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이 올 발굴 30주년을 맞았다. 충북대 박물관팀이 지난 1982부터 2003년까지 총 6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수십여기의 고분에서 4~5세기 무렵의 한성백제기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됐다. 무기류로는 철갑옷, 화살촉, 철도끼, 철창 등이 나왔고 말과 관련된 무구류로는 말재갈, 등자(발걸이) 등이 수습됐다. 이밖에 '손잡이잔'(파배) 토기도 수습됐다. 고고학적 발굴에는 종종 비화가 뒤따른다. 신봉동고분 발굴에도 비화가 존재하고 있다. 충북대 차용걸 교수는 그해 3월 대학 동기인 고고학자 심정보 씨 등과 원래는 상당산성을 산책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차용걸 교수가 전날 먹은 술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자 "상당산성 대신 가까운 야산인 신봉동 일대를 산책하자"며 장소를 바꿨다. 차 교수는 이날 신봉동 일대에 도굴된 고분이 매우 많이 존재하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충북도에 긴급 발굴조사를 의뢰했다. 그로부터 두달 뒤 충북대 박물관팀에 의해 정식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유물이 수습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도굴갱이 1천개가 넘었다. 특히 도굴범이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나무 위에 망루까지 설치해 놓고 마음껏 무덤을 파헤쳤다. 그
꿈의 사전적인 정의는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시각적 심상이다. 꿈의 가장 큰 특징은 꿈꾸는 '나'는 '나'이면서도 현실의 '나'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 고전인 주례(周禮)는 일찌기 점몽 편에서 꿈을 꾸게 된 원인에 따라 꿈을 정몽(正夢), 악몽, 사몽(思夢), 오몽(寤夢), 희몽(喜夢), 구몽(懼夢) 등 여섯 종류로 분류했다. 정몽은 깨어나도 기억이 생생한 꿈으로 어떤 문제에 깊이 고심하고 있을 때 주로 꾸게 된다. 악몽은 심히 놀라 꾸는 꿈, 사몽은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꿈속에서 나타난 것을 일컫는다. 잠에서 로또 당첨되는 꿈을 꿨다면 바로 '사몽'이 된다. 이밖에 오몽은 낮 동안에 있었던 일이나 평소에 말한 것을 꿈에 보는 것을, 구몽은 두려워하는 꿈을 말한다. 이밖에 꿈과 관련된 표현으로 비몽사몽(非夢似夢), 일장춘몽(一場春夢), 태몽(胎夢), 호접몽(胡蝶夢) 등이 있다. 이중 호접몽은 장자(莊子·BC 369 ~ BC 289?)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깨서는, 자기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호랑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데서 나온 표현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꿈을 꾸고 난 후 그 꿈의 인상
전회에 조선시대 화폐 대명사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유통시킨 인물이 우리고장 충주시 소태면에 묘가 있는 허적(許積·1610∼1680)이라고 밝힌 바 있다. 틀린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따라 상평청(常平廳) 설치를 건의한 인물이 있었다. 1633년(인조 11)의 김신국(金藎國)이라는 인물이다. 상평통보는 숙종 때 처음 발행돼 조선후기까지 같은 것이 유통된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상평통보는 그 모양과 유통 형태에 따라 무배자전(인조 11년), 단자전(숙종 4년), 대형전(숙종 5년), 중형전(영조 28년), 소형전(순조 7년), 당백전(고종 3년), 당오전(고종 20년) 등 7종류로 구별되고 있다. 무배자전은 뒷면에 문자가 없어서, 단자전은 뒷면 상부에 약자로 주전소를 표시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숙종-순조 연간에 상평통보가 대·중·소형으로 구분되는 것은 크기가 작아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시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면이 있다. 왜 동전 크기가 작아졌는냐는 점이다. 원료 문제였다.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 재료인 구리와 주석의 확보가 쉽지 않게 되자 갈수록 엽전 크기를 작게 만들었다. 김신국은 화폐의 필요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인조
소금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간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무기물이자 조미료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암염(巖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지인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소금 가격은 더 비싸졌다. 소금은 생명 필수품 외에 구황(救荒) 용도로도 매우 중요시 됐다. 큰 기근이 찾아왔다고 해서 나물류를 그냥 먹을 수는 없다.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이 필요했고, 또 염 섭취를 해야 부종(浮腫)을 예방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굶주린 백성들이 비록 풀을 먹더라도 반드시 염장(鹽醬)을 먹어야만 부종(浮腫)에 걸리지 않는 것인데, 소금이란 영서(嶺西)에서는 없는 것이니, 청컨대 영동(嶺東)의 관염(官鹽)을 갖다가 영서(嶺西)에 적당하게 배급할 것이며…'- 소금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소금을 어물, 수철(水鐵), 목기(木器), 토기 등과 함께 이른바 5대 물종(物種)으로 여겼다. 때문에 당시 염상들은 소금의 이윤을 쫓아 백두대간 재넘이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소금은 중량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먼거리 운송은 물길, 가까운 거리 운반은 육로를 이용했다. 그러나
서민경제의 주거래 수단은 뭐니뭐니 해도 동전, 지폐 등으로 구성되는 화폐다. 우리나라의 화폐는 조선 숙중대 들어서야 비로소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앞서 고려 조정도 이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고려 조정은 곡식, 면포 등 현물로 경제적인 거래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고 있었다. '숙종 7년에 비로소 관청을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고 해동통보(海東通寶)라는 글자를 표면에 새겼다. 드디어 종묘에 고하고 처음으로 돈을 썼으며 (…) 민간에 무역을 허락하여 돈의 편리함을 알게 하였다.'- 인용문 중의 숙종은 조선이 아닌 고려의 임금, 그리고 해동통보가 주조된 숙종 7년은 1102년이 된다. 그러나 해동통보는 오래 유통되지 않았다. 고려 백성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현물을 매매수단으로 선호했다. 고려사에 등장해 있는 내용을 조선후기 이긍익(1736-1806)이 연려실기술에 다시 수록했다. 연려실기술은 '이때 화폐를 쓰게 한 지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나 백성들이 쓰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이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또 폐지하였다'라고 썼다. 조선 조정도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선조-광해군 연간의 명신으로
얼마전 '이화령 구간 복원 기공식'이 현장에서 열렸다. 금년 10월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연장 46m, 폭 14m의 생태너널이 구축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일제에 의해 끊어졌던 우리 민족의 대동맥을 이어 민족정기와 얼을 되찾게 됐다"는 요지의 축사를 한 것으로 언론이 보도했다. 민족 정기를 거론할 때 그 대척점에 서는 것이 이른바 '일제의 만행'이다.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받았다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 △지명을 개명했다 등의 내용이 단골로 뒤따른다. 이화령에서의 일제 만행은 두번째 유형인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로 설명됐다. 일제의 만행은 상당부분 사실이고 문헌이나 행정기록 등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으려는 의도에서 이화령을 신작로 형태로 개통시켰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이화령이 한반도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가 아닌 고려시대다.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 만큼 고려시대에 작성됐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사는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대왕의명을 받아 기술했다. 고려사에 이화령(梨花嶺)의 또 다른 표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행방을 알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를 '제기선성'(除其先聲)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암행어사 임명장인 봉서에는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 또는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표현이 씌여졌다. 전자는 '남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봐라'라는 뜻으로, 호남이나 충청우도(지금의 충남지역)로 향하는 암행어사에게 주어졌다. 후자는 '동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봐라'라는 뜻으로, 경상·강원도와 충청좌도(충북)로 향하는 어사에게 전달됐다. 암행어사라는 표현은 중종 10년(1479)에 처음 등장했다. 같은 문장 안에 '어사', '암행어사'가 동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비교적 활성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사헌 김양경(金良璥)이 아뢰는 말이다. "근일에 자못 듣건대 수령의 분수에 지나친 행동이 혹은 그 두곡(斗斛)을 크게 만드는 사람까지 있다고 하니, 경연관이나 어사(御史) 중에서 내보내어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한 번 나간다면 탐관이 저절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암행어사는 소임을 마치고 귀환하면 공식 보고서인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각 한 통씩 작성해 왕에게 제출해
조선시대 관청에서는 과거 부임하였던 전임관, 수령 등 고을 벼슬아치의 명단을 기록했다. 이를 환적(宦蹟)이라고 불렀다. 안책(案冊), 수령안(守令案) 등도 같은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환적을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에 청주수령을 역임한 인물은 총 259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기별로 살펴보면, 15~16세기 조선 전기의 청주수령은 총65명인 가운데 이중 44%인 28명이 문과 급제자로 조사됐다. 반면 무과 출신자는 4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5세기 청주수령 중에서는 문과 출신자가 7할에 가까우나, 16세기에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4할대로 떨어졌다. 반면 16세기에는 무관 출신이 7.7%에 이르고 음관도 6명으로 11.5%에 이르는 등 15세기에 비해 문관의 비율이 급락했다. 이밖에 17~19세기의 청주 수령직은 194명중 140명이 문과 출신으로, 72.2%를 차지하였다. 이에 비해 음관 출신은 53명으로서 27.3%, 무과 출신은 1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들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 지면서 음관 출신자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현종 연간에 청주목사를 지낸 인물 중에 이만영(李晩榮·1604∼1672)이 있다. 그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의
1982년 3월 하순에 청주시 운천동 속칭 산직말 입구에서 오래된 비석 하나가 발견된다. 바로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134호로 지정된 '운천동 신라사적비'다. 비(碑)는 정방형의 형태로 3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 재질의 비는 높이 92㎝, 너비 91㎝, 두께 15~20㎝ 등의 제원을 지녔다. 발견 당시 비는 윗부분은 절단되고 아래 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마멸이 심해 비문 내용이 완벽히 판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비문 중에 '壽拱二年歲次丙戌'(수공이년세차병술)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壽拱'은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시절에 사용하던 연호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사적비로 확인됐다. 따라서 문화재 명칭도 '운천동 신라사적비'다. 비문은 완전한 문장으로 해석되는 것은 거의 없으나 불교찬양, 왕덕 칭송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신라 중심의 세계관도 엿보인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설의 위치를 확보한 것은 아니다. 비문 판독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멈춰서 있다. 대신 이 비가 3면 비인가, 아니면 4면 비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완전히 해소되고 있지 않다. 지난 1989년에
올 청주 신봉동백제고분군 발굴 30주년을 맞아 한일 고대역사 학자들 사이에 때아닌 '청주고대사 논쟁'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 논쟁은 한·일 고대사 성격상 휘발성을 지닐 수 밖에 없어 첨예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청주시가 주최하고 충북대 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백제학회 등 3개 단체가 주관하는 신봉동백제고분군 발굴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18-19일 이틀간 충북대와 청주박물관에서 열린다. 충북대박물관은 지난 1982년부터 2003년까지 6차에 걸친 신동봉고분군 발굴을 통해 360여기의 고분과 철갑, 마구, 토기 등 다량의 유물을 수습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일본측 참가자인 후쿠오카대학 다케스에 쥰이치 교수는 '신봉동고분군에서 보이는 일본문화계 요소' 제목의 발표문을 통해 "5세기 후반 청주의 백제군에 왜 무사집단도 함께 구성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당시 신봉동고군분에서 일본계 문화요소인 '스에키'(須惠器) 토기가 발견된 점을 들었다. 다케스에 교수는 "당시는 백제, 가야, 왜가 남하하는 고구려에 연합으로 대항하던 시기였다"며 "신봉동고분군은 순수한 백제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가야와 왜인까지 포함된 국제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존재
[충북일보] 전교조 충북지부와 전국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충북소방지부·충북교육청지부는 19일 "정부는 공무원 생존권 보장을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무원 임금은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2023년 기준 83.1%까지 하락해 역대 최대로 격차가 벌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한국행정연구원의 지난해 공직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직무 만족도는 하락하고 이직 의향은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며 "5년 이하 재직 공무원의 72%, 6∼10년 재직 공무원의 75%는 이직 의향의 이유 1순위로 '낮은 보수'를 꼽았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실질임금이 삭감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라며 "정부는 내년도 공무원 임금을 6.6% 인상하고, 공무원 임금이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100%에 도달하도록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집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기본급 인상과 함께 공무원 하위직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액급식비 3만 원 인상, 6급 이하 직급보조비 3만5천 원 인상, 초과근무수당 단가 감액률 인상, 명절 휴가비·인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의 핵심 전략이자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클러스터 구축이 추진될 전망이다. 도내 반도체 기업이 집적화한 지역에 조성해 충북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충북도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계획 수립을 위한 기획 연구용역에 들어갔다고 19일 밝혔다. 용역 기간은 오는 11월까지 6개월이다. 용역을 맡은 업체는 충북 지역 반도체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분포와 국내외 반도체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도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다른 시·도의 우수 사례 등을 통해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충북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의 필요성과 논리를 개발한다. 클러스터 지정에 따른 전략과 로드맵을 마련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핵심 분야 선정과 산업 생태계 강화 전략도 수립한다. 경제적·정책적 타당성을 분석해 당위성을 검토한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와 기회발전특구와 연계하는 방안도 살펴본다. 가속기는 청주 오창에 구축 중이며 특구는 지난해 11월 제천과 보은, 진천, 음성 지역의 5개 산업단지가 지정됐다. 면적은 109만6천500평(362만4천986.2㎡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