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영조가 특히 마음 아파한 부분이 있었다. 반란의 주동자들이 하나같이 명문가의 후손들이었다. 같은 지배층임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칼을 겨눴다. 이인좌는 한 때 남인의 영수였던 윤휴의 외손이었고, 청주 신천영(申天永)은 신숙주의 후손, 정행민이라는 인물은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후손이었다. 무신란은 반노론 세력들이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일으킨 반란으로 충청도는 이인좌, 호남은 박필현, 영남은 정희량이 맡았다. 정희량(鄭希亮?-1728)은 정온(鄭蘊·1569-1641)의 직손이었고, 그의 외가쪽 사위가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尹拯)이다. 정온은 대사간, 대제학을 지낸 남인계 인물이고, 윤증은 정치와 학문적으로 우암 송시열과 자주 대립했다. 정희량은 명문가의 후손답게 경제력이 비교적 풍족했다. 실록은 이에 대해 '온 도에서 그 호부(豪富)함이 알려졌으며, 장획(臧獲)과 전택(田宅)이 매우 많았다.'(영조실록 4년 3월 27일자)라고 기록했다. 장획은 잘 쓰지 않는 말로 노비를 일컫는다. 그는 부석사 근처에서 할아버지묘를 이장하는 것처럼 위장한 후 동전과 곡식을 비축하고 반군을 모병했고, 반란에 쓰일 깃발을
이인좌 등 반노론 세력은 무신년(1728년)에 정변을 일으켰지만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거사에 성공할 경우 밀풍 군 탄(坦·?∼1729)으로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굳이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데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밀풍군의 할아버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인조의 장남)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 회(檜)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북인의 지원을 받아 보위에 올랐으나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협력한 인조반종에 의해 실각, 제주도로 유배를 간 끝에 사망했다. 당시 서인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광해군의 폐모살제, 즉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증살(방에 불을 때어 죽임)한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 방점이 찍힌다.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는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기 전으로, 동당(同黨)인 서인이었다. 남인들도 협력자 위치이기는 했으나 신권력 창출에 협력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무신난을 일으킬 당시 반노론 세력들에게는 그런 권력에의 향수가 있었다. 이들은 거사 직전 밀풍군을 찾아가 의사타진을 했던 것으로 실록은 기록했다. 이인좌는 관군에 체포 된 후의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유익·한세홍
1728년 무신란은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해 일으킨 정치적 성격의 반란이다.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군 청천면 송면)의 이인좌는 무신란 때 가장 먼저 기병해 국가시설인 청주읍성 감영과 상당산성을 점령했고, 또 수도 한양으로 진격했다. 따라서 무신란은 이인좌가 주동자가 돼 총괄 기획을 한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꼭지점의 주동자는 박필현(朴弼顯·1680-1728)이라는 인물로 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인좌는 관군에게 생포된 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이 봄에 동성 5촌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재작년 상주로 이사할 때 보아 잘 압니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죄과를 모두 박필현에게 떠넘기는 진술로도 볼 수 있으나, 《영조실록》 4년 3월 19일자에도 '박필현이 비록 읍재(邑宰)로 나가 있지만, 사실상 괴수(魁帥)이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인용문중 읍재는 태인현감을 일컫고 있다. 박필현은 소론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경종이 급서, 권
1728년 무신란 1년 전의 《영조실록》에는 다소 의아한 내용이 실려 있다.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니, 이는 병상(兵象)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무신의 변란(變亂)이 있었다.'- 인용문중 △형혹성은 화성 △태미원은 북쪽하늘 삼원(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하나로 천자가 다스린다는 공간 △병상은 반란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현재와 미래의 상황이 동시에 기록돼 있는 등 모순된 문장구조를 하고 있다. 사관은 국왕이 승하하면 평소 기록해 놓았던 사초(史草)를 기초로 실록 작성에 들어간다. 따라서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사관 주관이 한 문장에 표현될 수 있다. 위 모순은 이 때문에 가능했다. 아무튼 이 인용문은 멀지 않아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꽤나 퍼져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인좌의 신문 내용을 기록한 공초(供草)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신이 봄에 동성 5촌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후술하겠지만 박필현은 1728년 무신란의 또 다른 주동자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인좌보다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은 영조가 보위에 오르면서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소론과 남인세력이 막후에서 연합, 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설명된다. 이들은 반란의 명분으로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있고 △그런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노론 김춘택(金春澤·1670∼1717)의 아들이라는 이른바 '영조 김씨설'을 퍼트렸다. 영조 어머니 숙빈최씨는 본래 김춘택의 묘지기인 최씨의 딸로 무수리로 입궁, 숙종의 눈에 들어 영조를 낳았다. 이처럼 '소론+남인' 연합의 非노론 세력은 사실 여부를 떠나 영조의 정통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당시 정국 전반의 지형이고 이인좌(李麟佐·?∼1728)가 반란을 도모한 데는 가족사가 먼저 작용했고, 그 열쇠말(키워드)은 경신환국과 외조부 윤휴(1617-1680) 그리고 갑술환국과 조부 이운징(李雲徵·?∼1717)이다. 이인좌의 외조부 윤휴는 한때 송시열과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 19살 때 10년 연장자이던 송시열을 속리산 복천암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우암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일찌기 높은 학문적 경지를 이뤘다. 그러나 예송논쟁
"10일 청주에서 모인 자는 양반이 거의 2백 명이나 되어 하나하나 그 성명을 기억할 수가 없고, (…) 이인좌가 신으로 하여금 가서 영장(남연년 지칭)을 잡아오라 하기에 신이 남문에 앉아서 군사를 보내 붙잡아 오게 해서 신이 붙잡아 가지고 이인좌에게로 갔습니다." 1878년 무신란에 청주사족이 2백여명이나 가담한 것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향촌의 지배층이었던 것은 맞으나 당시 중앙정치 지배세력인 노론계에 속하지는 않았다. 청주지역은 구래로 당색(黨色)이 강한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대 3대 환국을 거치면서 지역의 공기도 달라졌다. 노론과 반노론계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향전(鄕戰)이 시작됐다. 충북대 사학과 고수연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1665년(현종 6) 송시열은 청주목 신항서원 위패에 대한 위차을 조정했다. 직전까지 경연, 박훈, 송인수, 이색 등이 배향돼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지역 연고가 없는 서인의 영수였던 이이를 주향으로 하고 나머지 8위는 병향했다. 이후 묘정비가 세워지고 1689년 송시열 사후에는 민원진, 권상하 등 골수 노론계 인물이 신항서원 원장직을 맡았다. 그러자 고령신씨, 교하노씨, 진주유씨 등 청주지역 남인들
조선시대 무신란(戊申亂)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반란군이 우리고장 청주읍성(그림)을 유혈 점령하면서 발생했다. 《영조실록》은 하루 전인 3월 14일자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때 도하(都下)에 근거없는 풍문이 날로 흉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들고 서 있어 조석 사이도 보장할 수 없는 듯하였고, 남산(南山) 아래 일대에는 가족을 이끌고 피해 도망하는 사부(士夫)들이 많아서 나룻터에 길이 막혔으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미 대규모 국가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한양도성 안에 쫙 퍼진 모습이다. 이는 한양도성 안에도 무신 반란군과 내통하는 자가 많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같은 날짜 《영조실록》에는 '남산 아래에 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많은 부류들은 그 역모를 서로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도 보이고 있다. 소론의 지지를 받고 보위에 오른 경종(景宗·1688~1724)이 재위 4년 게장을 먹은 후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급서했다. 그러자 노론의 후원을 받던 왕세제 연잉군(후에 영조·1694~1776)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대 반노론(소론+남인)으로 정치 지형이 급변했다. 이에 반노론 세력은
음성군은 지금은 인구 10만명에 2읍 7면의 비교적 큰 군세(郡勢)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06년 전까지는 달랐다. 지금의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금왕읍, 감곡면, 생극면, 삼성면, 대소면, 맹동면 등 군 북부와 서부지역은 충주목에 속했다. 소이면도 1914년 전까지는 충주목 소파면(蘇坡面)과 사이포면(沙伊浦面)에 속하던 지역으로, 지금의 면이름은 두 곳에서 한 글자씩을 조합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쇄잔했던 음성군의 모습을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병제천(幷梯川)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乾川)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청안(淸安)에 이르기 26리, 북쪽으로 충주 석적산(石積山)에 이르기 19리이다. 호수가 1백 71호요, 인구가 7백 26명이다.' 현의 중심지인 읍치(邑治)에서 가까운 곳은 7리, 멀어야 26리 정도면 이웃 고을의 경계에 도달하고 있다. 고을의 인구도 8백명을 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현의 지위를 지녔던 괴산군 청안은 지금은 면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과거 한 때는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웃 음성현을 흡수, 대읍의 위세를 지닌 적도 있었다. '전에 과천(果川)을 금천현
전통의학은 침(鍼)의 종류에 대해 '구침'(九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침의 종류가 참침·원침·시침·봉침·피침·호침·장침·대침·원리침 등 아홉가지 된다는 뜻이다. 관련 사전에 의하면 이중 대침(大鍼)은 관절질환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대침은 9분야(九野)를 상징하고 몸 전체에 있는 병사(病邪)가 관절 부위에 머물러 있는 병을 치료한다. 길이는 4촌으로 관절 속에 있는 물(水)을 빼내는 데 쓰인다.대침은 호침보다 긴 것으로, 침을 불에 달구어 놓는 번침(燔鍼)에도 쓰인다. ≪황제내경≫에 나오는 '수자(火+卒刺)'라는 것도 바로 이 화침을 말한다. 조선 인조대에 번침을 잘 놓는 침의로 이형익(李馨益·?-?)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출신인 그는 1632년(인조 10) 침술로 명성(名聲)이 있어, 도성으로 불려가 이듬해부터 인조가 죽을 때까지 번침을 시술한 공으로 현령을 지냈다. 그 후 인조가 죽자 책임을 지고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651년(효종 2)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趙氏)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치료를 위해 왕의 특별 명령으로 사면되었다. 《인조실록》에는 번침을 잘 놓는 침의로 반충익(潘忠翊)이라는 인물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여자로 변한 곰인 웅인(熊人)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금강수계에 위치한 공주 곰나루(熊津)에도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존재한다. 먼 옛날 공주 연미산 아래에 암곰이 살았고, 성장해서는 시집을 가고 싶어했다. 어느날 어부가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곰이 다가갔다. 이때 어부가 두려움 때문에 기절하자 동굴로 업고 와 극진히 간호했다. 그후 어부는 곰기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며 탈출을 궁리했으나 곰이 동굴 입구를 큰 돌로 막고 나가므로 할 수 없이 곰과 살게 됐다. 마침내 곰이 잉태하여 새끼를 낳자 어부는 곰을 돌봐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곰이 방심을 했고 어부는 탈출에 성공했다. 어부가 없어진 것을 안 곰은 강가에서 되돌아올 것을 애걸했으나 어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곰은 새끼를 죽이고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 뒤부터는 금강에 풍랑이 자주 일어 나룻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빈발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위령제를 지내자 나룻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단군신화와 곰나루 전설은 세부 전개는 다르지만, 곰과 인간이 결합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서 큰 얼개는 같다. 사학자들은 이를 역사적 사건이 신화로 상징된
조선 광해군 때 발생한 강변칠우(江邊七友) 사건은 '칠우'가 우리고장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강탈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칠우(七友)는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으로, 모두 명문가의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적자가 아닌 서자들인 까닭에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 없었고, 그러자 시와 술로 불만을 달래다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심문하는 과정에서 대북파에 의해 역모로 조작, 칠우중 박치의를 제외한 6명이 전격 처형됐다. 그러나 훗날 심문에서 박정민이라는 인물이 "5월 5일 충원(忠原)에서 군대를 모아 정씨(鄭氏)를 추대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광해군 8년 6월 24일자)라고 진술, 완전한 조작으로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충원'은 우리고장 충주, '정씨'는 난세에 출현한다는 선인(仙人)을 일컫는다. 광해군이 박치의 체포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중에는 '현상금+관직 수여'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때 박치의에게 현상금을 걸고 잡아들이려 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엄하게 독촉했는데, 잡는 자에게는 바로 아경(亞卿)의 직을 제수하고 정훈(正勳)에 녹용하겠다고까지 현상하였다.' 인용문 중 '아경을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로 홍문관이 있고, 그 수장은 정2품의 대제학(大提學)이었다. 이런 대제학들 사이에는 '주문연'(主文硯)이라는 벼루를 주고 받는 아름다운 전통이 존재했다. 굳이 벼루를 주고 받은 것은 대제학이 '문'(文)을 총괄하는 최고의 벼슬자리였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 권221 직관고는 주문연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문연은 남곤(南袞)으로부터 이행(李荇)에게 전해진 뒤 서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덕형(李德馨)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그런데 명(明)나라 군대가 이를 얻어서 가져다가 단지를 괴는 돌로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보고서 도로 가져와 홍문관(弘文館)에 둠으로써 다시 전해지게 되어 이이첨(李爾瞻)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이이첨이 패(敗)하게 되자 다시 잃어버렸는데, 신흠(申欽)이 대제학으로 있을 적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으로 다시 큰 벼루 하나를 만들어 '전심연(傳心硯)'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남아 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대한제국기인 1903~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칙명(勅命)으로 편찬된 2백50권 분량의 책이다. 따라서 주문연은 △임진왜란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