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불비상에 등장하는 아미타불을 언급한 바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파하는 부처를 말한다. 사찰 전각에 극락전, 극락보전, 무량수전, 아미타전 등의 이름이 붙어 있으면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불가에서는 선업(善業)을 쌓으면 그 선과(善果)의 결과로 연꽃을 통하여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의 극락세계는 삼악도(三惡道)의 불행과 네것과 내것이 없고 그리고 수명이 '백천억 나유타의 겁으로도 셀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악도는 살아서 지은 죄과로 죽은 뒤에 간다는 지옥도(地獄道)와 축생도(畜生道) 그리고 아귀도(餓鬼道)를, 1나유타는 1천억의 시간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이 전시중인 8개의 불비상은 백제가 망한 후 지금의 세종특별시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점이 연기파 불비상의 최고 주목거리가 되고 있다.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곳의 하나가 '주류성'(周留城)이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운주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있다. 실제 연기 사람들은 운주산 정상에 '백제의 얼 상징탑'을 세우고 매년 백제인의 혼령을 위로하는 고산제를 지내
국립청주박물관이 '돌에 염원을 새기다'를 주제로 한 '백제 불비상' 특별전을 갖고 있다. 이름이 다소 독특한 불비상은 한자로는 '佛碑像'이라고 쓴다. 말 그대로 비석 모양의 석부재 전후좌우 4개 면에 부처상을 조각했다는 뜻이다. 불비상은 조각이 미려할 뿐만 아니라 명문, 즉 글자가 새겨져 사료적 가치가 더욱 높다. 그런 불비상은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불비상은 언제, 어떤 사연이 계기로 발견됐을까. 지난 2011년에 작고한 황수영 박사는 생전에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의 최고 권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지난 1960년 자신이 가르치던 동국대학 제자들에게 "아무거나 좋으니까 탁본을 떠오라"는 학기말 숙제를 낸다. 그러자 당시 충남 연기가 고향이던 이재옥이라는 학생이 전의면 비암사의 불교조각 작품을 탁본을 제출했다. 사료적 가치가 엄청난 것을 직감한 황 교수는 곧바로 비암사로 내려와 불비상 조각품 2점을 더 발견하게 된다. 국보 제 106호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이런 사연 끝에 발견됐다. 현재 국립청주박물관 특별전에는 앞서 언급한 3점 외에 연기지역 또 다른 사찰인 연화사와 서광암에서 발견된 4개의 불비상도
조카 단종(본명 李弘暐)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는 얼마 안가 후환을 없애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작업에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宋玹壽·?~1457)도 포함돼 있었다. 단종은 14살 때 한 살 연상인 송현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녀가 바로 정순(定順)왕후 송씨다. 수양대군과 송현수는 일찍부터 친한 사이였다. 이 때문인지 송현수는 바로 처형되지는 않는다. 일부 대신들이 "송현수를 빨리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하나 세조는 처음에는 이를 물리친다. '"권완과 송현수는 모두 율(律)이 능지 처사하고 재산을 적몰하는 데 해당하며, 연좌된 사람들도 모두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니, 명하여 권완은 아뢴 바에 의거하고, 송현수는 다시 추국하게 하였다.'- 추국 결과, 송현수는 장(杖) 일백에 영원히 원방의 관노(官奴)에 속하게 되고, 처자 역시 관노비에 충당되게 됐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정창손(鄭昌孫) 등의 주장으로 교사(絞死)되고 말았다. 이때 송현수만 희생당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에 권완(權完 ·?~1457)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송현수와 가깝다는 이유로 먼저 능지처참당을 당하고 전재산이 몰수됐다. 또 연좌율이 적용되어 전가족이 화
조선 전기를 산 인물로 김한로(金漢老·1367~?)가 있다. 그는 태종과 과거합격 동기생인 동방(同榜)이었다. 이것을 믿었기 때문인지 그의 행동은 항상 좌충우돌이었다. 그는 태상왕(이성계)이 중국사신을 위해 주최한 궁궐 잔치에 지각할 것처럼 보이자 역리(驛吏)의 말을 빼앗아 탓다가 파직을 당했다. '판봉상시사 김한로가 파직되었다. 한로는 이때에 의순고 별좌로 있었는데, 태상왕이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사람을 시켜 길에서 역리의 말을 빼앗아 잡으려고 하니…'- 조선 최고의 난봉꾼 중의 한 명은 아무래도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일 것이다. 그의 여러 기행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이른바 기첩 '어리'의 사건으로, 그는 남자가 있던 기첩 어리를 궁궐로 몰래 데려오고 급기야 아기까지 갖게 했다. 이후 성밖에서 아기를 낳게 하고 다시 궁궐로 몰래 들여와 살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에게 발각돼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됐다. 이 부분은 좀더 살펴볼 대목이 있다. 일국의 세자는 신분이 노출 때문에 기생이라는 천민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이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때 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도움을
전회에 김태희 등 내국인이 주축이 된 '청주 청년회'가 1920년 6월 19일 '앵좌(櫻座)극장'에서 출범식을 가졌다고 밝힌 바 있다. 1920년대면 말 그대로 '문명의 열차'가 막 고동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다. 그런 문명의 여명기에 청주에 여가문화의 일종인 극장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현상이다. 그러나 '앵좌극장'이 청주의 제 1호는 아니다.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가 1923년에 발간한 '청주연혁지'를 보면 앵좌극장 직전에 '덕영좌'(德永座)라는 극장이 존재했다. 청주연혁지는 신축 동기부터 밝히고 있다. '청주에 일본인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는데 견디기 어려웠었다. 이곳에는 하등이 오락설비가 없는 것은 배속의 기생충도 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德永座라는 극장이 생기게 되어 오래된 일본취미의 흥행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극장 덕영좌는 그 시설 정도가 형편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오꾸마 쇼지는 '설비는 처음부터 강능하지도 않았었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덕영좌는 덕영증병위(德永增兵衛) 개인이 경영하는 이름뿐인 극장이었지만 극장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본 관계는 시대의 추이에
금년은 개화기 때 저온현상이 찾아오면서 청주 무심천 벚꽃이 비교적 오랫동안 만개한 상태를 유지했다. 본보는 4월 8일자 기사에서 무심천 벚꽃의 근현대사를 다룬 적이 있다. '1914년(대정3) 3월에는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하여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일대에 벚꽃을 식재….' 그러나 당시에는 지면 관계상 청주 연혁지 내용을 모두 소개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로는 성서정(城西停)의 제방, 동으로는 성동정(城東停)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뭇가지를 꺾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나서 몇 년이 되지 않아 개화를 보게 되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성서정'과 '성동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성서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북주내면 서리(西里)와 원리(院里) 지역으로, 지금의 서문동에 해당한다. 성동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동주내면으로, 지금의 문화동 일대가 된다. 나머지 내용을 계속 소개하면 '만약 그것이 한 꽃이 피는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긴 제방에 많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구입석리에서는 작년부터 시금까지 사입여호 인구 1백60여명이 철가 도주하였다. 대개는 도 기본림을 화전으로 경작하여 오다가 연년히 당국에서 화전을 엄금하고 화전지대 식수를 함으로 생도들 잃은 그들이 살아갈 도리가 없음으로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정든 고향을 등진 것이다.'- 비슷한 시기로 일제 강점기인 1935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등장한다. '들에서 살어보랴고 애를 써도 살갈이 막연하기 때문에 금칙을 범하여서까지라도 살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산에 들어가서 미림을 소실하야 연맥, 마령서, 속등 등의 잡곡을 가라먹는 무리가 있으니 그것이 화전민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나라 화전의 역사는 질곡 그 자체였다. 이는 그 만큼 산림이 녹화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가 벌거숭이산을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었다. 당시 '선조림 후벌채', '1벌2식', '추풍령식 벌채' 등의 구호가 유행했다. '선조림 후벌채'는 먼저 나무를 심고 그후에 벌목을 한다는 것을, '1벌2식'은 나무 1그루를 베면 반드시 2그루를 심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밖에 '추풍령식 벌채'는 산에서 벌
지구 온난화로 식목 적기를 더 앞당겨야 한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고 있다.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일년 중 양력 2월 하순~3월을 식목을 적기로 봤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산림경제'를 지는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연원역 찰방과 단양군수를 역임했다. 농서인 산림경제는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식목의 적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식목은 정월(正月)이 상시(上時)이고, 2월이 중시(中時)며, 3월이 하시(下時)다'- 쉽게 설명하면, '식목은 음력 정월이 가장 좋은 때이고, 2월이 그 다음이며, 3월이 그 중 처지는 때가 된다' 정도가 된다. 물론 이때의 정월은 음력 한 달을 얘기하는 것으로, 지금의 양력으로 치면 3월 초순 정도가 될 수 있다. 그는 또 나무를 심은 후의 관리 요령에 대해서도 지금과 부합되는 내용을 서술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나무의 뿌리는 편안하게 뻗기를 원하고, 배토(培土)는 평평하기를 바라며, 토양(土壤)은 원래 서 있던 곳과 같기를 원하고, 구덩이는 단단히 메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모종은 어린 자식 다루듯 하되, 놓아두면 천성대로 저절로 자란다'라고
'이는 삼가 경모궁(景慕宮)에 나무를 심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궁 안 동산으로부터 주변 사방 산들에까지 모두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녹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었는데 궁관(宮官)에게 명하여 심은 나무의 총 숫자와 살아 있고 죽은 나무의 실제 수효를 매 계절 초하루에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여 아침저녁으로 살펴보는 자료로 삼아 어버이를 공경하는 소자의 뜻을 붙였다.'- 정조가 경모궁에 나무를 친히 심고 이의 소감을 적어놓은 글이다. 홍재전서는 정조의 시문집으로, 그 분량이 184권 100책일 정도로 방대하다. 이처럼 조선시대도 나무심기 행사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임금들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사찰에서 기념식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말년을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보낼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그도 손수 나무를 심으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도 그런 성향을 지녔다. 하나의 사료 안에서 두 사례를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어필각(御筆閣)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직접 심은 소나무를 봉심하고, 각 불각(佛閣)과 양어장, 온천 약수 등
지금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창업(創業)이라고 한다. 그러나 창업은 본래는 건국(建國)을 의미했다. 때문에 나라를 맨 처음 세운 임금을 '창업지주'(創業之主)로 표현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이른바 '즉위 교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지금으로 치면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마스터 플랜 정도가 된다. 이성계는 오랫동안 야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치에는 둔감한 편이었다. 때문에 실록을 보면 정도전이 '즉위 교서'를 써서 태조에게 발표하도록 한 것으로 돼 있다. 즉위 교서는 17개 항목으로 되어 있고, 향교와 관련된 내용은 이중 세번째 기술돼 있다. 이는 조선의 창업 주역들이 교육을 '백년지대계'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무 두 과거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과 지방에는 향교에 생도를 더 두고 강학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좌주'는 과거시험 때 시험감독관을 일컫는 표현이다. 교육의 중요성이 즉
전회에 '대뢰'(大牢)를 언급했다. 대뢰는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소는 보통의 소(牛)가 아닌, 집에서 기르던 소(牢)를 의미했다. 그래서 '牢' 자는 집을 의미하는 '갓머리변'에 '牛' 자의 결합으로 돼 있다. 청주향교에서 대뢰를 둘러싸고 상소문 올리는, 어찌보면 해프닝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조가 대뢰를 잡아 제를 올린 이후, 청주향교는 이를 그곳만의 전통제사로 삼은 것 같다. 그러나 광해군대 이르러 농우(農牛)가 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잡는 제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러자 당시 '우방'이라는 청주향교 유생이 이런 상소문을 올린다. '우리 세조 충장대왕께서 본 고을에 어가를 머무시어 몸소 성인의 묘당에 제사를 하심에 대뢰를 쓰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로는 법제를 이루었으니 해마다 희생에 쓸 소를 사서 먹이어 봄 가을에 배향을 지냈는데 호조가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희생소를 줄였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옛예법이 바뀌어 버리니 우리세조께서 제수우를 사용하여 남기신 뜻도 오늘부터 없어질 것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찌 소를 양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세조대왕의
청주향교의 제기(祭器) 46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한 사실이 얼마전 본보를 통해 알려졌다. 전통시대 전국의 향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성현·선현에 대한 제사이고, 또 하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향교는 그 고을에서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청주향교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서원'(書院)도 비슷한 기능을 지녀 혼란을 주고 있으나 향교는 국립 교육기관,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에 위치한 청주향교는 이른바 5성, 송조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를,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이밖에 우리나라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고려사는 기록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