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기의 왜군이 한양 도성에서 철수를 할 때 남아 있던 조선인을 대량 학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은 왜군에게 협력했던 친일 조선인, 즉 부왜자(附倭者)들이 대부분이어서 전쟁의 부조리함을 다시 느끼게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양국민 사이에 부왜, 가왜(假倭), 항해(降倭)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부왜는 길 안내를 맡는 등 왜군에게 비교적 적극적으로 친일·부역한 임진왜란기 조선인, 가왜는 왜군을 가장해 약탈 등을 자행한 조선인을 일컫고 있다. 항왜는 그 반대로, 왜군이면서 배고픔 등 전쟁의 고초로 조선으로 투항한 왜군을 가리키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화 '명랑'에 등장하는 '츈사'(俊沙)와 김충선으로 잘 알려진 '사야가(沙也加)' 이다. 이중 부왜는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발생했으나 이후 한양 도성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주된 이유는 탐관오리와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때문 이었다. 특히 선조실록에는 충북 충주의 사례도 등장한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접반사 서성의 장계를 보건대, '충주의 사기장 한막동(韓莫同)은 왜놈의 첩자가 되어 중국군을 염탐하였다고 하니, 대단히 흉악합니다.
이하곤(1677-1724)의 장인 송상기는 대제학, 대사헌, 예조·공조판서 각 1번 그리고 이조판서를 무려 5번이나 역임하는 등 숙종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다. 특히 그 전에 충주목사, 충청도관찰사 때 선정을 베푸는 등 우리고장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충주목사 송상기(宋相琦)가 상소하여 백성의 일의 절급(切急)한 상황을 진달하고 청하기를, "한전(旱田)에 급재(給災)하고, 적곡(·穀)을 거두는 것은 3분의 1을 율(率)로 하며, 갑술년8709) 이전의 포흠은 한결같이 모두 탕척하고, 양진창(楊津倉)의 적곡은 전미(田米)로써 대봉하며…"'- 양진창은 충주읍성 북문 부근에 존재했던 국립창고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신임사화 때 화를 입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경종(장희빈의 아들)의 건강이 악화되자 누구를 후계자로 옹립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소론과 노론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소론이 "노론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를 하고 있다"고 공격,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 등 노론계 대신들이 대거 축출됐다. 이른바 신임사화로, 여기에는 이하곤의 장인 송상기도 포함돼 있었다. 이하곤은 장인 송상기가 당시 67살 노구의 몸으로 강진에 유배되
단양 보국사지(輔國寺址)를 고려사에 등장하는 '죽령대원'(竹嶺大院)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뿐만 아나리 고려 후기의 지식인들은 단양 죽령을 '수도 개성에서 한반도 동남으로 가는 두번째로 중요한 길'로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보국사지는 죽령 서쪽 사면인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2리에 위치하는 절터로, 현재도 목이 잘린 장육불상(丈六佛像) 외에 연화문대좌(蓮花紋臺座), 연화문석판(蓮花紋石版), 주초석 등이 주변에 산포해 있다. 발굴 결과 보국사지는 충주 미륵리사지와 마찬가지로 △석실(石室)을 인위적으로 축조했고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장육불상은 안치했으며 △석실 기둥은 대나무 모양의 죽절문석주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나아가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육불상은 불두(佛頭)가 있을 경우 전체 높이가 5m에 이를 정도로 초대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보국사지는 충주 하늘재(계립령) 초입의 미륵리사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주요 간선교통로에 위치한 '국립 휴게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고려시대 어느 문헌에도 절이름이 등장하지 않아, 보국사의 내력과 변천을 알 수 없었다. 이와 관련 부산대 한정훈 박사가 '호서사학회'가 발간하는 '역사
이하곤의 진천 두타산 아래로의 낙향은 여느 선비들과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 선비들의 낙향은 일반적으로 은거, 안빈낙도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하곤의 낙향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산수애호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는 유배중에 있는 장인 송상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세상에 모든 화려한 영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연만을 바라보며 書史(서사)를 오락거리로 삼고 구름과 달을 좆으며 새와 물고기를 벗삼아 여생을 마치기만 바랄 뿐입니다.'- 문집 '두타초' 행간을 살펴보면, 이하곤은 47세(1723년·경종 3) 때 완전히 내려오기 전까지 진천으로의 낙향과 상경을 반복했다. 따라서 그의 중간 낙향은 엄밀한 의미로 '하향'(下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는 진천으로 하향하면 완위각 인근의 자가소유 누정 뿐만 아니라 지금의 괴산 청천면 낙영산을 즐겨 방문했다. 그리고 멀게는 남원 광한루와 장인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도 찾아갔다. 그는 그때마다 시와 산문을 남겼고, 그 자체가 '이하곤 개인史'가 되고 있다. 이하곤의 부친 이인엽은 주천(지금의 초평천) 가에 증조 오촌(梧村) 이대건과 조부 벽오(碧梧) 이시발의 호에서 하나씩 취하여 '쌍오정'(雙梧亭
두타초 책 14에는 '題李一源所藏鄭선元伯輞川渚圖後'(제이일원소장정선원백망천저도후)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와 관련, 이하곤(李夏坤·1667-1724)과 친구 신정하(申靖夏·1681-1716)가 주고 받는 말로 먼저 이하곤의 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남의 집에 소장된 것도 반드시 내가 모아둔 후에야 그쳤소. 근래 그렇지 못하였으니 기호가 이미 쇠퇴했다고 생각했소.(…) 내 집의 완위각에 단지 수 십 폭의 옛그림이 있는데 근래 제인의 필적은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이에 대해 친구 신정하는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느데 또 욕심을 내면 탐욕스러운 것'이라는 투로 답한다. '재대가 수장한 것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거두어 진천으로 돌아갈 때에는 수레에 실음 서화가 꼬리를 물고 길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도 이제 이 화첩에 대해 틈새를 보며 갖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많이 있으면서도 더욱 욕심을 내는 자입니다.' 인용문 중에 '이 화첩'이라는 표현, 제목 중에는 '鄭선元伯輞川渚圖後'라는 내용이 보인다. 바로 이 대화는 겸재 정선(鄭··1676∼1759)의 '輞川渚圖'라는 그림을 둘러싸고 이하곤이
삼국시대 청주와 충주의 치소(治所)는 한 곳에 머무른 것이 아닌, 세 번의 변천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나아가 처음에는 지대가 높은 산성에 위치했으나 8세기 중반무렵에 평지인 지금의 두 지역 도심에 자리잡았다는 설도 함께 제기됐다. 치소(治所)는 고을을 다스리는 관청건물이 위치하는 곳으로, 행정·경제·사회적으로도 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던 공간을 일컫는다. 충북대 사학과 노병식(51·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 씨가 얼마전 '신라 국원소경과 서원소경의 방어시설 변천'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청주와 충주의 삼국시대 치소와 관련해서는 여러 번의 학술적인 논의가 있었으나 문헌사료의 빈약과 고고학적 물증 부족으로 정설화된 이론은 도출되지 않아왔다. 청주의 삼국시대 치소로는 상당산성, 우암산성, 구청주읍성(남문로 일대), 부모산성 등이, 충주의 치소로는 탑평리면 일대, 장미산성, 대림산성, 구충주읍성(성내동 일대) 등이 거론돼 왔다. 노씨는 이번 논문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치소가 일정한 공간에 지속적으로 고정돼 있던 것이 아닌, 정치·경제환경의 변화 등으로 몇번의 변천을 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가 이와 관련해 주목을 한 것은 종전까지는 별반 눈길을 주
루트를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청주지역 모 여행업체가 우리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백제 금동제 신발의 발자취를 따라'라는 여행상품을 내놓아 일반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다. 특히 이 여행상품은 고대미술사 전공자인 장준식 충청대 명예교수가 승선, 이동 중은 물론 현장에서 '해설 마이크'를 잡을 예정이어서 '깊이와 폭이 다른 답사여행'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청주에 본사를 둔 '범한항공여행'(대표 김범제)이 국내 여행업계로는 최초로 탐사와 여행을 겸한 '백제 금동제 신발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상품을 최근 출시했다. 이번 상품은 편의상 금동신발을 주제어로 뽑았으나 백제 금동제 관모도 같은 주목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번 상품은 말 그대로 '백제지역에서 출토됐던 금동제 관모와 신발이 왜 일본 남부에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여행은 해외여행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백제 금동제 관모와 신발이 출토, 이를 전시하고 있는 충남 공주와 전북 익산을 답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는 지난 1971년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와 신발이 전시돼 있다. 또 전북 익산리 웅
이하곤의 낙향 의지 중심에는 역시 그의 진천 장서각인 '완위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완위각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장서돼 있었다. 아들 이석표(李錫杓·1704-?)가 아버지 이하곤을 추념하면 '담헌행장'을 지었다. 이렇게 적었다. "유독 서적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책을 파는 사람을 보면 심지어 옷을 벗어 책을 사니, 모아놓은 것이 거의 만권에 이르렀다. 위로는 경사자집에서 아래로는 패관소설, 의서, 점술서, 불가서, 도가서 등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행장은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옛날 동료, 아니면 그 아들이 죽은 사람의 성명, 관향(貫鄕)·관작(官爵)·생졸연월·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인용한 문장 중에 '만권'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와 관련 일각에는 증조부인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에게 고서 수 천권을 받았다'는 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서지 전문가들은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현재 종손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700여책을 조사한 결과, 증조부 이시발의 장서인(藏書印)이 찍힌 것은 단 1권이고, 나머지 모두는 이하곤의
청주권 내륙과 서해의 해산물 교역 역사와 관련,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조상기)은 오송 제2생명과학단지 예정지인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 일대에서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세기 무렵의 원삼국기 무덤에서 백합조개, 피뿔고둥 등의 유물이 담긴 짧은목항아리를 발굴했다. 또 주변 같은 시기의 무덤에서는 도미로 추정되는 생선뼈와 꿩 등의 조류 뼈가 담겨진 단경호가 출토됐다. 백합조개는 암갈색에서 회백갈색까지 다양하고 피뿔고둥은 엷은 갈색을 나타내고 있다. 조사단은 이에 대해 "원삼국기 식생활은 물론 금강 수계를 이용해 이루어진 내륙지역(청주권)과 해안지역(서해안) 간 해산물 교역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이라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 이후 내륙과 서해 사이에 어떤 형식이든 해산물 교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돼 왔으나 그 고고학적 유물이 원삼국기에서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충북대 성정용(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발굴된 조개류와 생선뼈는 육로가 아닌 금강수계를 통한 해산물 교역물로 보인다"며 "특히 생선의 경우 부패
이하곤의 진천 낙향은 스승 김창협에 대한 변무소(옹호하는 소) 사건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와 관련 실록에는 두 유형의 내용이 기술돼 있다."전 부솔 이하곤은 명가의 자제로서 언론과 행동을 더욱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인데, 흉당(凶黨)과 일을 같이할 수 없음과 외척과 연명(聯名)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여 사론에 속아 따랐으니, 사부의 수치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 당시 정원 조지빈(趙趾彬)이 아뢰는 말이다. 인용문의 포인트는 '외척과 연명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라는 문장에 있다. 당시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은 이하곤과 가까운 촌수가 된다.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집권했다. 그러나 즉위 3년차의 경종은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할 상황이었고, 그런 까닭에 권력은 이미 노론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조지빈이 외척을 걸고 넘어진 것은 그 같은 권력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는 사관의 주관적인 의견인 사론(史論)도 등장한다. 이렇게 썼다. "일찍이 김창협(金昌協)을 사사하였기 때문에 그 소에 참여하였던 것이며, 처의하는 데는 실수함이 없었다. 당시 상황에 개탄하며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