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의 직손 중에 정호(鄭澔·1648∼1736)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을사환국으로 파직돼 문외 출송됐으나 말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정치적 부침이 심했다. 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장암사당'이 우리고장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묘소는 괴산군 불정면 화영산에 위치하고 있다. 장암사당이 창동리에 자리잡는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충주지방 최초의 서원은 1582년(선조 15)에 건립된 팔봉서원으로 김세필, 이자, 이연경 등을 제향했다. 이때까지 팔봉서원은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중앙정계에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은 대립은 향촌의 사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서원 건립을 통해 위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남인계 인물인 한치상(韓致相·?-?)은 팔봉서원을 자파의 서원으로 간주하고 1672년(현종 13) 사액을 상소했다. 이 과정에서 노수신이 추향됐다. 이로서 팔봉서원에 정치색이 입혀졌다. 앞서 1661년(현종 2)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운곡서원을 건립, 스승인 정구(鄭逑·1543-1620)을 모셨다. 정구는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로 부임 후 서당을 열어 충주의 유학들을 지도한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는 '섬김'(事大)을, 일본에 대해서는 '친선'(交隣) 정책을 취했다. 조선은 이같은 방침에 따라 임진왜란 전에 4회, 임란 후에 12회 등 총 16회 정도의 통신사를 일본에 정식으로 파견했다. 이들 조선통신사들은 귀국후 한반도 안에서의 하행길(부산방향)과 상행길(복로·서울방향) 그리고 일본에서 겪은 경험담을 다양한 제목의 일기글로 남겼다. 조선시대 사신, 포로, 표류 등으로 인해 일본을 내왕한 사람의 경험담을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으로 '해행총재'(海行摠載)가 있다. 여기에 조선통신사들의 일기문이 대거 수록돼 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1974~1981년에 걸쳐 국역했다. 따라서 일반인의 접근도 가능하다. 해행총재에는 총 22개의 조선통신사 일기글이 실려 있다. 어떤 규칙을 갖고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 산문 등 각기 다른 형태의 일기글이 실려 있다. 이중 그날그날의 행로(行路) 복원이 가능한 것은 일본행록(송희경·1420), 해사록(경섬·1607), 동사록(강홍중·1624-1625), 병자년 해사록(김세렴·1636-1637), 동사록(조경·1643) 등이 있다. 이밖에 계미동사일기(미상·1643), 부상록(남용익·1655-1656),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 지나도 /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문둥병 시인 한하운(韓何雲·1920~1975)이 1949년 '신천지'에 발표한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라는 시의 일부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 마치 광야의 고행처럼 묘사돼 있다. 다음 시 '벌'은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한하운의 또 다른 시다. '죄명(罪名)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條項)에도 없는 /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 시 '소록도 가는 길'에서는 '붉은 황토길'과 '쑤새미 같은 해'가 공간과 시각적으로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반면 시 '벌'은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는 표현에서 보듯 천부인권적인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문둥병의 본래 이름은 발견자 한센(G.A. Hansen)의 이름을 딴 '한센씨병'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한센씨병을 '나병'(癩病) 또는 '나질'(癩疾)이라고 불렀다. 실
북한 황해도 동북부에 곡산이라고는 곳이 있다. 지명사전은 곡산에 대해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 통일신라 때는 영풍군(永豊郡), 고려시대에는 곡주(谷州)로 불렸다'고 적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명의 변동이 심했다. 태조 때는 현비 강씨의 고향이라고 해서 '곡산도호부'로 승격했다. 현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첩이었지만 본처 한씨가 일찍 죽으면서 조선 왕조의 첫번째 정비가 됐다. 1400년 이방원이 조선의 세번째 왕위(태종)에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골육상쟁으로 얼룩졌다. 방원은 현비강씨의 두 아들인 방석과 방번을 모두 죽인 뒤 보위에 올랐다.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이다. 태종의 등극은 강씨의 고향에도 영향을 미쳐 곡산도호부는 '곡산군'으로 격하됐다. 곡산 출신으로 또 다른 유명 인물로는 연사종(延嗣宗·1360∼1434)이 있다. 그는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와 행동을 함께 했다. 2차 왕자의 난 때는 방원의 편에 가담해 방간을 제압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 결과,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됐다. 현재 연사종은 곡산연씨의 실질적인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세종대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오면서 의서(醫書)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현재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도유형문화재 제 134호로 지정돼 있다. 오랫동안 빨래판 용도 등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마멸이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이 비에서는 '元泰'라는 사람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사학자들은 "신라 귀족의 한 명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金元泰'라는 인물이 원천동 신라사적비의 '元泰'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귀족들은 태반이 '경주김씨'였기 때문에 성 표기가 종종 생략됐다. 김원태는 성덕왕의 전비(前妃)인 성정왕후(成貞王后)의 아버지로, 진골의 성분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성정왕후는 716년(성덕왕 15)에 출궁(出宮)을 당하게 된다. 이 대목을 학자들은 귀족간에 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김원태 일족이 패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원태를 703년(성덕왕 2) 7월에서 705년 1월까지 중시(中侍·오늘날 국무총리)를 지냈던 원문(元文)과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원문은 704년에 죽었으므로 성정왕후의 출궁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잘 맞지 않는다. 이런 '원태'가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에 등장해 있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된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는 685년(신문왕 5) 우리고장 청주에 서
이번주부터 '충북 백두대간 재넘이 문화' 시리즈를 시작한다. '재넘이'는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나 '재를 넘는 문화'라는 뜻에서 조어를 만들었다. 공간적 대상은 백두대간 충북구간이다. 본보는 지난해 '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시리즈를 12회 연재한 바 있다. 제목에서 보듯 지난해 시리즈는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에 대한 현재의 위치성을 확인하는데 중점을 뒀다. 금년에는 그 위치성을 바탕으로 백두대간 충북 옛고개를 통해 동서 사면으로 무엇이 오갔는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게재 순서는 1회 총론, 2회 조선통신사길, 3회 암행어사길, 4회 과거길, 5회 고개주막, 6회 소금길, 7회 유배길, 8회 종교길, 9회 보부상길, 10회 고개운반 매체 등이다. 오늘은 그 첫번째로 '충북 백두대간 재넘이 문화'에 대한 인문지리적인 소개를 하는 총론이다. 백두대간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남한강과 낙동강, 금강과 낙동강을 나누고 있고, 또 영남과 충청, 영남과 호남을 구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고대 축성된 산성들은 백두대간 동·서 사면에 가장 많이 존재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기준으로 할
음성 황새가 밀렵꾼 총에 희생된 것은 지난 1971년 4월이었다. 그 이전까지 음성 생극에 황새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특종 보도한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六·二五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황새가 다시 충북 음성군에서 서식하고 있음이 본사 천연기념물실태조사반에 의해 확인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특종은 한 독자의 제보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동아일보는 이 부분을 '이번 황새의 번식을 확인하게 된 것은 독자 윤용진 씨가 본보에 연재해 온 천연기념물 보호캠페인 기사를 읽고 자기의 고향에 황새가 있다고 본보에 알려와 본사 천연기념물 생태조사반이 두차례에 걸친 답사 끝에 황새를 촬영하는데 성공한 것이다'라고 썼다. 계속해서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에 황새 번식지로는 충북 진천군 이월면과 음성 대소면이 천연기념물 황새번식지로 지정되었으나 이미 六·二五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이곳 생극·금왕 일대에 서식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몇년후 한 언론인은 황새 특종기사를 소재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특종 순간의 희열이 잘 표현돼 있다. '학계의 도움의 받아 그것이 (천염기념물) 199호임을 확인하고 촬영에 성공해서 사진특종을 보도한 것이 P
황새의 본래말은 '한새'로 이때의 '한'은 '크다'는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황새는 '큰 새'라는 뜻이 된다. 황소할 때의 '황'도 본래는 '한'으로, '큰 소'라는 의미다. 황새는 우리나리에서는 비교적 흔한 새였다. 때문에 그림이나 자수의 주요 소재가 됐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황새는 '송단(松檀) 황새' 또는 '관학(관은 觀의 見대신 鳥)'이라고 불렀다. 옛문헌에도 황새는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고려 문호로 일컬어지는 이규보는 '사평강(沙平江) 가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시에서 황새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돛 내린 강어귀에 오래도록 머뭇거리면서/ 맑은 물결 굽어보며 말없이 수염만 만진다 / 언덕에 우거진 풀 겨우 황새 숨을 만하고 / 갯가에 오는 밀물 오리를 마중하는 듯…'- 참고로 '東國은 '고려', '李相'은 '이씨 성을 가진 재상' 즉 이규보 자기 자신을 일컫는다. 세종실록에 큰 새와 뱀에 얽힌 얘기가 쓰여 있다. 이때의 큰 새는 역시 황새를 의미한다. '북방 야인 지방에 사람 천만 명을 잡아먹은 뱀이 있는데, 사람의 피가 뱀의 창자 속에서 단단히 엉키어 돌이 됩니다. '관(황새 지칭) '이라고 부르는 큰 새가 있어서, 그 뱀을 잡아먹고 그 돌을
상소(上疎)는 대략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나 말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소로는 최만리의 한글반대가 가장 유명하다. 갑자년에 있었선 상소라고 해서 이른바 '갑자상소'라고 한다. 전회에 우리고장 괴산 인물 전유형을 설명한 바 있다. 그도 괴산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임금께 상소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용기와 배포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로 들어가 우리고장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왜군 방어를 위한 책략 10여조를 선조 임금에게 상소했다. '괴산 유생(儒生) 전유형(全有亨)이 군국(軍國) 어왜(禦倭)에 대한 일 10여 조항의 방략을 상소하니, 상은 이를 깊이 받아들이고서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상소를 보건대 학식이 해박하고 병기(兵機)까지 통달하여 근래의 다른 상소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초야의 기사(奇士)가 아니겠는가'"- 실록에 상소 10여조의 내용이 자세히 실려있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쉽다. 그러나 전란 중의 선조는 이 상소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말만을 잘한 경우가 대부분 많다. 그러나 이곳으로 불러다가 일을 맡겨 보고 그의 말을 들어 재주를 시
인디안과 에스키모인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같은 원주민이면서 얼굴을 포함한 신체적 외형은 많이 다르다.인디안이 메부리코에 얇은 입술을 지니고 있다면 에스키모는 둥글넙적한 얼굴에, 맑으면서 약간 붉은 피부를 지니고 있다. 이같은 차이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 고고인류학계는 그 원인을 언어에서부터 찾고 있다.현재 아메리카 신대륙 원주민들은 6백여개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그러나 혼잡스러워 보이는 이들 언어는 △아메린드(Amerind·583개) △나-다네(Na-Dane·32개) △에스키모-알류트(Eskimo-Aleuts·10개) 등 3개 언어군으로 대별되고 있다. 학자들은 이같은 원인을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라시아 슬기사람들이 1만2천년의 전후해 베린지아 대륙(지금의 베링해협 일대·용어해설 참조)을 3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건넌 결과로 보고 있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선주 교수는 "1만2천년 전에 아메린드 언어군을 사용하는 슬기사람이 가정 먼저 베린지아 대륙을 건넌 후 북미를 거쳐 남미까지 진출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수천년 후 베린지아 대륙을 두번째로 건넌 후기구석기 집단은 나-다네 언어군으로, 이들은 주로 북아메리카의 북서지역에 정착했다.
[충북일보] 전교조 충북지부와 전국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충북소방지부·충북교육청지부는 19일 "정부는 공무원 생존권 보장을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무원 임금은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2023년 기준 83.1%까지 하락해 역대 최대로 격차가 벌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한국행정연구원의 지난해 공직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직무 만족도는 하락하고 이직 의향은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며 "5년 이하 재직 공무원의 72%, 6∼10년 재직 공무원의 75%는 이직 의향의 이유 1순위로 '낮은 보수'를 꼽았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실질임금이 삭감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라며 "정부는 내년도 공무원 임금을 6.6% 인상하고, 공무원 임금이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100%에 도달하도록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집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기본급 인상과 함께 공무원 하위직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액급식비 3만 원 인상, 6급 이하 직급보조비 3만5천 원 인상, 초과근무수당 단가 감액률 인상, 명절 휴가비·인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의 핵심 전략이자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클러스터 구축이 추진될 전망이다. 도내 반도체 기업이 집적화한 지역에 조성해 충북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충북도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계획 수립을 위한 기획 연구용역에 들어갔다고 19일 밝혔다. 용역 기간은 오는 11월까지 6개월이다. 용역을 맡은 업체는 충북 지역 반도체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분포와 국내외 반도체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도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다른 시·도의 우수 사례 등을 통해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충북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의 필요성과 논리를 개발한다. 클러스터 지정에 따른 전략과 로드맵을 마련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핵심 분야 선정과 산업 생태계 강화 전략도 수립한다. 경제적·정책적 타당성을 분석해 당위성을 검토한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와 기회발전특구와 연계하는 방안도 살펴본다. 가속기는 청주 오창에 구축 중이며 특구는 지난해 11월 제천과 보은, 진천, 음성 지역의 5개 산업단지가 지정됐다. 면적은 109만6천500평(362만4천986.2㎡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