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학은 해부학에서 출발했다. 서양의학의 원조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뼈, 근육, 힘줄의 구조와 기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에비해 동양의학은 기(氣)를 중시하다 보니 해부학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살을 간단히 째는 종기 치료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서면 흐름은 달라진다. 실학을 중심으로 '우리 몸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해부학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대표하는 사람이 '성호사설'로 유명한 이익(李瀷·1681∼1763)이다. 그는 성호사설 제 15권의 인사문(人事門)에서 '오장도'(五臟圖)라는 글을 남겼다. 오장도는 인간의 몸에 들어 있는 5개의 장기(臟器)인 간장(肝腸), 심장(心腸), 비장(脾臟), 폐(肺), 신장(腎臟)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 남자가 생각하기를, "누이동생 하나를 죽여서 천만 명의 목숨을 살림이 옳겠다." 하고 드디어 배를 가르니 간(肝)과 격막(膈膜)이 모두 썩었는데, 앵도 씨가 엉켜 살이 돋아났다. 이에 간을 보호하는 처방은 얻었으나, 그 천만 인을 살린다는 공덕이 한 누이동생을 죽인 죄악을 속(贖)하지는 못할 것이다.'- 해부학적인 일, 즉 '사람의 배를 갈라 천만인의 목숨을 얻으면 얼마
전회에 조선이 명나라측의 잘못된 이성계 족보를 고치는데 무려 2백년 가까이 걸렸다고 밝힌 바 있다. 조선 조정은 그만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조선 중기의 중종 임금도 곧 남곤·이자 등을 명나라에 파견, "태조(이성계 지칭)의 세계(世系)가 이인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그 개정을 요구했다. 그에 앞서 중종은 대신들과 명나라에게 줄 선물을 직접 논의했다. 창업주(이성계) 족보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선물은 과거와 확연히 달랐다. 그 양이 푸짐하고 다양했다. '은보 등이 서계(書啓)하였는데, 공 사신에게는 큰 벼루 3면(面), 백세면포(白細綿布) 10필, 흰 세모시(白細苧布) 8필, 여섯 폭 유석(油席) 3장, 견면지(繭綿紙) 1백 장을, 화 사신과 설 사신에게는 큰 벼루 3면, 백세면포 5필, 흰 세모시 5필, 여섯 폭 유석 3장, 견면지 60장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武宗)은 선물을 잔뜩 받았으면서도 족보 오류는 바로 잡지 않았다. 그러자 안달이 난 조선 조정은 유보, 권벌, 조사수, 김주, 이후백·윤근수, 홍성민 등 사신을 릴레이 식으로 보내 오류 수정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그때마다 "고치겠다"는 언약만 할 뿐 계속 뜸을 들
명나라는 조선건국 초기부터 무려 선조 임금대까지 정확하지 않은 이성계의 족보를 기록했다. 당연히 조선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이의 수정을 요구했다. 양국을 오랫동안 불편하게 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둘은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고해받쳤다. 그 뒤 명나라는 이들의 말을 믿고, 자국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했다. 조선 조정이 이성계의 족보가 명나라 사료에 잘못 기록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어업권 분쟁이 있었다. 이때 명나라가 항의한 문서에 '高麗陪臣李仁任之嗣成桂今名旦者云云'(고려배신 이인임지사성계 금명단자운운)라는 내용이 서술돼 있었다. 풀이하면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인 성계의 지금의 이름을 단이라 하는 등' 정도가 된다. 명나라에 있어 이성계 족보는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유전학상 Y염색체는 아버지-아들-손자 등 이른바 부계(父系)로만 유전된다. X와 Y 염색체는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미토콘드리아(mt) DNA는 모계(母系)로만 전해진다. 수정을 할 때 정자의 핵만 난자 속으로 들어가고, 미토콘드리아가 속해있는 세포질을 난자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연구하는 분야를 분자생물학이라고 부른다. 세계 고인류학 학자들이 분자생물학을 이용, 현생인류의 이동 경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 결과, 현생인류의 유럽 이동경로가 종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 사뭇 다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종전에는 20만년전 아프리카 동북부에 출현한 현생인류가 10만년전 쯤에는 레반트(Levant·지금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 지역에서 분기, 한 집단은 인도를 거쳐 동북 아시아까지 진출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또 이곳에서 분기한 또다른 집단은 계속 북위도로 올라온 후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간 것으로 봤다. 이른바 '인류 단일지역 기원론'의 핵심적인 주장으로, 달리 '아웃 오브 아프리카설'로도 불려져 왔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을 이용한 최근의 연구 결과는 아프리카를 벗어난 현생인류가 일단 인도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분기한 것으로
직지(직지심체요절)는 고려우왕 때인 1377년 청주목 교외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불서를 말한다. 그러나 1377년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3년과 60여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는 이 시기들어 지식보급에 대한 필요성이 대중적으로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 금속활자는 뜻글자인 한자를 매개로 했기 때문에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훈민정음은 소리글자를 매개로 했기 때문에 IT 최강국 한국의 밑걸음이 됐다. 청주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직지를 간행했다는 점은 한번쯤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왜 다른 곳도 아닌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찍었을까. '불경은 사찰에서 필요한 것이니까'라고 답을 하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만점은 아니다. 고려 전기에는 관청수공업이 발달했다. 반면 후기에는 사원(절) 수공업이 성했다. 이와 관련해 고려 후기가 되면 사찰이 전국토의 17%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사원경제가 급팽창한다. 고려 사찰은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면세 혜택을 받았다. 여기에 왕실과 귀족들이 앞다퉈 토지 기탁을 하면서 고려의 사원경제는 날로 비대해졌다. 고려 사찰은 이같은 시대흐름 하에서 장인들을 대거 고용, 국가
조선시대 벼슬 중에 '사또'(혹은 원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사또는 정식 벼슬이름이 아닌 '수령'(守令)을 달리 불렀던 표현이다. 수령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을 준말이다. 이중 군수가 다소 높아 종4품, 현령은 종6품의 품관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을 원님 중 가장 낮은 품계는 현감으로, 보통 종6품의 벼슬을 지녔다. 조선시대 원님은 지금의 시장, 군수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수령은 왕이 임명하고, 사법·군사·행정권을 행사했다. 이에 비해 지금의 시장과 군수는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행정권만 행사하는 점이 다르다. 고을 원님들의 임기는 보통 2년으로, 관찰사 1년보다는 다소 길었다. 이때 고을 원님 가족이나 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혼자서 임지에 부임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원님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기생 이야기가 뒤따른다. 우리가 춘향전에서 읽었듯이 남원 사또 변학도가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른바 기생 점고였다. '점고'(點考)는 명부에다 일일히 점을 찍어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관기는 관에 속한 관물(官物)로 여겨졌다. 춘향전으로 널리 알려진 '열녀춘향수절가'는 점고 끝에 수
조선시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애주가로 단연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있다. 그의 애주가적인 진면목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로 일컬어지는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잘 드러난다. '한 잔(盞) 먹세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 꽃꺽어 산(算)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덮어 줄이어 매여가나 /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울며 예나 /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 우거진 숲에 가기 곧 가면 /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할꼬 /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편의상 고한글체를 현대문으로 고쳐 실었다. 인용문중 '산(算)놓고'는 술잔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유소보장(流蘇寶帳)'는 화려한 상여를 일컫고 있다. 애주가 정철의 진면목은 유물로도 어느정도 입증되고 있다. 선조 임금은 정철이 술을 너무 좋아하자 '하루 석잔만 마시라'는 권고의 의미로 은배(銀盃)를 하사했다. 그 은배가 지금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의 송강정사에 전시돼 있다. 손잡이가 달린 이 은배는 복숭아 모양으로 잔받침도 갖추고 있다. 선조 때는 사림이 동인과
1882년 신식군대(별기군)만 우대하는데 불만을 품은 조선말기의 구식군대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이때 수도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장어영(壯禦營)의 구식군대 군인들도 대거 가담했다. 그리고 총지휘관인 장어대장(壯禦大將)은 신정희(申正熙·1833∼1895)라는 인물이 맡고 있었다. 결국 책임을 모면할 수 없었던 신정희는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됐다. 그러나 그는 채 1년도 안돼 고종의 특명으로 풀려나 포도대장에 임명됐다. 조선시대 포도대장은 사회·경제사범 단속, 궁궐 경비, 임금 호위 등 치안과 경호임무를 동시에 담당 했다. 국왕의 근거리에 위치했던 만큼, 한성부 좌·우윤(종2품·오늘날 서울시 부시장) 출신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런 포도대장 자리를 1894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역임한 인물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신정희로, 그는 진천군 이월면 논실마을 출신이다. 그는 다른 직책도 겸하기도 했지만 포도대장직 만큼은 거의 놓지 않았다. 이는 당시 주군인 고종이 그를 그만큼 신뢰했음을 의미한다. 신정희가 포도대장으로서 '암행어사 박문수'와 비견될 만큼 명성을 얻은 것은 공평무사한 법적용에 있었다. 그는 도박이 사회불안 요소로 떠오르자 이를
조선시대 국청(鞠廳)은 모반, 대역죄 등 국가 중죄인을 심문·재판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임시로 설치되는 특별 재판정을 말한다. 이 국청은 죄질에 따라 친국(親鞫)·정국(庭鞫)·추국(推鞫)·삼성추국(三省推鞫)으로 다시 세분됐다. 친국은 국왕이 참석해 친히 심문하는 것으로 위험에 대비해 왕궁을 호위하고 진행했다. 설치 장소는 경희궁, 창덕궁, 금위영이었다. 정국은 친국과 대체로 같으나 왕명에 의해 13~ 23인의 국문관이 동석했다. 설치 장소는 보통 병조나 의금부였다. 추국은 국문관이 10인 내외로 다소 적은 편이다. 필요에 따라 친국 또는 정국을 추국으로 바꾸어 계속하였다. 삼성추국은 모반보다는 강상(윤리죄) 죄인을 심문하는 경우로 의정부·사헌부·사간원의 관원 중에서 왕명으로 지명된 8인의 국문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경우 죄인은 형조에서 이미 심문을 마쳤기 때문에 삼성추국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만 조사받았다.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인 권섭이 송시열의 사사 등 정치환경의 급변으로 인해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으로 낙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아들 권진성을 정치적 사건으로 잃은 슬픔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종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경종은 소론의 세를
조선시대 선비들은 정주개념 외에 별장문화 의식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석간수 흐르는 계곡에 아홉구비를 뜻하는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각 구비마다 시를 지었다. 주자가 설정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 그 기원으로, 이 영향을 받아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구곡시는 우리고장 괴산에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구곡은 좁은 수계가 아닌, 넓은 곳에 설정되기도 한다. 제천~청풍 일대에도 구곡시가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 영조 때 제천 인물인 권섭(權燮·1671∼1759)은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를 지었다. 그는 1곡부터 9곡까지 지역 순에 따라 각각 한 곡마다 시조 1수씩을 지었다. 각 곡명은 1곡 대암(對岩), 2곡 화암(花岩), 3곡 황강, 4곡 황공탄(皇恐灘), 5곡 권호(權湖), 6곡 금병(錦屛), 7곡 부용벽, 8곡 능강(綾江), 9곡 구담 등이다. 이중 황공탄은 전회에 소개한 바 있다. 지면상 제 8곡가인 능강만을 소개하면 '八曲이 어드메오 綾江洞이 맑고 깊어 / 琴書 사십년의 네어인 손이러니 / 아마도 一室雙亭의 못내들겨 하노라'라고 썼다. 혹자는 8곡에 대해 시각과 청각의 회상적 결합에 있다.
[충북일보] 전교조 충북지부와 전국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충북소방지부·충북교육청지부는 19일 "정부는 공무원 생존권 보장을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무원 임금은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2023년 기준 83.1%까지 하락해 역대 최대로 격차가 벌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한국행정연구원의 지난해 공직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직무 만족도는 하락하고 이직 의향은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며 "5년 이하 재직 공무원의 72%, 6∼10년 재직 공무원의 75%는 이직 의향의 이유 1순위로 '낮은 보수'를 꼽았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실질임금이 삭감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라며 "정부는 내년도 공무원 임금을 6.6% 인상하고, 공무원 임금이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100%에 도달하도록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집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기본급 인상과 함께 공무원 하위직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액급식비 3만 원 인상, 6급 이하 직급보조비 3만5천 원 인상, 초과근무수당 단가 감액률 인상, 명절 휴가비·인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의 핵심 전략이자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클러스터 구축이 추진될 전망이다. 도내 반도체 기업이 집적화한 지역에 조성해 충북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충북도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계획 수립을 위한 기획 연구용역에 들어갔다고 19일 밝혔다. 용역 기간은 오는 11월까지 6개월이다. 용역을 맡은 업체는 충북 지역 반도체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분포와 국내외 반도체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도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다른 시·도의 우수 사례 등을 통해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충북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의 필요성과 논리를 개발한다. 클러스터 지정에 따른 전략과 로드맵을 마련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핵심 분야 선정과 산업 생태계 강화 전략도 수립한다. 경제적·정책적 타당성을 분석해 당위성을 검토한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와 기회발전특구와 연계하는 방안도 살펴본다. 가속기는 청주 오창에 구축 중이며 특구는 지난해 11월 제천과 보은, 진천, 음성 지역의 5개 산업단지가 지정됐다. 면적은 109만6천500평(362만4천986.2㎡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