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여류시인인 이옥봉(李玉峰·?-?)을 소실(첩)로 맞은 조원(趙瑗·1544-1595)은 수재형 인물이었다. 그는 명종대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선조대에는 별시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이 부분은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는 시문에도 능해 빼어난 한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지은 시중에 '별원즉사(別院卽事)'가 있다. 봄날의 서정이 잔물결이는 물가를 지켜보듯,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묘사돼 있다. '정원의 실바람에 제비 나직이 날고(庭院微風燕影低) / 배꽃 핀 방초 언덕엔 새들이 지저귀네(梨花芳··鳥啼) / 담 모퉁이에 지는 해 의당 늦은 봄이라(墻頭落日宜春晩) / 행원 서쪽에 붉은 꽃 요란히도 나부끼리(·亂飄紅杏苑西)'- 조선후기 실학작의 한 명으로 이덕무가 있고, 그는 '청정관전서'를 저술했다. 그는 이 문집에서 "이 시는 마치 만당(晩唐)의 시체(詩體)와 같다"고 평했다. 생소한 표현인 '만당'은 중국 당(唐) 나라의 말년의 시를 초당·성당·중당·만당 등 4시기로 구분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중 만당은 문종 이후 당말에 이르는 시기를 일컫는다. 조원의 시가 당나라 말기의 한시를 닮았다는 뜻이다. 조원의 시중 위와 같은 분위기를 풍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조선시대 여류시인인 이옥봉( 李玉峰·?-?)은 어머니가 천인이었지만 그녀의 몸에는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이봉(李逢, 1526~?)은 양녕대군의 고손자로, 호는 자운(子雲)이다. 그녀는 이런 혈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지녔고, 그같은 심리는 한시로 나타났다. 그녀 대표작의 하나로 '영월도중'(寧越道中)이 있다. 글자 그대로 강원도 영월을 가는 도중에 지은 한시다. '닷새는 강을 끼고 사흘은 산을 넘으며(五日長干三日越) / 슬픈 노래 부르다 노릉의 구름에 끊어졌네(哀詞吟斷魯陵雲) / 이 몸 또한 왕손의 딸이니(妾身亦是王孫女) / 이곳의 두견새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此地鵑聲不忍聞).'- 인용한 내용 중에 '노릉'과 '이몸 또한'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노릉은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의 능을 의미하고, '이몸 또한'은 자신도 그런 핏줄이라는 점을 강한 자의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녀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내용이 각종 자료에 공통적으로 서술돼 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시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역시 문재(文才)를 갖춘 남성를 따르고자 했다. 그 결과, 조원이라는 인물의 문재가 대단함을 알고 그의 소실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은 청동기에서 신석기시대로 소급하는 것이 가능할까. '고양 가와지 볍씨와 아시아 쌀농사의 조명'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가 얼마전 고양시에서 열렸다. 특히 이날 학술회의에는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와 충북도문화재연구원의 김정희 씨도 발표자로 참석, 지역학계의 관심도 끌었다. 현재 국내 고고학계는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 시점을 BC1천년 전쯤인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고, 교과서를 포함한 각종 역사서서도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국제학계가 지난 1976년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에서 발굴된 BC1천년전의 탄화미(炭化米)를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의 물질적인 증거로 보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선사고고학계는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에는 조·기장·수수 등 밭작물이 주로 재배됐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벼가 경작되기 시작했다고 봐왔다. 나아가 한반도 청동기 문화지층에서 자주 발굴되는 반달돌칼(반월형 석도)이 '한반도 벼농사 기원=청동기시대'의 또 다른 물질적인 증거로 여겨왔다. 이에 대해 이 명예교수는 이날 "지난 1991년 고양시 가와지 지구에서 출토된 2백점의 장립형(자포니카) 볍씨가 교란되지 않은 신석기 토탄층에
윷은 우리 민족이 정월에 즐겼던 고유의 민속놀이로, 다소 줄기는 했지만 지금도 촌로들은 이를 즐기고 있다. 윷놀이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정확한 정설이 없다. 다만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사희조(柶戱條)에서 '윷놀이를 고려의 유속(遺俗)으로 본다'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 당나라 이연수가 지은 북사( 北史)의 열전 백제조는 약간 다르게 기술했다. '투호·저포·배주·악삭 등의 여러 가지 오락이 있었는데, 특히 바둑을 좋아한다.(投壺 저(노름저)蒲 弄珠 握삭(쌍륙삭) 等雜 尤尙奕기(바둑기).'- 민속학자들은 이중 '저포'가 오늘날의 윷놀이와 유사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럴 경우 우리나라 윷놀이의 기원은 적어도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국어학자들이 만든 한국언어지도를 보면 윷에는 사투리가 존재한다. 우리고장 충북에서는 윷을 'ㅊ'받침의 윷으로 발음하고 있다. 이것이 표준말로 충청, 경기, 강원, 경상도 등 대부분의 지방에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라도와 제주도 그리고 거창, 산청 등 경남 일부 지방에서는 윷의 고어인 '숫'이나 '숯'으로 발음하고 있다. 이는 '무수'가 '무우'를 거쳐 '무'로, '가새'가 가위로 변한 것과 같은
조선시대 여류문인으로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에 못지 않은 여류 시인으로 16세기 인물인 이옥봉( 李玉峰·?-?)이 있다.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은 그의 작품을 매우 호평했다. 권응인(權應仁·1517-?)은 '송계만록에서 "옥봉의 시는 청원장려(淸圓壯麗)하여 부인의 손에서 나온 것 아닌 듯 매우 가상하다"라고 평했다. 인용문 중 '청원장려'는 맑고 모나지 않으며, 힘이 있으면서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허균(許筠·1569∼1618)도 학산초담에서 비슷하게 평가, "이옥봉은 그 시가 몹시청건( 淸健)하여, 거의 아낙네들의 연지 찍고 분 바르는 말들이 아니다"라고 했다. '청건'은 맑으면서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다양한 내용의 시를 남겼으나, 특히 임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운율로 잘 표현했다. 일반인에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고 서예대회 시제로도 자주 등장하는, '꿈속의 넋' 정도로 해석되는 '몽혼'(夢魂)이 있다. '요즈음 안부 어떠시냐고 물으신다면(近來安否問如何) / 달이 비친 사창에서 저의 恨도 많답니다.(月到紗窓妾恨多) / 만약 꿈속에 다닌 길 자취가 있다면(若使夢魂行有跡)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
통합시의 지명을 결정할 때는 여러 유형의 권력 중 기초의회 의원의 지역구 위치가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상대적으로 기초의원 수가 적은 쪽이 통합지명으로 결정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통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지명을 양보한 사례인 것으로 분석됐다. 경희대 지리교육과 지상현 교수에 따르면 지명은 지역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다른 곳과 구분짓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지명에는 장소를 특징짓는 요소로 위치, 색상, 풍토, 기후, 교통, 전설, 동식물, 유적, 유물 등 다양한 요소들이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두 지역이 통합돼 불가피하게 하나의 지명을 선택할 상황이 발생하면, 두 지역 사이에는 '자기 지명' 관철을 위한 격렬한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인구, 땅면적, 역사성 등 상대지역을 설득시키기 위한 다양한 논리들이 동원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기초의회 의원들이 수적 분포도인 것으로 분석됐다. 는 1994년을 기준으로 작성된 관련 기초의회의원의 분포도다. 1~7의 지역인 충주시(16), 남양주시(10), 강릉시(21), 보령시(11), 아산시(11), 구미시(24), 문경시(9) 등은 통합 상대지역인
연좌제(連坐制)는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제도를 말한다. 연좌제에 대한 동양 삼국의 첫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쓴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역사 50인의 모략가 중 한 명으로 진(秦)나라 상앙(商革+央)이 있다. 그는 국민을 10호·5호로 조직하여, 그 중 1인이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도 처벌하도록 아이디어를 냈다. 이른바 십오지제(什伍之制)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연좌제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전기부터 그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대 이효관(李孝寬)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 죄에 연좌되어 극형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당시 의정부가 이렇게 아뢴다. '대체로 죄인의 친딸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부가(夫家)를 따라 면죄하거늘, 하물며 효관(孝寬)은 외손(外孫)으로서 연좌되었사오매, 실로 근거가 없다 하겠으니, 바라옵건대…'-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났다. 그러자 고종과 민씨 일족은 즉각 연좌제를 발동, 개화파 가족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이때 김옥균의 생부인 김병태와 양부인 김병기는 삭탈관직
현재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묘는 일본 동경시내 아오야먀(靑山) 외국인 묘역과 진정사(眞淨寺) 경내, 그리고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무덤은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중국 상해에서 암살됐다는 소식이 일본열도에 전해지자 그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 1835-1901)를 중심으로 '김씨장의위원회'가 구성돼 장례가 치뤄졌다. 그러나 아오야마 묘는 김옥균 시신이나 의복이 매장되지 않은 단순 '위패묘'이다. 대신 묘비명은 존재하고 있고, 이를 지은 사람은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다. '오호,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때를 만나 비상한 공이 없이 비상한 죽음이 있었다. 시체는 고굴에 돌아갔어도 사지가 찢기는 욕을 당하였구나.'- 김옥균을 존경한 일본인 중에 카이군지(甲斐軍治)라는 사진사가 있다. 그는 1881년 김옥균을 처음 만난 이후 최후까지 정신·물질적으로 지원한 인물로, 자신이 죽을 경우 "김옥균 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김옥균의 묘를 동경 진정사에 조성한 인물이 바로 카이군지이다. 1927년 조선거류민단은 '청물어'(淸物語)라는 책자를
고종은 재위 33년(1896)에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전국 8도를 13도로 개편했다. 이에따라 충청도는 충청좌도로 불리는 곳은 대체로 충청북도, 충청우도로 일컬어지던 지역은 충청남도로 분도(分道)됐다. 충청북도는 2년 후면 시간적 마디의 의미가 무척 큰 2甲, 즉 정도(定道) 120주년을 맞게 된다. 충북도와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定道 2甲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충청도정자료집1'(사진)을 540여쪽의 비교적 방대한 분량으로 출간했다. 특히 이번 출간은 역사 안목이 있는 한 공무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만식(82) 옹은 1955년 첫발을 디딘 후 36년 동안 지방 행정직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관련 자료를 꼼꼼히 챙겼다. 최옹은 충북도청 고위직과 단양·보은군수, 제천시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자료집은 합격 및 발령 통지서, 각종 문서, 사무 인수인계서, 상장 및 감사장, 각종 수료증, 각종 위임장, 업무일지, 단체사진, 앨범사진 등 전체 9장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자료집을 한 쪽 한 쪽 넘기면 충북도정의 역사가 파노라마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중 눈길을 끄는 대목을 일부 살펴보면, 1982년 제천시장으로 발령된 최옹은 당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다면, 김옥균은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추구했다. 두 사상의 명칭은 다르지만, 한·중·일 삼국이 공존공영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옥균은 삼화주의에 대한 첫 번째 실천으로 당시 청나라 실력자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을 만나고자 했다. '百千의 호위가 있어도 죽을 때에는 죽는다. 인간 만사가 운명이다. 虎穴에 들어가지 않으면 虎子를 얻을 수 없다. 이홍장이 나를 속이고자 하여 겸양한 말로 맞이하며, 내가 그를 속이고자 하여 그 배를 탄다.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유배 지칭)된다면 즉각 끝이다. 5분이라도 담화의 시간을 준다면 내 것이다.'- 전집을 쓴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은 중국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로, 김옥균의 또 다른 일본내 후견자이기도 했다. 인용문 중에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된다면 즉각 끝이다'라는 독백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이는 김옥균 자신도 중국 상해행에 대해 내심 매우 불안해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옥균과 몸종 격의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 그리고 홍종우 등은 1894년 3월 23일 여객선 사이쿄마루(西京丸)을 타고 고베항 출발, 3일 후 중국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에서 베이커리나 카페 등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