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의 할아버지 상질에게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 상경이 형이 되고, 상덕이 동생이 된다. 한명회의 부모는 물론 할아버지 상질도 일찍 돌아갔다. 따라서 한명회는 작은할아버지 상덕에 의해 길러졌다. 한상덕은 태종이 눈치를 볼 만큼 매우 깐깐한 관료였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한명회의 큰할아버지인 상경은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청주한씨 문중으로부터는 한명회 이상의 추앙을 받고 있다. 명나라로부터 국호 '조선'을 갖고 돌아온 인물은 한상질이다. 그의 친형인 상경도 여말선초에 큰 몫을 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아 이를 태조 이성계에게 바친 인물이 바로 한상경(韓尙敬·1360~1423)이다. 한상경은 실물경제에도 밝은 면이 있었다. 저화(楮貨)의 지질을 통일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저화는조선초 지폐로, 태종이 즉위한 1401년 사섬서(司贍署)라는 관청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역별로 지질이 달라 문제가 됐다. '호조판서 한상경이 저화를 만드는 법을 아뢰었다. 계문(啓文)은 이러하였다. "저화의 종이가 각도에서 오므로 두텁고 얇고 정하고 추한 것이 같지 않은데 시정(市井) 사람들이 다만 두터운 종이를 쓰는 것을 좋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칠삭동이로 태어났고 어려서 부모와 조부(한상질)를 차례로 잃었다. '한기(韓起)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한명회를 낳았는데, 배위(腹上)에 검은 점이 있어, 그 모양이 태성(台星)과 두성(斗星) 같았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가난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과거에도 여러 번 낙방, 37살이 되서야 음보(蔭補)로 경덕궁직(敬德宮直)에 나갈 수 있었다. 음보는 시쳇말로 뒷구멍으로 벼슬아치가 되는 것을, 경덕궁직은 궁지기의 일종을 말한다. 따라서 당시 한명회 가문이 한미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부모와 할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한명회는 작은 할아버지 한상덕(韓尙德·?~?)에 의해 길러진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는 주로 태종대에 활동했으나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실록 행간을 보면 그가 매우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완력으로 권력을 잡은 태종도 그 앞에서 만큼은 여러번 쩔쩔맨다. '한상덕이, "사방에 눈을 밝히고 사방에 귀를 밝히시어,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물리치소서. 평안할 때에 위태로운 것을 잊지 마시고, 다스려질 때
엽전은 나뭇잎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낙엽 葉' 자를 쓴 엽전이라고 불렀다. 이는 엽전을 만드는 주형틀이 나뭇가지처럼 생긴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엽전을 줄로 꿰어가지고 다녔다. 엽전 가운데 사각형 구멍이 나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관할 때의 '꿸貫' 자도 뿌리 즉 같은 핏줄을 줄로 꿰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본관은 성씨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姓 氏가 같은 뜻의 중복인가, 아닌가는 궁금한 대목이다. 성씨에는 역사의 지문이 새겨져 있다. 역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동북아 가족제도는 난혼(집단혼), 모계, 부계사회 순으로 발달했다. 난혼일 때는 혈육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모계사회로 전환되면서 어머니 기준으로 성을 따르는 관습이 생겨났다. 姓자는 '계집女'와 ·날 生'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다. 의역하면 '어머니가 낳았다' 정도가 된다. 때문에 중국의 초기 성에는 '계집女' 변이 많이 들어가 있다. 부계사회로 전환되면서 아버지 성을 따르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여성에게 정절이 강요됐고 성의 불평등이 생겨났다. 갑골문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씨 할 때의 '氏자'는 남성의 성기를 상형한다.
여말선초를 풍운아처럼 산 인물 중에 조박(趙璞·1356~1408)이 있다. 그는 이방원(후에 태종)의 손윗동서였다. 이는 그가 '이성계의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루는 이성계가 사냥 중에 말이 진창에 넘어지면서 몸을 크게 다쳤다. 정몽주가 이 기회를 노려 이성계 사람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조박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정몽주는 생각보다 큰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조박을 아예 살해하려 했다. '주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조박이 동서(同壻)간이므로 가장 친하고 오랜 사이었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태조에게 따르고 복종하였다. 정몽주가 조박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내보냈다가 조금 뒤에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장차 죽이려고 하였는데, 조박이 망명하여 면하였다'.- 잠저는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던 민가를 말한다. 조박은 청주로 유배됐고, 정황상 1년 남짓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됐다. 조박은 이성계 사람의 일원으로서 개국공신 1등이 돼 전 170결과 노비 20구를 받았다. 1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기도 했다. 조박은 여기까지만 호가호위했다. 이후부터는 질곡의 삶을 살게 된다
고려후기 문신으로 이정(李挺·1297∼1361)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특히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내불당 짓는 일을 감독했고, 친제어필 '탄상하교문(嘆賞下敎文)'을 하사받기도 했다. 공민왕은 송설체(일명 조맹부체)를 잘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네명의 아들을 두었다. 1남은 유신(由信), 2남은 거인(居仁·?~1402), 3남은 거의(居義), 4남은 거이(居易·1348~1412)다. 이들 4명의 형제는 여말선초라는 격변기 만큼이나 각기 다른 인생항로를 걷는다. 1남 유신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고, 임종을 앞두고 두 아들 덕윤, 부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문중야사는 쓰고 있다. "나라는 망친 것은 그 책임이 누대에 벼슬한 집에 있다. 내가 충성심이 부족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 죄를 면할 길이 없다". 2남 거인은 공양왕 때 김저 옥사사건에 연루돼 유배된다. 이 사건은 전회에 소개한 바와 같이 최영의 생질인 김저(金佇·?~1389)가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돼 옥사한 사건을 말한다. 거인은 처음에는 지조를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배에서 풀려난 뒤로는 이성계에게 적극 협조한다. 3남 거의는 알려진 것이 많지
진천인물 이거이(李居易·1348~1412)는 두 아들을 부마(駙馬), 즉 임금의 사위로 만들었다. 맏아들 이저(李佇)는 태조의 맏딸 경신공주에게, 둘째 아들 이백강(李伯剛)은 태종의 맏딸 정순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조선 초기의 강력한 외척이 우리고장 진천에서 출현한 셈이다. 인지상정상 이거이는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이 우쭐함이 이거이 3부자를 곤경에 빠트린다. 이거이가 사병해체 조치를 바로 이행하지 않자 대신들이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러 절제사가 명령을 듣고 병권(兵權)을 즉시 삼군부에 바쳤는데, 오직 거이와 저(佇)만이 병권을 그대로 잡고서 즉시 송납(送納)치 아니하였다. 이에 판의흥삼군부사 이무(李茂)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거이 부자가 병권을 내놓기를 아깝게 여기오니,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감히 내가 임금의 사돈인데'라는 마음을 갖고 있던 이거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실록이 이 부분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의정부에서 상소하였다. "이거이 부자가 원훈대신으로 종실에 연인하여 주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나, 두 마음을 가졌으니, 죄는 참으로 큽니다. 원하건대, 삼성(三省·의정부)의 청한 바에 의거하여
'삽혈동맹'이라는 표현이 있다. 노루 등 산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나눠 마시며 변치말자고 굳게 맹약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청동기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으로, 맹세할 때의 '盟'(맹) 자에 '血'(피) 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야사에 의하면 이방원(후에 태종)과 이무(李茂·?~1409)도 삽혈동맹을 맺은 관계다. 태종이 즉위한 그해 두살박이 왕자를 잃었다. 이때 옆에서 태종을 위로한 인물이 하륜과 이무였다. 마침 그날은 상왕 정종의 생일이기도 했다. 본문 중 '하상'은 여덟 살에서 열세 살까지 사이에 요절하는 것을 말한다. '종척 대신을 상왕전에 보내어 헌수(獻壽)하였으니, 상왕의 탄일(誕日)인 때문이었다. 마침 이날에 왕자(王子)가 죽었는데, 나이 두 살이었다. 조회를 2일 동안 정지하고, 백관이 대궐에 나아가 조상하고 위로하였다. 영삼사사 하륜·판삼군부사 이무 등이 성례(盛禮)를 써서 장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하상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무얼 성례를 쓰랴"'- 이무는 1498년(태조 7)에 이방원의 오른팔이 되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오른다. 또 1400년(정종 2)에는 판삼군부사로서 다시 이방원을 도
이거이(李居易)의 장남이 이저(李佇·1363∼1414)다. 이저는 태조의 맏딸 경신공주의 남편으로, 1, 2차 왕자의 난 후 1등 공신에 올랐다. 이저는 그 이름 때문에 혼선을 많이 야기하는 인물이다. 실록에는 이저 외에 이백경(李伯卿), 이애(李초두 밑에 愛) 등의 이름도 보인다. 모두 동일 인물이다. 당시 사관도 혼란을 느꼈는지 그 이유를 다소 길게 쓰고 있다. '이애는 옛이름이 이백경이 있었는데, 경(卿)자가 상왕의 휘와 소리가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이저로 고쳤으나, 저(佇)자가 또 세자의 휘(諱)와 소리가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이애로 고쳤다'.- 이저는 아버지 거이 때문에 덩달이 피해를 본 감이 없지 않다. 실록은 이 부분을 '1404년 아버지 거이의 죄로 그도 함주(咸州)로 유배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의 '죄'는 전회에도 밝힌 바와 같이 사병 해체에 반기를 든 것을 말한다. 정조실록은 이 부분을 '이거이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대간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권근(權近·1352~1409)이 가장 강하게 추궁했다. '영계림부사 이거이와 영완산부사 이저 등이 총
태조 7년은 1398년에 해당한다. 그해 음력 여름 태조 이성계는 심하게 앓았다. 정황상 급성 편도염으로 추정된다. '임금이 시녀(侍女)로 하여금 부축해 일어나서 압서(押署)하기를 마치자, 돌아와 누웠는데, 병이 심하여 토하고자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며 말하였다.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본문 중 '압서'는 도장찍는 일, 즉 지금으로 치면 지명날인에 해당한다. 이방원(1367~1422·후에 태종)이 이때를 노려 정변을 일으켰다. 자신을 반대한 정도전 일파와 배다른 동생인 방석(의안대군·1382~1398), 방번(무안대군·1381~1398) 제거에 나섰다. 먼저 방석이 유배 도중 제거됐다. '방석이 울면서 하직하니, 현빈(賢嬪)이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하므로, 방석이 옷을 떨치고서 나왔다. 처음에 방석을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기로 의논했는데, 방석이 궁성의 서문을 나가니, 이거이(李居易)·이백경·조박 등이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도중(道中)에서 죽이게 하였다'.- 내용중 현빈은 심효생의 딸 부유심씨를 가리킨다. 안치는 유배와 같은 말이다. 또 다른 이복동생인 방번도 궁궐에서 쫓겨나 성문을 나선 후 중도에 조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우리나라 사서(史書)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때문에 그는 "찬탈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해야 하고 또 시비를 바르게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배경하에 쓰여진 사서가 동사강목(東史綱目)이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정몽주가 살해되는 장면을 유리 안을 들여다 보듯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동개'는 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지고 다니는 물건을, '녹사'는 7∼8품의 낮은 벼슬을 의미한다. '해주목사 조무(趙茂), 중랑장 고여(高呂), 판사 이부(李敷) 등과 길목에 잠복해 있었다. 정몽주가 돌아오는데 동개를 멘 무부(武夫)가 스치며 지나가자 정몽주가 얼굴빛을 변하며 수행하는 녹사(錄事)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처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재삼 꾸짖으며 못 따라오게 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수행하는 몸인데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선죽교에 이르자 조영규가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해 달아나자 조영규가 따라와 말머리를 쳐서 말이 꺼꾸러지고 정몽주가 땅에 떨어지니 고여가 쳐서 죽이므로 녹사도 끌어안고 같이 죽었다. 정몽주 나이 56세이었다'. 안정
이성계가 권력을 잡는 과정은 순탄해 보이나 꼭 그렇지는 않다. 한 차례 위기를 맞게 된다. 권좌에서 밀려나 황려(黃驪)로 유배된 고려 우왕에게 김저(金佇·?~1389)와 정득후(鄭得厚·?~1389)라는 인물이 몰래 찾아간다. 황려는 지금의 경기도 여주를 일컫는다. 김저는 최영의 생질이고, 정득후 역시 최영의 먼 인척이 된다. '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답답하게 이곳에 있으면서 손을 묶고 앉아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역사(力士) 한 사람만 얻어 이시중(李侍中)만 해친다면 내 뜻은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예의 판서 곽충보(郭忠輔)를 좋아하였으니 네가 가서 보고 이 일을 도모하라" 하고는 칼 한 자루를 충보에게 전해 주게 하면서, "일이 이루어지면 비(妃)의 동생을 처로 삼고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번 팔관일(八關日)에 일을 일으키라".(연려실기술) 본문 중 '우'는 우왕, '이시중'은 이성계를 일컫는다. 두 사람은 개경으로 돌아와 밀명대로 무신 곽충보를 포섭하여 팔관회(八關會)에 참석하는 이성계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포섭당한 것처럼 보였던 곽충보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다. 곽충보는 두 사람 앞에서는 거짓 승낙을
이색(李穡·1328~1396)은 고려가 망했음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켜 삼은(三隱)의 한 명으로 불린다. 이색과 이성계는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성계가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여진족을 정벌하러 나가자 이색이 시를 지어 전송한다. '송헌(松軒)의 담기가 무신을 뒤덮으니 / 만리장성이 한몸에 맡겨졌네 / 분주하면서 몇 번이나 다사한 시기를 지냈던고 /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날을 즐길 것이네(…)'(태조실록) 본문 중의 '송헌'은 이성계를 지칭한다. 위화도 회군후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조민수와 이색은 우왕을 옹립, 즉위하게 했다. 이는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의도와 달리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색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부터 유배와 복권이 반복된다. 1389년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에 유배, 이듬해 함창으로 이배됐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금주(衿州)로 추방됐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됐다. 이성계가 이색을 완전히 외면하거나 버린 것은 아니었다. 무신 이성계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 즉 학구적인 요소를 이색에게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