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벌 잡아먹는 벌'로 불리는 '등검은 말벌'(Vespa velutina nigrithorax)이 이미 충북지역에도 유입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환경부는 최근 등검은 말벌에 대한 주의보를 발표, "지난 2003년 부산 영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2012년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경북지역, 북쪽으로는 강원도 삼척까지 확산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등검은 말벌은 기존의 그 어떤 국내 말벌류보다도 도시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으로 도시지역 피해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실제 2010년에는 부산 금정구에서 말벌류 피해에 의한 119 구조대 출동 중 등검은 말벌이 4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환경부의 이날 발표와 달리 도내 양봉 업자들은 등검은 말벌이 지난해부터 충북지역에서도 관찰되고 있다고 밝혔다. 청원군 낭성면 김대립 씨는 "지난해 분명히 등검은 말벌을 유관으로 봤고, 금년은 아직 출현빈도가 낮으나 8~9월이 되면 개체수가 현저히 많이 관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이유에 대해 "등검은 말벌 애벌레는 8월부터 먹이 섭취량이 크게 늘어난다"며 "따라서 이 시기가 되면 등검은 말벌은 토종, 서양벌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우암의 생가지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을 지나 영동으로 가는 국도변인 원동리 야산에 이르면 작은 무덤과 비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비석 제원은 높이 86cm, 폭 41cm, 두께 17cm의 화강암이다. 비문에는 '贈 領議政 睡翁宋公(증영의정수옹송공) / 乳母憲菲之墓(유모헌비지묘) / 子姜수文墓在左(자강수문묘재좌) / 崇禎六十一秊 二月立(숭정육십일년이월입)'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영의정으로 증직받은 수용 송공의 유모 헌비의 묘소이다 / 그의 아들 강수문의 묘소는 좌측에 있다 / 숭정 61년 늦은 2월에 세우다' 정도가 된다. 전회에 우암 송시열의 부친이 송갑조(宋甲祚·1574~1628)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선조~인조 연간을 살면서 광해군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수재형 인물이었다. 그러나 과거합격 직후 인목대비를 배알했다는 이유로 유적(儒籍)에서 제적됐다. 그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그는 강골의 겸비한 문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송응기(宋應期)로, 이윤경의 딸인 광주이씨를 아내로 맞았다. 그는 연약한 몸으로 다섯번째 아들인 송갑조를 출산한 후 몇년 지나지 않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같은 환경에서 송
35. F기관과 말레이의 하리마오 ■ 하리마오란 말이 유행한 까닭 일본제국의 침략 수법은 비슷했다.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청에서 떼어낸 다음 보호국으로 만들고 국권을 탈취해서 '무단통치'로 억눌렀다. 타이완은 청일전쟁 노획품으로 청에서 할양받아 '엿과 채찍(飴와 鞭)'으로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 간 다스렸다. 중국 동북지역은 관동군이 침략해서 중국에서 독립시킨다며 만주국을 세운 뒤 '모략과 폭력'으로 1932년부터 1945년까지 13년 간 지배를 했다. 동남아에서도 똑같은 수법을 썼다. 일본군의 말레이반도 공격은 진주만을 기습한 6시간 후인 1941년 12월 8일 새벽 1시 30분(한국시간)에 전격 개시하였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었다. 이것을 일본에서 자존자위(自存自衛)를 위한 전쟁이면서 식민지해방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동남아 여러 나라를 침공하고 펼쳤던 모략전쟁을 구미열강의 식민지를 분쇄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이런 거짓말을 반복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세뇌될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스스로 자기 말에 최면이 되기가 쉽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일본사교육이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송시열의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1574~1628)라는 인물이다. 그는 선조~인조 연간을 살면서 광해군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수재형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소과의 일종인 생원시는 지금으로 치면 논술, 진사시는 경전해석을 묻는 시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한 직후 송갑조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같이 합격한 동과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목대비를 찾아 혼자 배알, 즉 인사를 했다. 당시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친모이나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서궁에 유폐된 상태였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인목대비를 찾았다는 것은 여간한 강골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즉각 파문이 일어났다. 이영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과거합격 동기생들이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운동에 나섰다. 실록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갑조(宋甲祚)가 정사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나서 혼자서 서궁에 숙배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흉도들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며 많은 선비들을 협박하였는데, 갑조가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므로, 흉도들이 그의 성명을 탐문하여 중상할 계획을 쓰자….'- 송갑조는 이같은 분위기에 고분고분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도
괴산지역의 올갱이국은 특유의 쌉싸레한 맛 뿐만 아니라 건강식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올갱이국을 가열할 때 우러나는 파란색의 액즙은 간(肝) 건강에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영양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공감, "아미노산을 많이 함유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영양학계는 올갱이국에는 부추 또는 아욱이 궁합이 맞는 식재료라고 말하고 있다.올갱이는 음양상 찬 성질을 지니고 있는 반면 부추와 아욱은 따스한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둘을 함께 조리할 경우 궁합을 이룬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괴산 올갱이국과 관련해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것은 '올갱이'를 표현하는 언어가 무척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올갱이'류의 표현은 충청도나 강원도 일부 지역의 사투리로, 표준말은 '다슬기'다. 그러나 변종언어인 '올갱이'는 괴산지역에서 그 생김새와 모양에 따라 또 한번 세분돼 불려지고 있다.괴산지역에서 올갱이를 잡는 사람들은 껍데기에 오돌토돌한 작은 융기가 있는 것은 '까끌이', 껍데기가 다소 맨질맨질한 것은 '뺀질이'. 그 중간의 것은 '반까끌이', 약간 둥그스럼한 것은 '사발이'라고 표현한다. 이중 '뺀질이'는 물 흐름이 빠른 계곡에서,
속보= 6.25 미군 노획 편지 중 받는이(수취인)의 주소가 '충북'으로 돼 있으면서 현재도 생존해 있는 인물이 확인됐다. 본보는 이번 보도건을 마무리 짓는 차원에서 이미 기사화한(6월 10일, 14일, 19일자) 발신인 뿐만 아니라, 수취인 12통의 편지 주인공도 탐문·추적했다. 방법은 전과 같이 주민센터를 통해 지인을 연결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미군이 평양에서 노획한 편지 중 '충북'이 수취인 주소인 인물은 최수철(청원 강서), 이순섭(〃), 이순옥(〃), 전종옥(〃), 리덕기(음성 맹동), 김성래(진천 당부), 김성해(〃), 원영히(단양 보안대), 황호연(청원 강서), 최석영(청원 오창), 문관분(음성 대소), 이원상(충주) 등이다.그 결과, 12명의 한 명인 '이순옥' 할머니가 당시 수취인 주소지(충북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에서 가까운 세종특별시 조치원읍 침산리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금년 76세. 이순옥 할머지의 본래 이름은 '이순교'이나, 이는 발신자 전종대(전남 여주 거주) 옹이 1950년 9월 평양에서 편지를 쓸 때 나이 차이(10살)가 많이 나 이름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나머지 수취인 가운데 △최수철, 전종옥
얼마전 형식이 다른 본보의 기사를 통해 조선 세종 때 한양도성을 수축할 당시 충청도 사람도 총 5만6천여명이 동원됐고, 이때 이들이 새긴 각자(刻字) 성돌이 10개 가량 현존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전국적으로는 32만2천400여명이 동원됐다. 조선시대 인구를 감안하면 이같은 규모는 전국 모든 장정들이 총동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경상도에서 가장 많이 동원됐고 충청도는 그 다음인 17%를 차지했다.충청도 각 고을에서 동원된 수축군은 지금의 혜화문-낙산-흥인문 구간을 맡았다. 성돌에 지명을 새긴 것은 사후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더러 등장한다. '선지하기를,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수보(修補)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대의 한양도성 수축공사는 농번기가 끝난 겨울철에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토목공사를 주도한 인물은 세종이 아닌 상왕 태종이었다. '도성 수축 도감에서 계하기를, "성을 쌓는 군사가 도망하는 자는, 처음 범하면 곤장 1백 대를 치게 하고, 두 번 범하면 참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태상왕이 그대로
속보= 충주 중앙탑(공식명칭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 6호)이 일제가 엉터리로 해체·조립한지 98년만에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앞서 본보는 해체 직전인 1916년에 작성된 중앙탑 원형 실측도가 국가기록원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 지난 < 2012년 8월 13일자> 기사에서 이를 바탕으로 할 경우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19일 지역 문화재계에 따르면 충주시는 총 30억원의 예산을 들여 오는 2015년까지 중앙탑을 본래 모습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첫 단계 사업으로 중앙탑을 정밀측량, 이를 3D(입체) 스캔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업체 선정작업에 들어갔다. 시 관계자는 "3D스캔사업의 입찰금액은 6천9백만원으로, 도·시비외에 문화재청 보조금도 포함돼 있다"며 "도내 기업 중에는 응찰자가 없어 조만간 입찰 범위를 전국으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충청대학 장준식 박물관장과 대전대 이달훈 교수 등 국내 석조미술 전문가들은 일제가 지난 1917년 엉터리로 해체·조립한 중앙탑에 대해 △4개 면의 탱주 숫자와 면석의 간격이 일정치 않고 △기단 갑석의 경우 부분적으로 다른 석질의 부재라고 밝혔다. 두 전문가는 또 △
괘서(掛書)는 남을 모함하거나 나라를 비방하는 내용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붙이거나 투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괘서 행위는 대부분 익명으로 행해지면서 선량한 사람을 무고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고 따라서 조선조정은 괘서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괘서사건이 전국적으로 42건이나 발생했다. 이런 괘서사건은 순조 이후 특히 많이 일났다. 순조가 11살 나이에 등극하자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이후 성장한 순조가 직접 정치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장인 김조순(金祖순·1765∼1832)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절대 부패해졌고,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갖지 못하면서 유랑민이 되는 등 국가 말기적 현상이 나타났다. 전회에 청주읍성 북문에 괘서를 붙인 김치규(金致奎)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본래 청주사람은 아니었다. 김치규는 평안도 중화 출신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충청도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고장 청안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청안 토호였던 이원기(李元基) 집에 기거하며 그의 아들 훈장 노릇을
조선 세종대의 한양도성 수축공사에 충청도 사람이 총 5만6천여명이 동원된 가운데 이들이 새긴 각자(刻字) 성돌이 10개가량 현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민덕식 전국사편찬위원화 교육연구관이 충북사학 제 27집(발행인 충북대 신영우 교수)에 '충청인들의 서울성곽 축성관계 금석문'(부제: 세종4년 축성을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했다.논문에 따르면 조선의 수도인 한양도성은 태조 4년(1395) 처음 축조된 후 27년만인 세종4년(1422)에 나머지 구간을 수축하게 된다. 이때 8도가 전구간을 배분해 맡은 가운데 충청도 각 고을에서 동원된 수축군은 지금의 혜화문-낙산-흥인문 구간을 맡았다.이 구간은 풍수상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왕산이 있는 우백호에 비해 지맥이 다소 낮고 거리가 짧은 입지환경을 지니고 있다.논문에 따르면 이 구간 성벽수축 공사에 동원된 충청도 수축군은 총 5만6천1백여명으로, 이는 당시 전체 동원인력 32만2천400여명의 17%에 해당하는 수치다.충청도 수축군은 39일간 진행된 성벽공사에서 태조 때 쌓은 744척(약 227m)을 제외한 5천256척(1,627m)을 새로 쌓았다.이때 동원된 충청도 각고을의 수축군들은 'OO 구간은 우리가 쌓았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