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진천 문백에 영면하고 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중기 당쟁의 한 복판에 서 있던 인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진력을 다 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이 기간 동안 충청과 호남의 양호체찰사가 되어 우리고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체찰사는 왕명에 의해 특정 지역에 파견되는 임시 고위관료를 말한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 사건에 대한 선조의 노여움으로 압록강 아래인 평안도 강계에 유배됐다. 이때 그는 유배생활의 고달픔을 시로 남겼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고 /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 / 마음을 아는 넌 오직 백발이라 / 나를 따라 또 한 해를 지나는구나.'- 인용문 중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 어렵네'는 유배된 곳의 집담장 둘레는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배의 한 종류인 위리안치(圍籬安置)는 빽빽히 들어산 탱자나무가 담장을 이룬 것을 말한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가시가 나 있고, 또 그물처럼 촘촘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달여만에 유배지 강계에서 사
전회에 송강 정철의 아들 종명이 아버지를 변호하는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글은 장문이고 또 정종명 혼자가 아닌, 동생 홍명(弘溟)과 같이 올린 상소문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변호·복권시키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사실'이라는 것도 있다. 더욱이 상소하는 대상이 일국의 지존인 국왕이다. '신의 아비가 명종·선조 두 조정을 섬기게 되어서는 용호가 풍운을 만나고 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이 한때 견줄 데 없었으나 다만 강직한 충성 때문에 남과 화합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철은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놓고 무진 무진 먹세그려'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지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으나 불같은 성격을 함께 지녔다. 두 아들은 '남과 화합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소문은 아버지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맡고 싶어서 맡은 것이 아닌, 선조의 강권 때문에 맡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위관(委官)은 죄인을 추국할 때 대신 중에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관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 11월에 공을 우의정에
그날 서인 영수 정철과 동인 연수 이산해는 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이산해는 그날 병을 핑계로 어전에 나가지 않았다. 정철은 이같은 음모도 모르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건의했다가 혼자 선조의 미움을 사 강계로 유배됐다.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세자를 논하는 것) 사건으로, 이로 인해 서인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했다. 기축옥사의 최고 국문관이었던 정철은 실각하자마자 기축옥사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은 동인계열 사람 수백명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동인중 정철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북인, 온건론을 편 쪽은 남인으로 갈렸다. 정철의 아들중에 정종명(鄭宗溟·1565∼1626)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과 실력을 갖췄으나 군수직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 아버지 정철 때문이었다. 이조가 정종명을 안성군수로 추전했으나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이를 거부했다. "정종명은 간신의 아들로 여러 해 동안 폐기한 데에는 의도한 바가 있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수령에 의망된 적이 있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괴이하여 추구하고
조선시대 죄인은 옥(獄)에 갖혔어도 형량에 따라 형구를 차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흔한 것이 '가'(枷)라고 불리는 나무칼이었다. 이 나무칼은 죄의 경중에 따라 무게게 달랐다. 장형을 받은 죄인은 15근, 사형이 결정된 중죄인은 25근의 나무칼을 차야 했다. 1근이 6백그램인 것을 감안하면 25근은 15kg의 무게다.사극을 보면 어떤 죄인은 발에도 무엇인가를 차고 있다. 착고(着錮·또는 차꼬)라는 형구다. 이 착고는 두 개의 토막나무에 가로구멍을 파고 그 안에 죄인의 양쪽 발목을 넣고 자물쇠로 채운 모습이다. 을사사화 때 우리고장 충주인물 이홍윤이 의금부로부터 국문을 받는 중에도 이 착고를 찼다는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충주출신 사림파 사대부인 이약빙에게는 이홍남, 홍윤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복간인 둘은 재산문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때 형 홍남이 귀양지 영월에서 빨리 풀려날 목적으로 동생 홍윤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한다. 그 결과, 한달 사이에 충주백성 28명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8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사관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주륙(誅戮)당하거나 귀양간 자가 무려 40∼50인에 달하여 충주(忠州) 전체가 온통
조선시대 형벌을 얘기할 때 태형과 장형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둘은 죄인을 체벌하는 것은 같으나 강도에 있어 큰 차이가 났다. 태형의 '태'는 한자 '매질할 태'(笞) 자로 '대죽변'이 붙어 있다. 바로 둔부를 노출시킨 후 회초리로 매질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장형할 '장'은 '지팡이 장'(杖)자로 '나무목' 변이 붙어 있다. 즉 장형은 커다란 몽둥이로 체벌을 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태형이나 장형을 가할 때는 남녀의 모습이 달랐다. 방금 둔부를 노출시킨 후 매질한다고 밝혔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남자는 둔부를 완전히 노출시켰으나 여자 죄인은 홑겹의 옷을 입게 했다. 그런데 홑겹의 옷을 입게 하자 여자죄수 사이에서는 몰래 여러 겹의 옷을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연산군일기의 기생 '내한매'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잔치를 베풀 때에, 잘 아는 음악을 물었는데도 모른다고 대답하므로, 형조에 내려 처벌하게 하였는데, 곤장을 맞을 때에 치마 속에 모피를 몰래 감춰 둔 것이 참의에게 발각되어…'- 장형의 종류 중에는 '난장'(亂杖)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여러 사람이 빙 둘러 돌아가면서 죄인의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조선시대 옥에 갖힌 죄수들은 야간에는 통 2개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다. 나졸들이 넣어준 통 중 큰 것은 대변용, 작은 것은 소변용이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선시대 옥의 이같은 환경을 크게 비판했다. 다산은 조선옥의 열악한 환경을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섯 가지 고통이라는 뜻으로 △형틀의 고통 △토색질(갈취)을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갖혀 있는 고통 등을 말한다. 다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옥을 '이승의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옥하면 참수형을 집행하던 망나니를 빼놓을 수 없다. 나라에서는 백정을 망나니로 삼으려 했지만 잘 안 됐다. 따라서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대신, 이들을 망나니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망나니는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이런 망나니에게도 뇌물이 건네지는 경우가 있었다. 사극을 보면 죄인을 꿇어앉힌 후 망나니가 목을 베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김윤보라는 인물이 그린 '형정도첩'이라는 그림을 보면 죄인을 땅을 보고 눕게 한 후 망나니가 목 위에서 칼을 내리쳤다. 이때
24일 아침 8시. 아직은 11월이지만 40여명의 54차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회원들은 겨울 등산복을 꺼내 입고 모였다. 올해 10번째로 찾아나선 명품길은 영호남을 잇는 소통의 800리 '지리산 둘레길'. 2008년 개발을 시작해 올해 5월 총 274km 환형의 전체 구간을 완전 개통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3구간 중 전라북도 남원 매동마을에서 경상남도 함양 금계마을까지 11km 가량이다. 원래는 인월면에서 시작해야하지만 8시간을 모두 걸을 순 없어 5시간 정도의 코스를 택했다. 10시 반쯤 매동마을에 도착하자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쪽빛 하늘아래 그림같은 마을이 우릴 반겼다. 기념촬영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상황 방면을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산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인이 없다'고 했던가. 둘레길에서 만난 둘레꾼들은 유독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숲길과 임도, 차도를 번갈아 걷다보니 등구재가 보인다. 거북등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삼봉산과 백운산 사이에 움푹 들어가있어 말의 안장같다. 등구재에 올라가 식사를 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일행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땀을 닦고 거친 숨을 쉬며 식당으로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가 웃는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을 감옥(監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감옥은 일본식 표현으로, 갑오경장 무렵 국내로 들어오면서 우리말 '옥'을 물리치고 대중성을 획득했다. 전옥서(典獄署)라는 관청이 이 조선시대 옥을 총괄했다. 그러나 전옥서라는 명칭은 고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개국 직후부터 벌써 그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고, 사리(司吏) 2명이다.'- 조선시대 옥에 대한 정보는 문헌 외에 의외로 고지도에 다수 남아 있다. 구한말이 되자 서구열강 세력이 밀물 듯이 몰려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전국 군현에 지도를 그려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1872년 군현지도이다. 흔히 말하는 수령은 군수와 현령의 준말로, 달리 사또 또는 원님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수령은 행정, 군사 외에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국의 모든 군현 주변에는 옥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1872년 군현지도에는 청주와 충주목 그리고 영동·청산·청풍현 등 5개 목현에만 옥이 그려져 있다. 왜 이같이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1598년(선조 31) 이순신 장군이 우리고장 진천출신 이영남 등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는 그날의 전투가 생각보다 격렬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인물이 이시언(李時言·?∼1624)이다. 현재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고건축으로 여수 진남관과 충무공 사당인 충민사 등이 남아 있다. 바로 이시언이 세운 건물로 진남관은 국보 제 324호, 충민사는 사적 제 3891호로 지정돼 있다. 그는 또 삼도수군의 사령부를 가배량(加背梁·현 거제도)에서 통영으로 이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영 시민들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것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시의 이름을 '충무'에서 '통영'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이시언이 수군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해안으로 가기 전에 우리고장 충청도 병사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병사'는 지금으로 치면 향토사단장 쯤이 된다.
청주-조치원 사이에 영업용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4년 4월이었다. 그러나 첫 영업자는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 織居加一이었다. 그는 경무부 허가를 받아 매일 2회씩 청주와 조치원 구간에 영업용 승용차를 운행했다. 이후 이 일본인은 재미를 봤는지 '조선자동차운전회사'라는 여객운수회사를 차려 청주를 중심으로 괴산. 미원,진천 등에도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영업용 자동차를 배차했다. 청주-충주간은 처음에는 여객의 왕래가 적어서 승객의 수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운행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승객이 점차 늘면서 짝수일에 1회씩 정기 운행을 개시했다. '청주 연혁지'(1923년 출간)를 쓴 오꾸마쇼지라는 일본인은 책에서 청주-조치원 신작로와 함께 주변도 설명했다. 그 내용이 다소 이채롭다. '고문경찰시대에 조치원 도로가 개수되어 겨우 도로다운 형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거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점에는 하나의 당우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에 덕망이 높은 인격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우의 비석은 그 사람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당우와 당우의 비석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수의동에 위치한 송상현 사당과 신도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전회에 경부선 역이 한적한 마을인 조치원에 들어서면서 조치원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조치원은 청주와 사이에 신작로 개설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신작로(新作路)는 말 그대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새롭게 낸 길을 이르는 말이다. 소설가 박태순은 '무너지는 산'에서 신작로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냇물은 이제 그 양편에 축대를 쌓아 하수천이 되었고 소달구지가 지나다녔을 오솔길은 자갈로 다져진 신작로가 되어 버스가 경적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신작로가 바탕이 된 지금의 청주-조치원 국도는 비교적 반듯한 편이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조치원과 청주를 잇는 신작로 노선으로 2개 안을 검토했다. 하나는 지금의 노선이고, 또 하나는 미호천 둑을 따라 보다 북쪽으로 청주를 연결하는 안이었다. 일제는 검토 끝에 지금의 노선을 택하고 1910년 10월 신작로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6월에 완공했다. 신작로가 들어서기 전의 구한말 우리나라 도로 사정은 불문가지였다. 이방인의 눈에도 조선의 길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생긴 길이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가 1890년대 한국을 찾아 이런 기행문을 남겼다. '한국의 도로는 인공적
보은 회인은 지금은 면(面) 단위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 때는 현(縣)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그 행정적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대전시 회덕에 짧은 기간 예속된 적이 있다. 회덕, 회인할 때의 '회'는 한자 '품을 懷'(회) 자다. 두 지역의 지명을 직역하면 회덕은 '덕을 품는다', 회인은 '인을 품는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른바 유교식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두 지역이 한때 친족 관계였던 것을 의미한다. 실록 지리지에 그 내용이 들어있다. "고려가 회인으로 고치어, 현종 9년에 청주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회덕 감무로써 회인을 겸임하였다."- 인용문 중 '회덕 감무로써 겸임했다'는 뜻은 회인이 회덕 현감의 행정적 지휘를 받은 것을 뜻한다. 회인은 이같은 부침을 무릅쓰고 부군 통폐합 조치가 있던 지난 1914년까지 현의 지위를 유지했다. 회인에는 호점산성(虎岾山城)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성이 있다. 호점을 글자 그대로 풀면 '호랑이 고개'라는 뜻이 된다. 구한말까지 호환(虎患)이 존재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여름철에는 방입구에 그물을 치고 잘 정도였다. 계곡이 깊고 산이 높은 회인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는 아직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