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소(魚有沼·1434~1489)는 여진족을 성공적으로 정벌, '북벌의 명장'으로 불렸다. 또 어유소는 이시애난을 진압한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면서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세조는 그만큼 어유소를 신임했다. 적개공신 때의 하교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왕은 이르노라. (…) 경이 곧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친히 시석을 무릅썼도다. 정예를 다하여 나아가 치니, 드디어 전도로 하여금 창을 거꾸로 잡게 하여 원흉의 머리를 바치게 하였도다.(…) 영웅의 응양(鷹揚)에 힘입지 않는다면 어찌 신속한 탕평을 이루었겠는가'. (세조실록) 본문 중 '응양'은 매처럼 하늘 높이 난다는 뜻으로, 무용(武勇)을 일컫고 있다. 어유소는 1479년 명나라의 정벌을 도우러 만포진까지 출진했으나 압록강 물이 얼지 않아 도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사자가 속출할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되돌렸다. 그는 이것이 문제가 돼 이듬해 경기도 농장 근처에 '중도부처'(中途付處) 됐다. '중도부처'는 유배에 처한 죄인에게 그 정상을 너그럽게 참작하여,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한 곳을 정하여 지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특혜성 시비를 불거졌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김영정 등이
"대개 들으니,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충성하여 부자·군신 사이에는 다른 도가 없는 것이다. (…) 아! 위태하였다. 다행히 숙부 수양 대군이 있어 기미를 알아 계책을 결단하여 대의를 부르짖었다. 네가 장문(將門)의 후예로 익히 병사(兵事)를 알았다. 인하여 전지 1백 50결·노비 15구·말 1필·백은 25냥·표리 1단을 주노니, 이르거든 영수하라".(단종실록) 단종이 계유정난 2등 공신인 곽연성(郭連城,·?~1464)에게 하교하는 내용로, 본문 중 '노비 15구'는 노비 15명, '표리'는 임금이 신하에게 주는 옷감을 일컫고 있다. 문장이 매우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사륙변려체'라고 한다. 대구(對句)의 구성을 지니면서 수사적(修辭的) 미감(美感)을 많이 표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사장의 일종인 교서나 하교할 때 자주 사용된다. 단종은 이때까지만 해도 삼촌 수양대군의 최종 목표가 자기 자신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곽연성은 계유정난에 참가한 무신 중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계유정란 이전에 이미 무과에 급제, 현직에 있었다. 그는 이런 이력 때문에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 때 군관 자격으로 수행하게 된다. 그후
세조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에는 30여명의 무인이 동원된다. 한명회가 이들을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이중에는 양정(楊汀·?~1466)이라는 인물도 있다. 30여명중 지도자급에 속한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원컨대 모름지기 조용히 대접해 주시고, 만약 사색(辭色)으로 그들에게 진실하고 정성스러움을 보여 주어서 신의를 굳게 하소서"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좋다" 하니, 한명회가 틈을 타서 먼저 양정(楊汀)을 데리고 와서 알현하게 하고, 다음은 유하(柳河)를 데리고 와서 알현하니, 세조가 충심을 기리어 후하게 대우하여 모두 환심을 가졌다'.(단종실록) 그러자 양정 등은 곧바로 세조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양정 등이 사례하기를, "무부(武夫)는 비천한 사람이지만 공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진퇴에 오직 명을 따르고 두 마음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하였다.(단종실록) 양정은 계유정난 2등 공신에 책록, 병조참의에 임명됐다. 이후 양정은 공조판서, 중추부판사 등을 거쳐 중요 외직(지방직)의 하나인 함길도 도절제사에 오른다. 함길도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던 곳이다. 이 때문인지 세조는
'세조가 일찍이 정인지와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시비(是非)를 논란(論難)하다가 세조의 뜻에 거슬러 부여현(扶餘縣)으로 귀양갔었고, 한 달이 넘어 소환(召還)되어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다'.(세조실록) 정인지가 취중에 세조와 종교적인 얘기를 하다, 그의 미움을 받아 유배된 적이 있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이 부분을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배지가 다름아닌 충남 부여다. 당시 정인지의 부친은 부여에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인지의 귀양은 일종의 '특혜성 귀양'이었다. 세조가 정인지를 진심되게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이후의 정인지는 적어도 세조 앞에서 만큼은 말을 조심하게 된다. 세조실록에 이 모습이 포착돼 있다. '화위당에 나아가서 하동군 정인지와 영의정 한명회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임금이 지리설(地理說)을 논하니, 정인지가 아뢰기를, "지리설과 음양설(陰陽說)은 서로 비슷하니, 비슷하고 또한 가까운 이치입니다. 그러나 매우 심오하고 오묘하여서 신은 능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인지는 이런 인간적인 약점을 제외하고 여러 분야에 능통했다. 가히 조선초기 최고의 두뇌로, 어문·역사·천문 ·역법·아악·서예 등 여러
태종 이방원은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사람됨을 금방 알아봤다. 아들 세종대왕에게 정인지를 소개하는 장면이 실록에 실려 있다. '태종이 명하여 (정인지를)앞에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으나, 다만 얼굴을 알지 못하였을 뿐이다" 하고, 머리를 들게 하고서 자세히 본 뒤에 태종이 세종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은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먼저해야 할 것은 없는데, 정인지는 크게 등용할 만하다" 하였다'. 정인지는 뒤를 이은 세종에게 대표로 훈민정음 서문을 써서 바친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세종실록) 82살까지 산 정인지는 7명의 임금을 모셨다. 세조도 포함돼 있다. 계유정난 거사를 앞둔 세조가 정인지 같은 인물을 놓칠리가 없다. '세조가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영정은 전국적으로 3개 존재하고 있다. 우리고장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보물 제 613호), 낭성면 관정리 묵정영당(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108호),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도향토유적 제 6호) 등이다. 3개의 영정은 일종의 母子 관계에 있다. 묵정영당과 평택 고잔리 등 나머지 2개 영정은 구봉영당 것을 모사했다. 따라서 구봉영당 영정이 일종의 '원본'인 셈이다. 신숙주 영정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시대적 정보를 담고 있다. 우선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흉배(胸背)가 처음 보이고 있다. 흉배는 조선시대 왕, 왕세자, 문무백관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表章)을 일컫는다. 이 문양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해졌다. 대군은 기린, 문신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꿩과 비슷한 새)을, 무신 1 ·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표(熊豹)의 표장을 붙이도록 했다. 따라서 3품(당상관) 이상만 가슴(흉)과 등(배)에 표장을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숙주 영정에 등장하는 흉배의 문양은 구름과 기러기, 즉 운안(雲雁)이다. 이로 미뤄 문관 2품 때의 문양임을 알 수 있다. 신숙주가 문관 2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이 집현전 학자로 선발됐다. 세종은 이들을 국가두뇌로 키우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책이 간행되면 이들에게 먼저 지급하며 '학문만을 오로지 일로 삼아 종신토록 계속하라'(專業學術 期以終身)고 말했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집현전 '동기' 중 유난히 친했다. 신숙주가 1417년, 성삼문이 1418년생으로, 나이가 한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계유정난 관련, 각각 2등과 3등 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에 책록됐다고 해서 정난에 직접 가담한 것 같지는 않다. 사료에는 이들의 활약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모든 대신들은 내칠 수 없는 만큼 무언의 지지자도 공신에 올린 것으로 여겨진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여기까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 이후부터는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사람, 성삼문은 단종의 사람이 돼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길에 신숙주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한다. 그것은 수양대군이 신숙주에게 명나라 동행을 강력히 청한 결과였다. 사은사는 부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신을, 서장관은 일행에 포함된 외교 실무자를 일컫는다. 이 부분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마침
함길도 토호 이시애(李施愛·?~1467)가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1467년 난을 일으켰다.이를 평정한 인물이 남이(南怡·1441∼1468)다. 그는 대장 자격으로 토벌군을 진두지휘,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 결과,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됐다. 남이는 귀로에 백두산에 올라 그 유명한 북정가(北征歌)을 짓는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白頭山石磨刀盡) /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豆滿江波飮馬無) /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를 평정 못한다면( 男兒二十未平國) / 훗날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요(後世誰稱大丈夫)'. 남이의 할머니는 태종의 4째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1404∼1424)이다. 따라서 세조와 남이는 고종사촌-외사촌 간이 된다. 남이는 이런 종실적 배경에 무인으로서의 실력까지 겸비하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 서른도 안된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남이를 무척 총애하던 세조가 1468년 사망했다. 한명회, 신숙주, 유자광 등 훈구파들의 견제와 공격이 시작됐다. 신흥무인세력의 선두주자였던 남이는 결국 지금의 국방장관(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청와대 경호실 고위직에 해당하는 '겸사복장(兼司복장)으로 밀려났다. 어느날 궁궐 당직을 서는데 혜성이
계유정난을 논할 때 한 가운데는 수양대군, 그 우측에는 한명회, 좌측에는 권람(權擥·1416~1465)이 위치한다. 그만큼 세 사람의 의기투합 정도는 강했고, 이는 망설임없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명회와 권람은 깊은 우정으로도 유명하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일찍이 한명회와 망형교(忘形交)를 하여,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관중과 포숙이라 자처하고, 가인의 산업을 일삼지 아니하며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남아는 창(矛)을 드날리고 말을 달려서 변경 사이에서 공을 세우고 마땅히 만 권(卷)의 서적을 읽어서 불후의 이름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세조실록) 이때의 '망형교'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친밀한 사이, 소하와 조참은 유방의 일급 참모, 관중과 포속은 관포지교라(管鮑之交)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의 깊은 우정을 일컫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당시 사관(史官)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는 편이다. 먼저 한명회다. '성격이 번잡(煩雜)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이 일시에 떨쳤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한명회는 35년간 권력의 정점에 머무른다. 이때 항간에 떠돌던 말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그는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자산군(者山君·1457∼1494)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조비 정희대비는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어리자, 대신과 의논해 자산군의 왕위 계승을 결정한다. 바로 성종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월산군(月山君·자산군의 형)의 몸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희대비가 의논 상대로 삼은 대신이 한명회다. 그런데 한명회는 이미 자신의 딸을 자산군에게 시집보내 놓은 상태였다. 한명회의 막후 영향력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종이 즉위하자(1469) 한명회 딸은 왕비에 책봉됐다. 공혜왕후(恭惠王后·1456∼1474)이다. 앞서 한명회는 자신의 또 다른 딸(후에 장순왕후)을 예종에게 시집보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인성대군을 낳은 후 요절했다. 한명회는 두 임금의 장인이 됐기 때문에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때의 상당은 청주를 일컫는다. 일세를 풍미한 한명회가 73살(1487)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러자 중종은 관원들이 도문 밖에 나란히 서서 운구를 전송하게 한다. '한명회의 장소(葬所)는
단종 왕위찬탈의 서막인 계유정난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중도에 비밀이 새나가면서 수양대군이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한명회와 무인 홍윤성이 다음과 같은 말로, 거사를 행동으로 옮길 것을 재촉한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길 옆에서 집을 지으면 삼 년이 되어도 집을 못 짓는 법이니, 대군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시오"라 하고, 홍윤성은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데는 주저하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 단종실록은 김종서(金宗瑞·1383~1453)의 마지막 장면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집에 이르러 그에게 편지를 전달했고, 김종서가 이를 달에 비춰 읽어보려는 순간 종 임어을운이 철퇴를 내리쳤다. 그러자 김종서 아들 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렸고, 이번에는 무인 양정이 칼을 뽑았다. 그러나 김종서는 곧 바로 죽지는 않았다. '김종서는 숨이 거의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서 원구를 시켜 성문지기를 큰 소리로 불러 정부에 가서, "정승이 밤새 남에게 맞아서 죽게 되었으니 빨리 임금께 아뢰어 약을 가지고 와서, 구제하도록 고하라"고 하였으나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 김종서가 김승규의 방안에 숨었으므로
계유정난(1453)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수양대군(1417~1468),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洪達孫) 등 4명이다. 수양대군(세조)은 신권이 왕권보다 커지는 것에 대해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군' 자격으로 매월 한번씩 단종을 만날 수 있기를 요청하나 김종서, 황보인 등으로 구성된 의정부로부터 거부를 당한다. '세조가 아뢰기를, "여러 종친을 모실 길이 없으니 매월에 한 번씩 만나 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여, (…)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주상(단종)께서는 춘추(春秋)가 아직 어리시고, 상제(喪制)를 아직 마치지 못하였으며, 또 접견할 곳이 없으니, 아직 전례에 의하여 영해군(寧海君) 이상과 영자(寧字) 이상의 대군(大君)만 인견(引見)하고, 그 나머지 종친은 뒤에 사현(賜見)함이 적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단종실록) 수양대군은 병서(兵書)를 함께 편찬한 것이 계기가 돼 권람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수시로 권람에게 털어놨다. 당시 권람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미관말직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둘은 당시 조정에 대해 공동의 불만을 갖고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