳세었다고 한다. 그는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문장에도 또한 능하였다. 그는 당시 조정에서 묄렌도르프[P.G M·llendorf, 穆麟德]를 병조참판에 임명하자 이를 개탄하며 '이런 판을 어떻게 사대부가 벼슬할 만한 때라고 하겠는가' 하고서는 포천으로 낙향하였다. 서상열은 영평(永平)에 거주하였던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화이(華夷)와 인수(人獸)에 대한 분별을 깨닫고 위적척사사상을 강화하였다. 이후 1889년 유중교(柳重敎)가 제천 장담으로 이주하였음을 듣고는
[충북일보] 교토의 교외 남쪽을 낙남이라고 하는데, 낙남에는 도후쿠지(東福寺)ㆍ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稻荷神社)ㆍ우지가미신사(宇治上神社)ㆍ뵤도인(平等院)ㆍ다이고지(醍·寺) 등의 유서 깊은 사찰과 신사가 있다. 후시미의 남쪽에서는 가쓰라강과 가모강이 합쳐지는데, 교토의 서북쪽에서 발원된 가쓰라강이 가모강보다 훨씬 수량이 많은 강이기 때문에 합쳐진 후에도 강의 명칭은 가쓰라강이 된다. 이 강은 다시 교토부와 오사카부의 경계에서 우지천(宇治川)과 기쓰강(木津川)이 합류하여 더욱 큰 강인 요도가와(淀川)가 된다. 이 일대는 도래인과 깊은 관련을 가진 곳이 많다. 예를 들어 기쓰강이 휘감고 흐르는 교토부 기쓰가와시(木津川市)의 고마데라(高麗寺)터에서는 2007년에 일본 최고(最古)로 추정되는 기와 토담장이 발견되었다. 이 사찰은 610년께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이 창건한 것인데, 고마(高麗)씨의 가족 사찰로 알려진 고려사는 나라(奈良)현의 아스카(飛鳥)사와 함께 일본 최고의 절로 알려져 있다. 2008년 교토부 재류외국인 통계에 따르면, 교토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41,119명인데, 이 가운데 한국인이 27,060명으로 70%정도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충북일보] 조선 왕실은 태(胎)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명당자리를 고른 후 해당 예법에 따라 정성스럽게 매장했다. 그 시설물이 태실(胎室)이다. 나아가 왕실은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했다. 우리고장에는 진천군 진천읍의 김유신 태실, 충주 엄정면 괴동리의 경종대왕 태실, 청주 낭성면 무성리의 영조대왕 태실, 보은 속리산면 사내리의 순조대왕 태실,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 등 5개 태실이 존재한다. 왕명과 인명이 부여된 것에서 보듯 이들 태실은 주인이 모두 확인된다. 이에 비해 충청북도기념물 제 96호인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은 지명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태실의 주인이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역 학계는 대체로 선조의 7번째 아들로,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仁城君)을 산덕리 태실의 주인으로 보고 있다. 태실비는 높이 98㎝, 너비 46㎝, 두께 14㎝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고, 그 뒷면에
[충북일보] 전어(錢魚)는 가을 이후가 제철로, 지금이 그런 시기에 해당한다. 전어의 어원이 재미있다. 백과사전은 전어에 대해 '등쪽에 갈색 반점의 세로줄이 여러 개 있고 아가미 부근에는 커다란 흑색 반점이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바로 전어는 흑색 반점이 '동전'〔錢〕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어와 관련된 속담으로 '봄 도다리, 가을 전어' 그리고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다' 등이 있다. 전어는 산란기인 봄에서 여름까지는 맛이 없지만, 가을이 되면 체내에 지방질이 축적된다. 따라서 생선으로 구울 때 지글거리며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 내음이 매우 고소하기 때문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라는 속담도 생겨났다. 최근 모 방송인이 고소를 많이 한다고 해서 '고소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시대에도 상소를 많이 하는 '상소남' 선비들이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조헌(趙憲·1544-1592)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조헌은 임진왜란 가능성을 예상하고 전쟁 발발 1년전 도끼를 메고 한양 궁궐로 올라가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했다. 지부상소는 나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도끼로 쳐달라는 의미를 지닌다
[충북일보] 속보= 증도가자와 관련된 진위 논란이 과학의 영역인 금속공학 분야로 옮겨붙고 있다. 이에 따라 증도가자 위변조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음과 동시에 논란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3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강태이 연구사가 증도가자 위작 가능성을 제기한 데 이어, 이번에는 경북대 남권희 교수에 의해 증도가자로 지목돼 온 금속활자에서 '테크네튬'(Tc)이라는 인공원소가 검출됐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한겨레〉 15일자 기사에 의하면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이재정 학예연구관이 14일 열린 한국서지학회 가을공동학술대회(국립중앙도서관) 토론에서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증도가자로 지목한 '법'(法) 금속활자의 문제성을 거론했다. 그는 "남교수가 용역을 수행한 보고서를 보면 '법(法)'자의 성분 구성은 산소(O) 1.74%, 규소(Si) 0.49%, 구리(Cu) 88.5%, 테크네튬(Tc) 2.62%, 주석(Sn) 6.66%로 나와있다"며 "그런데 미량이 나온 테크네튬(원자번호 43)은 과학자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최초의 원소로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따라서 이런 원소가 검출됐다는 것은 활자를 위
[충북일보]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은 영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1912년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이다. 그는 대전에서 태어났으나, 1883년 영동으로 이사한 뒤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1888년과 1903년에 각각 의금부도사, 홍문관의 서연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하자 「토역문(討逆文)」을 작성하여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했으며,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했다. ◇ 충북 영동에서 제자 양성에 주력하다 송병순의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1839년 4월 10일 충남 회덕(懷德) 석남(石南)(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으로 아버지는 면수(勉洙), 어머니는 이씨이고,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송병순은 7세 때부터 참의를 역임한 백숙 달수(達洙)와 좌의정을 역임한 당숙 근수(近洙)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공부했다. 송병순에게 있어 성리학은 단순한 차원의 학문이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로서 마땅
[충북일보] 申八均(1882~1924)은 진천의 전통적인 무반 가문의 후예로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김경천·이청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 '군인계의 삼천'이라 칭해질 만큼 남만주 일대의 무장투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사, 특히 만주지역 무장투쟁사에서 상징적인 존재로서, 대한제국 군대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연계하는 가교적 인물이다. ◇ 진천 논실 전통 무반가문의 후예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 서울 정동에서 한성부 판윤을 역임한 신석희(申奭熙)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동천(東川)이다. 그를 '삼천'의 한 사람으로 부른 것은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관원이력서·에는 거주지가 충북 진천군 이곡면(梨谷面) 노곡리(老谷里, 현재의 이월면 노원리)로 되어 있다. 그의 선대는 무관 벼슬을 하였던 사람들이 많다. 그의 고조부 홍주(鴻周)는 4형제인데, 무과에 급제하여 순조 대에 훈련대장을 지냈고 형 봉주(鳳周)와 응주(應周)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와 포도대장을 지냈다. 증조부 의직(義直)도 무과에
[충북일보]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젓가락 페스티발'이 청주 예술의 전당과 백제유물전시관 등에서 내달 1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이어령 조직위 명예위원장(전 문화부장관)은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젓가락의 종주국을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어느 나라가 더 젓가락 문화를 보존하고 젓가락 정신을 잘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현재 젓가락 문화는 한·중·일 삼국과 베트남·타이·미얀마 등 동아시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지만, 그 기원은 대략 3천년전 중국에서 제사와 관련해서 태동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갑골문의 '鄕' 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갑골문 존재하던 시기, 즉 중국 은나라(BC1600~BC 1046) 때는 젓가락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역사에 젓가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춘추전국시대(BC 770~BC 440년)였다. 당시 제관(祭冠)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을 옮길 때 감히 손으로 함부로 쥘 수 없어 젓가락을 사용했다. 이후 중국의 지배층들이 이 같은 모습을 모방해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면 정인(淨人·깨끗한 사람), 그렇지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