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우암산 토성에서 발견된 마형대구(馬形帶鉤)와 청동방울(馬鐸)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호서문화유산연구원(원장 이규근)의 17일 발굴내용 발표와 관련, 많은 언론들이 '우암산에서 대규모 토성 확인'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보도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초기철기(원삼국기) 유물인 마형대구와 청동방울이 고지인 우암산에서 발견된 사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마형대구와 말 장식용으로 추정되는 청동방울은 주로 고대 무사계급이 사용했던 유물로, 당시 일대에 강력한 권력집단이 주둔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암산 토성에는 백제초기 청주지역의 치소(治所)내지 치지(治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청주역사 여명기의 권력집단은 평지가 아닌, 산중에 상주했다는 논리로 연결되고 있다. 지금까지 백제를 포함한 삼국시대 청주의 치소와 관련해서는 상당산성설, 우암산 토성설, 청주읍성(현 성안길) 일대설, 부모산성설 등이 있으나, 어느것도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해왔다. 반면 지역 또 다른 전문가는 "이번에 발견한 우암산 토성을 백제초기 치소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대신 고지성(高地性) 취락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매우 많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3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 추천석 설화다. 충청도 진천에는 양순한 추천석이, 반면 경기도 용인에는 심술많은 동명이인의 추천석이 살았다. 이에 염라대왕이 심술많은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으나 사자는 엉뚱하게 진천의 추천석을 잡아왔다. 따라서 생환시키려 했으나 진천의 추천석은 이미 장례를 치른 뒤였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와 진천 추천석의 혼을 넣어 환생시킨 후 용인에서 살게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설화다. 두번째는 개가한 여인에 대한 설화다. 이 여인은 개가 전에는 진천에 살았으나 남편과 사별하자 용인에 살면서 역시 아들을 낳았다. 이후 양쪽이 서로 모실려고 하자 관가에서 "어머니 생전에는 진천에서 모시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제사로 모셔라"라고 판결했다. 세번쩨 설은 진천과 용인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됐다. 진천은 예로부터 미질(米質)이 좋기로 유명하다. 반면 용인은 산세가 순후에 풍수적으로 명당이 많다고 소문나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묘소도 용인에 위치한다. 그래서 생겨난 표현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것
본보는 지난 11월 15일자에서 '진천서 나온 고문서, 근래 최고의 가치' 제목의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이들 고문서류는 채 해독이 끝나지 않아, 전체 6백여점의 내용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아직 어렵다. 그러나 이들 유물에는 임진왜란 이전 것도 포함돼 있고 또 일기, 고한글 간찰, 분재기(재산 나눔 기록), 구한말 희귀사진도 있는 등 공개 자체가 화제가 됐었다. 평산신씨 충헌공(신잡) 종중의 총무인 신동석(51·사진) 씨를 만나 △유물을 공개한 배경 △그 동안의 보관 방법 △앞으로의 바람 등을 들어봤다. - 종중 전체의 의견으로 충북대 사학과에 고문서류 해독을 의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유물이 자연히 공개됐는데, 이 시점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평산신씨 지칭) 문중이 보관해 왔지만 한번도 '우리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든 역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유물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문중에서 계속 보관하는 것은 늘 한계가 있다." - 유물의 내용도 무척 다양한 편이다. 어떤 방법으로 보관해 왔나. "처음에는 진천 논실의 평산신씨 문중 차원에서 보관했다. 그러
보은산업단지 조성 부지인 삼승면 상가리 24-1 현장에서 구석기~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와 유물들이 매우 다양하게 출토됐다. 특히 구석기 문화층과 청동기시대 집터는 보은지역에서는 처음 발굴된 것이어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은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찍개와 ↑개 등이 포함된 구석기시대 문화층과 함께 청동기시대 주거지, 석관묘, 원삼국시대 토광묘, 삼국시대 옹관묘,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조선시대 토광묘, 회곽묘 등 총 90여기의 주거와 분묘 유구를 발굴했다. 이 과정에서 청동기 전기의 '가락동형' 집터와 청동기 중기의 '송국리형' 집터가 발견됐고, 유물로는 청동기시대의 석검, 석창, 석촉과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 등도 발굴됐다. 이밖에 조선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회곽묘에서는 양태가 양호한 인골도 확인됐다. 우원장은 "보은지역에서 구석기유물과 청동기 집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보은지역 선사~역사시대 생활상을 복원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 이론상 청동기 집터는 장방형의 '가락동형'과 타원형의 '송국리형'으로 대별되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유한인보' 제 7호에는 충북을 주소로 두고 있는 포로 수용자들이 정확히 63명 등장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당시 청주군이 31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영동 11명, 옥천 6명, 제천·보은 각 4명, 괴산군 3명 등의 순이다. 이중 오창면 주소자가 무려 12명이나 되는 점은 향후 학계가 연구해볼 대목이다. 도내 출신을 포함한 당시 3천명의 조선인 징병자들은 주로 남양군도(南洋群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남양군도는 마샬, 마리아나, 캐롤라인, 길버트, 뉴기니아 등 태평양 적도 부근에 있는 여러 개의 섬을 일컫는다. 1940년대 미국과 일본간에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필리핀, 하와이 그리고 남양군도 등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나 이후 전열을 다시 갖추면서 1943년에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고, 이후 제해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1943년 11월에는 남양군도의 하나인 길버트 섬, 1944년 2월에는 먀살군도, 6월에는 사이판 섬에 상륙해 일본군을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최전선에 배치됐던 우리나라 징병자들도 대거 미군의 포로로 잡히게 됐다.
얼마전 지역 한 일간지가 '자유한인보 제 3호' 발견을 보도했다. 자유한인보는 태평양 전쟁 때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사람들 3천명 가량이 하와이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제작한 주간 소식지를 말한다. 한국인 포로들은 1년 6개월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제 7호까지 소식지를 만들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제 3호 복사본이고 마지막 호인 제 7호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종전과 함께 종간된 '자유한인보'에는 미국 하와이 포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 등이 기록돼 있다. 가령 제 3호에는 당시 함께 포로생활을 하던 이탈리아 포로들과 축구시합을 했고, 그 결과 3대 5로 졌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밖에 귀국하면 어떤 나라를 건설한 것인가, 또 미군에 대한 고마움 등의 내용이 실려있으나 이중 후자는 다소 의외다. 자신을 포로로 잡고 있는 적국에 대해 고마움을 갖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정서상 맞지 않는다. 당시 미군은 한국 포로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한국인 포로 3천여명은 8명이 한 조가 돼 천막에 수용돼 있었다. 즉 당시 하와이 지역에는 한인 포로를 수용한 천막이 3백70여동 가량 들어서 있던 셈이다. 난민
충북 음성군 원남면이 고향인 최병식(61·사진) 씨는 21년째 백제사, 그것도 백제부흥 운동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따라서 운영하는 출판사 이름도 백제부흥 운동의 마지막 장소의 하나로 비정되는 '주류성'으로 했다. 백제부흥 운동이 벌어졌던 곳은 주류성과 임존성 등 두 곳으로, 이중 주류성이 위치에 대해서는 서천군 한산면과 세종시 전동면 운주산성 등의 설이 제기돼 있다. 그러나 그는 운주산성이 주류성이고,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던 왕자 부여풍은 운주산성에서 공주 방향으로 3㎞ 정도 떨어진 비암사에 머물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같은 확신하에 벌써 20년째 운주산성에서 백제 마지막 의자왕의 원혼을 달래는 고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 운주산성을 백제부흥 운동의 근거기 하나인 주류성으로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일본서기는 주류성에 대해 '백강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해 농사지을 수 없는 곳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운주산성이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도 '주류성은 연기군에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 주류성과 인연을 맺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지난 1992년 운주산에 올랐습니다. 정상
조선시대 수령들이 임지에 나가서 힘써야 할것으로 7가지가 있었다. 이른바 '수령칠사(守令七事)'로, 여기에는 '호구증(戶口增)'도 포함돼 있다. 인구를 많이 늘리라는 뜻이다. 나머지 칠사는 농상(農桑)을 성하게 할 것, 학교를 일으킬 것, 군정을 닦을 것, 부역을 균등하게 할 것, 소송을 간명하게 할 것, 서리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고칠 것 등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구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아를 언제부터 사람으로 봤느냐는 점이다. 경국대전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무릇 구타로 태아가 사망한 것과 수태후 90일 초과한 것으로 형체가 이뤄진 것이면 타태죄(구타에 의한 낙태죄)로 처벌한다. (그러나) 수태후 90일 이내로 태아의 형체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는 구타상해로 논죄하지 타태죄로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이상에서 보듯 90일 전의 태아는 사람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아닌 '잠재적인 인간'으로 인식했다. 전통시대 역대 권력자 중 임산부를 가장 이해한 임금은 세종이었다. 정말 그랬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종은 노비가 임신을 했을 경우 노비부부 모두에게 출산휴가를 주도록 했다. 세종실록 26년
조선시대 인구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문헌으로 '호구총수'(戶口總數)가 있다. 편찬 시기는 다소 불명확하나 대체로 1789년(정조 13) 규장각에서 한성부의 기록을 기초로 9책 분량으로 간행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 1책은 1395년(태조 4)부터 1789년까지 전국의 호구 총수와 1789년 한성부의 인구 상황을 기록했다. 그리고 제2∼9책은 1789년 각 도의 인구 상황을 경기도·원춘도(原春道)·충청도·황해도·전라도·평안도·경상도·함경도 순으로 기재했다. 충청도의 인구 변화에 대한 흐름은 제 4책에서 만날 수 있다. '호구총수'를 보면 1789년 충청도의 인구수는 86만8천2백19명으로 전국 11.7%를 차지했다. 반면 전라도는 122만2천8백4명으로 전국 16.5%의 인구 분포도를 보였다. 이밖에 경상도는 159만9백73명으로 21.5%의 분포도를 보였다. 하삼도의 이같은 인구 추이는 얼마전까지 계속 됐다. 그러다가 세종특별시의 도시 기능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충청권이 호남권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충청권의 인구가 호남권을 근소하나마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금년 5월쯤이었고,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벌이지고 있다. 안행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월 말 현재
우리 눈이 가로로 넓듯이, 읽는 것 역시 가로 문장이 편한 구조로 돼 있다. 한글은 초·중·종성이 한데 모아져 하나의 글자를 형성하기 때문에 가로로 써야 훨씬 능률적이다. 한글의 이런 특장은 IT와 최고의 궁합으로 결합하고 있다. 한글이 갖는 무궁무진한 자모음의 조합성과 인체 구성에 맞는 가로쓰기는 한글을 IT시대의 최강 문자, 그리고 한국을 IT 최강국으로 만들고 있다. 근현대 한글의 역사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주시경과 최현배(崔鉉培·1894~1970) 선생이다. 주시경이 한글문법의 뼈대를 세웠다면, 최현배는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이론을 완성하고 실천했다. 국내 유력 일간지들은 90년대 중반까지도 세로쓰기를 고수했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은 그보다 50여년 앞선 지난 1946년 '한글가로글씨연구회'를 만들었고, 70년대는 '한글전용'을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 8월 최현배 선생이 청원의 궁벽한 마을인 초정약수를 이례적으로 찾았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 청주지국장인 김동환의 초청으로 '청남학교'에서 한글강습회를 가진 후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가 이날 쉽지 않은 발길을 한 것은 '초정약수=한글의 성지'라는 의식을 굳건히 갖고 있었기 때문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에서 베이커리나 카페 등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