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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2.28 16:33:07
  • 최종수정2024.02.28 16:33:07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대한제국은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韓日倂合)으로 멸망하며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후 일제의 억압적인 무단통치,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선언, 1919년 2월 1일 중국 동북부 길림성의 무오독립선언,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김규식(金奎植)의 독립 시위 주문, 고종의 독살설 등에 영향을 받아 3·1운동이 벌어졌다. 원래 비폭력적인 3·1운동은 기미년인 1919년 3월 3일로 예정되었으나,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이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3월 1일로 앞당겼다.

3·1독립만세운동은 민족종교인 천도교를 비롯해 기독교와 불교가 주도했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하였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교정을 보았으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원래 기미년 3·1일 항일독립선언은 오후 2시에 민족대표 33인과 청년학생들이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모인 가운데에 선언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민족대표인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이 지방에 있어 불참하는 바람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중고등학교 이상의 남학생 약 5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에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鄭在鎔, 1886-1976)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먼저 낭독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 민족 대표 29인이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축배를 들고, 최린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게 하였다. 그러자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 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한편 도쿄에 밀파된 임규(林圭)·안세환(安世煥) 등은 뒤에 일본 정부와 의회에 독립선언서 등을 우송했고, 상하이에 밀파된 김지환(金智煥)은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의 각 대표에게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송신했다.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은 삽시간에 함경남도 북청, 평남 강서군 사천, 평북 정주군 곽산, 경남 창원시 삼진, 충남 천안시 병천, 충북 괴산읍, 대전 인동장터, 경북 대구, 부산 동래, 전북 남원과 군산, 전남 완도군 소안도, 경기도 수원시 제암리, 평남 맹산, 만주 용정 등 전국으로 퍼져나가 주로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일어났다. 재야 민족사학자인 임종국(林鍾國) 유고집인『실록 친일파』(민족문제연구소, 1991)에 따르면, 60일 동안 전국에서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3·1운동은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1919년 3월 당시 전체 인구 1,678만 8,400명 중 6.32%)이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하였으며, 12,000명이 체포되어 고초를 격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3개월간 만세운동 상황은 202만 3,089명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시위 횟수는 1,542회에 달한다. 무려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 피체포자가 46,948명에 이르렀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교였다고 한다.

비폭력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결과 독립은 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무단통치를 문화 통치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필리핀·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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