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과 관련된 충북 최초의 시위는 청주지역 학생들이 아닌, 충주고 학생들에 의해 충주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따라 충주고 학생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은 청주 상당공원의 '충북 4.19혁명 기념탑'은 자칫 역사를 오도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본보는 제 53주년 4.19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현존하는 한국기록원 자료와 당시 신문기사 등을 면밀히 살펴봤다. 그 결과, 4.19혁명과 관련된 충북에서의 최초 시위는 청주지역 학생들이 아닌, 충주고 학생들에 의해 1960년 3월 10일 처음으로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전국 시위현황을 기사화하면서 1960년 4월 25일자 2면 기사를 '3월 10일 忠州에서 충주고교생 3백명이…'라고 적었고, 4.19관련 다른 단체의 자료에서도 같은 내용이 발견됐다.(그림참조) 충주고 학생들의 이같은 시위는 대구, 서울, 대전 등에 이은 전국 4번째로,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던 마산지역 시위(3월 15일)보다 닷새 정도 이른 것이다.(표참조) '충고 60년사'와 '충주시지' 등은 3월 10일을 전후한 당시 충주고 학생들의 시위 촉발 원인과 시내진출 과정을 보다 상세히 기록해 놓았
금년은 개화기 때 저온현상이 찾아오면서 청주 무심천 벚꽃이 비교적 오랫동안 만개한 상태를 유지했다. 본보는 4월 8일자 기사에서 무심천 벚꽃의 근현대사를 다룬 적이 있다. '1914년(대정3) 3월에는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하여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일대에 벚꽃을 식재….' 그러나 당시에는 지면 관계상 청주 연혁지 내용을 모두 소개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로는 성서정(城西停)의 제방, 동으로는 성동정(城東停)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뭇가지를 꺾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나서 몇 년이 되지 않아 개화를 보게 되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성서정'과 '성동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성서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북주내면 서리(西里)와 원리(院里) 지역으로, 지금의 서문동에 해당한다. 성동정은 개명 전에는 청주군 동주내면으로, 지금의 문화동 일대가 된다. 나머지 내용을 계속 소개하면 '만약 그것이 한 꽃이 피는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긴 제방에 많은
15세기 후반 충주 수안보에 온천 기능이 완전 마비될 정도의 대홍수가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5일 충주시는 직영하고 있는 수안보 하이스파 건물 3층에 '수안보온천 홍보관'을 마련키로 하고 이날 설명회와 함께 용역참여 업체의 발표회를 가졌다. 이와 관련, 본보는 수안보 역사를 보다 상세히 살펴보기 위해 현존하는 사료를 인터넷 키워드 방식으로 검색했다. 그 결과, △고려사의 관련 내용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 일화 △연려실기술, 오주연문장전사고, 용재총화 등의 내용 △수안보온천을 직접 읊은 시 등 다양한 사료를 접했다. 이중 압권은 사림파 거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지은 '浴安保溫泉'(안보의 온천에서 목욕하다)라는 한시로, 점필재집의 서문에 이 시를 짓게 된 동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요약하면 △병신년(1476년 추정)의 여러 달 비로 수안보에 대홍수가 있었고 △이로 인해 '해사'(관공서 건물 지칭)의 우물이 무너졌으며 △이때 온천옆 민가 10여호도 사라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종직이 지은 '浴安保溫泉'은 이를 운문으로 적은 것으로, 칠언절구 형식을 하고 있다. 대홍수 후의 수안보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담장과 집 무너지고 샘은 곧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구입석리에서는 작년부터 시금까지 사입여호 인구 1백60여명이 철가 도주하였다. 대개는 도 기본림을 화전으로 경작하여 오다가 연년히 당국에서 화전을 엄금하고 화전지대 식수를 함으로 생도들 잃은 그들이 살아갈 도리가 없음으로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정든 고향을 등진 것이다.'- 비슷한 시기로 일제 강점기인 1935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등장한다. '들에서 살어보랴고 애를 써도 살갈이 막연하기 때문에 금칙을 범하여서까지라도 살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산에 들어가서 미림을 소실하야 연맥, 마령서, 속등 등의 잡곡을 가라먹는 무리가 있으니 그것이 화전민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나라 화전의 역사는 질곡 그 자체였다. 이는 그 만큼 산림이 녹화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가 벌거숭이산을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었다. 당시 '선조림 후벌채', '1벌2식', '추풍령식 벌채' 등의 구호가 유행했다. '선조림 후벌채'는 먼저 나무를 심고 그후에 벌목을 한다는 것을, '1벌2식'은 나무 1그루를 베면 반드시 2그루를 심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밖에 '추풍령식 벌채'는 산에서 벌
지구 온난화로 식목 적기를 더 앞당겨야 한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고 있다.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일년 중 양력 2월 하순~3월을 식목을 적기로 봤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산림경제'를 지는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연원역 찰방과 단양군수를 역임했다. 농서인 산림경제는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식목의 적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식목은 정월(正月)이 상시(上時)이고, 2월이 중시(中時)며, 3월이 하시(下時)다'- 쉽게 설명하면, '식목은 음력 정월이 가장 좋은 때이고, 2월이 그 다음이며, 3월이 그 중 처지는 때가 된다' 정도가 된다. 물론 이때의 정월은 음력 한 달을 얘기하는 것으로, 지금의 양력으로 치면 3월 초순 정도가 될 수 있다. 그는 또 나무를 심은 후의 관리 요령에 대해서도 지금과 부합되는 내용을 서술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나무의 뿌리는 편안하게 뻗기를 원하고, 배토(培土)는 평평하기를 바라며, 토양(土壤)은 원래 서 있던 곳과 같기를 원하고, 구덩이는 단단히 메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모종은 어린 자식 다루듯 하되, 놓아두면 천성대로 저절로 자란다'라고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렸던 독립운동가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연구논문과 자료가 처음으로 집대성돼 출간됐다. 충북대학교 사학과 박걸순 교수가 국내외 지역 자료수집과 분석 등 6년여의 노력 끝에 '독립운동계의 '3만' 정순만' 자료집을 최근 경인문화사 이름으로 발간했다. 670여쪽 방대한 분량의 이번 책은 사진·논문·자료편 등 3부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이중 일제의 비밀문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또 선생의 아들 정양필과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독립운동가로 포상된 며느리 이화숙에 대한 자료도 첨부돼 있어, 사료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정순만은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하동정씨 집성촌에서 출생하여 독립협회, 상동청년회 등에서 간부를 역임하고 을사오적 암살 기도 등 한말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이 불가능하자, 1906년 봄 이상설·이동휘 등 동지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서 북간도 용정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서 그는 이상설 등과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설하고 동포 자제들의 교육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1907
청주 무심천 벚꽃이 절정을 맞고 있다. 지금의 무심천 벚나무는 언제, 누가, 어떤 동기로 심을 것일까. 무심천 벚나무는 처음 심겨진 후 세번의 수종 갱신이 이뤄지는 등 그 자체가 청주 근현대사의 일부가 되고 있다. 청주 무심천에 벚나무가 처음 심겨진 것은 1914년이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발간한 '청주연혁지'는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1914년(대정3) 3월에는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하여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일대, (…) 동으로는 성동정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정삼철 역) 청주연혁지는 이어지는 내용을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무가지를 꺽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나서 몇년이 되지 않아 개화를 보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또 '만약 그것이 한번 꽃이 피는 시기에 접어들면 긴 제방에 많은 가지에서 휘늘어진 꽃송이가 흰 구름이 낀 것 같고 어떤 때는 눈같아 보이기도 하였다'라고 썼다. 그러나 당시 벚나무를 심은 주체인 '청주 청년회'가 순수 내국인인지, 아니면
'이는 삼가 경모궁(景慕宮)에 나무를 심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궁 안 동산으로부터 주변 사방 산들에까지 모두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녹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었는데 궁관(宮官)에게 명하여 심은 나무의 총 숫자와 살아 있고 죽은 나무의 실제 수효를 매 계절 초하루에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여 아침저녁으로 살펴보는 자료로 삼아 어버이를 공경하는 소자의 뜻을 붙였다.'- 정조가 경모궁에 나무를 친히 심고 이의 소감을 적어놓은 글이다. 홍재전서는 정조의 시문집으로, 그 분량이 184권 100책일 정도로 방대하다. 이처럼 조선시대도 나무심기 행사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임금들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사찰에서 기념식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말년을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보낼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그도 손수 나무를 심으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도 그런 성향을 지녔다. 하나의 사료 안에서 두 사례를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어필각(御筆閣)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직접 심은 소나무를 봉심하고, 각 불각(佛閣)과 양어장, 온천 약수 등
지금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창업(創業)이라고 한다. 그러나 창업은 본래는 건국(建國)을 의미했다. 때문에 나라를 맨 처음 세운 임금을 '창업지주'(創業之主)로 표현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이른바 '즉위 교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지금으로 치면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마스터 플랜 정도가 된다. 이성계는 오랫동안 야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치에는 둔감한 편이었다. 때문에 실록을 보면 정도전이 '즉위 교서'를 써서 태조에게 발표하도록 한 것으로 돼 있다. 즉위 교서는 17개 항목으로 되어 있고, 향교와 관련된 내용은 이중 세번째 기술돼 있다. 이는 조선의 창업 주역들이 교육을 '백년지대계'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무 두 과거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과 지방에는 향교에 생도를 더 두고 강학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좌주'는 과거시험 때 시험감독관을 일컫는 표현이다. 교육의 중요성이 즉
원나라 밀교의 영향을 받은 범자문 와당(瓦當)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도 사찰문화의 하나로 여전히 수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와당 암·수막새를 미술사적으로 분류를 하면 시기별로 일정한 특징을 보인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한국기와학회(회장 장준식·충청대 교수) 제 17회 연구발표회가 지난 30일 충청대 도서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세종대학 이상규 학예사가 '고려-조선시대 범자문 와당 연구'라는 흔치 않은 주제의 발표를 했다. 특히 이날 발표 내용에는 영동 영국사지, 충주 숭선사지, 청룡사지 등에서 출토된 와당도 다수 소개돼 지역적인 관심을 함께 끌었다. 발표문에 따르면 고려 12세기에 처음 등장한 범자문양 와당은 양주 회암사지, 강화 선원사지, 영동 영국사지, 충주 숭선사지·청룡사지, 서사 보원사지, 예산 수덕사, 보령 성주사지 등 전국 14개 유적에서 출토됐다. 이와 관련해 와당 중 수막새의 문양을 분석한 결과, 범자+일휘문(A형), 범자+연와문(B형), 범자 단독문(C형), 범자+기하문(D형), 범자+운학문(F형) 등 6개 유형으로 대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휘문은 태양이 빛나는 문양을 말한다. 이 학예사는 이에 대해 "A형이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